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의 추억, 추함, 재미, 반성, 스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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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광장시장 근처라 낮술을 자주 마신다. 한 번은 팀원 다섯 명이 빈대떡, 마약김밥, 막걸리로 1차를 달리고 육회, 소주로 2차를 이었다가 생선회, 순대, 소주로 3차를 완주했다. 그러고 나서 술도 깰 겸 청계천을 산책했는데, 빈손으로 회사에 돌아갈 수 없다는 팀장의 어이없는 헛소리에 낚여 청계천에서 맨손 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다 같이 마시던 테이크아웃 커피 컵을 물속에 넣고 휘저었지만, 물고기도 바보가 아니라서 술 취한 사람 손엔 한 마리도 안 잡힌, 눈물나던 그날 오후…. 김새롬(회사원)

출장차 뉴욕에 들렀다가 JFK 공항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 시간이 길어 바에 앉아 낮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눈을 떠보니 내 몸은 이미 서울이었다. 업무 스트레스가 과중했고 긴장이 풀려 필름이 끊겼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했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건, 참을 수 없이 기이한 이 기분이다. 내가 비행기를 진짜 타긴 탔던 걸까. 문영진(프리랜서)

남자친구와 샴페인 한 병을 챙겨 공원으로 피크닉을 갔다. 낮술이라서 그런지 금방 취했고, 실수로 집에서 가져간 샴페인 잔 끝이 깨져 꽤 많은 유리 파편이 잔에 들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기어이 한 병을 다 비웠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자친구가 응급실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누워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죽는 거 아니냐며 하도 걱정하기에, 이때다 싶어 취한 김에 연약한 연기를 신들린 듯 선보였다. 그렇게 그날 우리 집에서 스킨십 진도를 확실하게 뺐다. 신재경(번역가)

낮에 소맥 몇 잔을 마시고 트위터로 낮술 주정을 부린 적이 있다. “나 취했쪄” 류의 멘션을 난사했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도 대화를 계속 이어갔다. 그날 나는 손가락 끝으로 온갖 주사를 펼쳤고, ‘트친’들은 그걸 캡처 하느라 손가락이 바빴다. 김경록(레스토랑 매니저)

낮에 소주가 더 당긴다. 화사한 햇살에 불을 끼얹고 싶은 심정과 비슷하달까? 그날은 수업이 있는데도 소주가 없으면 공부가 안될 것 같아 스타벅스 텀블러에 소주를 한 병 채워서 강의실에 들어갔다. 하필 자리가 교수님 바로 앞밖에 없어 불안했지만, 설마 걸리겠어 하는 심정으로 앉았다. 교수님이 다가와 목 마르니까 물 좀 마시자고 할 때까진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다. 김상민(대학생)

대학교 친구들이랑 학교 뒷동산에서 낮술을 마시다 길을 헤매는 닭 한 마리를 발견했다. 예쁜 여자 동기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남자 동기들이 모두 이미 풀린 다리를 이끌고 닭을 쫓았지만, 닭은 닳은 비누처럼 자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한 시간을 추격했지만 부상자만 속출할 뿐, 누구도 닭을 차지하지 못했다. 예뻤던 그 여자 동기도…. 정병헌(프리랜서)

여자와 마신 낮술은 다 좋았다. 저녁에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니까. 김민철(회사원)

남자들끼리의 여행의 반은 운전이고, 반은 소주다. 몇 시간씩 운전해 달려간 한적한 동네에 방을 잡고 밤새도록 진탕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또 소주 한 사발을 들이키는 식이다. 그날도 대낮부터 소주를 마시다가 갑자기 다들 마음이 동해서 숙소 마당으로 뛰쳐나가 농구를 하기 시작했다. 취기를 유지한 채 한 2시간 동안 신나게 패스, 드리블, 슛을 하며 뒹굴었다. 서로 욕지거리도 하고 칭찬도 하고 박수도 치고…. 행복해 보이는 완벽한 순간에 단 한 가지 빠진 게 있었는데, 바로 농구공이다. 판토마임으로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낮술. 그럼에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 정진(자영업)

친구들이랑 낮술로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수업에 들어갔다가 그만 엎어져 졸고 말았다. 젊은 강사가 잔뜩 화가 나 나를 깨웠고, 놀래서 일어나다가 그만 정면에서 트림을 하고 말았다. 학생들 다 보는 앞에서 쫓겨난 것보다, 김치를 너무 많이 먹은 사실이 더 부끄러웠다. 최영태(대학생)

커플 동반으로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막걸리를 엄청 마셨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나한테서 입 냄새가 난다기에, 이미 취할 대로 취해 “너도 만만치 않다”며 언성을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확인시킨다며 우리 커플은 다른 커플들에게 “하아, 하아” 숨을 내뿜었다. 그날 등산은 모두에게 더러운 기억으로 남고 말았다. 박현진(방송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