용병 투수 전성시대

9구단 체제로 진행되는 올 시즌에는 외국인 투수의 비중이 더 절대적이다. 한 방송 해설가는 “그전까지 팀당 고정적으로 필요한 선발요원이 4명이었다면, 올해는 3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했다.

재작년 개봉한 영화 <퍼펙트 게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최고의 투수전으로 기억되는 최동원-선동열의 맞대결을 그렸다. 이제는 전설이 된 그날, 둘은 나란히 연장 15회를 완투하며 손에 땀이 나는 투수전을 벌였다. 돌아보면 과거에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 에이스 맞대결이 적지 않았다. 멀리는 김시진-최동원이나 최동원-선동열부터 시작해, 조금 가까이는 조계현-박충식, 송진우-염종석, 주형광-정민철, 이상훈-김상진, 김상엽-이대진, 정민태-정민철 등 당대 최고의 투수들이 선발로 나서 자존심을 건 명승부를 펼쳤다. 경기 전날 팬들이 밤잠을 설치게 하고, 야구장 앞에 텐트를 치고 줄을 서고, 다음 날 아침이면 신문 1면을 커다랗게 장식하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프로야구에서 에이스 맞대결은 자취를 감췄다. 불펜 야구가 대세를 이룬 탓일 수도 있고, 감독들이 당장의 1승을 위해 에이스 간 대결을 기피한 탓일 수도 있다. 2005년 최고의 활약을 보인 손민한, 배영수, 박명환은 정규 시즌에 한 번도 맞대결한 적이 없다. 젊은 에이스의 대명사 류현진과 김광현의 맞대결도 이런저런 이유로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올스타전에서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지만, 둘 다 무성의한 투구로 빈축만 사고 끝났다. 류현진이 미국에 진출하며 둘의 선발 대결은 게임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됐다.

구단들은 외국인 선수 2자리를 모두 투수로 채우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토종 선발투수’의 수는 줄어들었다. 지난해 8개 구단 외국인 선수 16명 전원이 투수였다. NC의 가세로 9개 구단이 된 올해도 19명 전원이 투수다. 이 중 팀 사정상 마무리가 된 KIA의 앤서니를 제외하면 18명이 선발 요원이다. 선수 개개인의 면면도 화려하다. 이브랜드, 레이예스 등 메이저리그 중계에서나 보던 이름들이 눈에 띈다. 메이저리그 경력은 없더라도 마이너리그에서 오랜 기간 경력을 쌓은 내실 있는 선수가 많다. 구단들은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외국인 선수를 고르는 안목을 키웠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외국인 투수의 성공률이 높은 시즌이 될 공산이 크다. 11일 현재 3차례 이상 선발등판한 투수 6명은 모두 한자로는 표기할 수 없는 이름을 가졌다.

9구단 체제로 진행되는 올 시즌에는 외국인 투수의 비중이 더 절대적이다. 한 방송 해설가는 “그전까지 팀당 고정적으로 필요한 선발요원이 4명이었다면, 올해는 3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했다. 9팀이 한 리그를 이루면, 한 팀은 반드시 3~4일씩 스케줄이 비는 날이 생긴다. 4일 휴식 직후 갖는 경기에 1-2-3선발을 차례로 투입하는 경기 운용이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투수가 2경기 연속 선발등판하는 진귀한 장면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이미 SK가 휴식일 직후인 9일과 10일 경기에 외국인 듀오를 투입해 톡톡히 재미를 봤다.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9구단 체제에서는 1, 2번 선발투수가 최대 60경기까지 선발등판하는 것도 가능하다. 연 128경기의 절반에 달한다. 외국인 투수를 3명 기용하는 NC의 경우 최대 86경기, 전체 경기의 68퍼센트를 외국인 선발이 책임지게 된다. NC의 3연전을 보러 온 관중은 사흘 내내 외국인 선발투수만 보다 돌아갈 수도 있다.

외국인 투수가 득세할 동안, ‘토종’ 선발투수는 씨가 말랐다. 있더라도 대부분 30세 이상 베테랑이다. 선발투수를 키우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1~2회는 구종 한두 개를 갖고 힘으로만 밀어붙여도 버틴다. 그러나 5회 이상 길게 던지려면 다양한 구종과 완급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 막 프로에 데뷔한 신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최근 감독들은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 유망주가 입단하면, 선발 수업을 쌓게 하는 대신 곧장 1군에서 불펜으로 기용한다. 당장 실전에서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몇 년 새 1군에서 곧장 성공을 거둔 신인 투수 대부분이 불펜 요원이었다.

이제 선발진 진입 경쟁은 4자리 중 하나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다. 4자리 중 절반인 2자리는 1백만 불을 받는 외국인 투수들 몫이다. 국내 투수들은 남은 2자리를 놓고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인다. 자리는 적고 경쟁자는 많다. 실패하면 언제든 다른 경쟁자로 교체될 수 있다. 불펜 야구가 득세하면서 긴 이닝을 던질 기회도 별로 없다. 5회 이전이라도 조금만 불안하면 바로 교체된다. 몇 경기 연속 부진하면, 불펜으로 내려가거나 2군행 짐을 싸야 한다. 치열한 순위싸움 속에서 구단들은 투수가 얻어맞고 실패하면서 차근차근 선발투수로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줄 여유를 갖기 어렵다.

한국 농구는 프로농구 외국인 선수 도입 이후 토종 ‘빅맨’의 멸종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의 급격한 저하를 경험했다. 야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리그를 지배하는, 국제대회에 믿고 내보낼 수 있는 에이스급 선발투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 남았다. 1라운드 탈락으로 끝난 201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좋은 예다. 류현진이 불참하고 김광현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대표팀은 마운드 구성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믿을 만한 원투 펀치가 없다 보니, 류중일 감독은 국내에서 사용하던 ‘1+1’ 전략을 들고 나왔다. 6이닝 이상 던져줄 선발투수가 있다면, ‘1+1’ 전략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외국인 투수의 범람은 프로야구 흥행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올해는 거의 모든 팀이 3연전 중 1, 2차전에 외국인 원투 펀치를 낸다. 팀마다의 고유한 특색이 사라지고, 이기기 위한 투수 중심의 비슷비슷한 야구가 펼쳐진다. 게다가 외국인 투수들의 스타일조차 공장에서 찍어낸 듯 규격화되어 있다. 하나같이 유먼 스타일 아니면 리즈 스타일이다. 똑같은 야구끼리 똑같은 방식으로 펼치는 대결이 흥미를 끌 수 있을까. 로이스터와 김성근 야구, 김성근과 김경문 야구 등 서로 정반대의 야구가 만나 각축전을 벌이던 게 불과 3년 전이다. 니퍼트가 잘 던져 이기는 팀이 있으면, 가르시아가 홈런포를 날려 이기는 팀도 있어야 야구가 재미있어진다.

야구의 획일화는 순위의 고착화로 이어진다. 모든 팀이 똑같은 야구를 하면, 결국 보다 우세한 전력을 가진 팀이 이기게 되어 있다. 한화는 바티스타와 이브랜드를 기용한 경기에서 모두 패했다. NC도 외국인 트리오를 앞세웠지만 개막 7연패를 막지 못했다.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인 승부의 의외성이 사라지고, 예측 가능한 빤한 결과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12일 현재 경기당 평균 관중수는 9624명이다. 이대로는 8백만 관중은커녕 6백만도 위태롭다. <퍼펙트 게임>처럼 에이스 맞대결 흥행 카드라도 있으면 달라질까. 글쎄. 리즈 대 니퍼트, 유먼 대 바티스타 맞대결로 팬들의 심장을 뛰게 하기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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