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 리메이크가 변했다

마치 21세기 홍길동전이랄까. 미스 김의 만화적인 설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밑그림이 된 현실은 도드라지는 전형적인 해학과 풍자의 화법이다.



유치한 맛에 본다. 전개가 예상된다. 캐릭터가 과장되고 상황이 비현실적이다.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 드라마 이야기냐고? 유감이지만 일본 드라마 이야기다. 비현실적이란 측면에서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욕하면서 본다’가 막장 드라마를 압축한 표현이라면 일본 드라마에 대해서는 ‘만화처럼 유치한’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때문에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의 반응이 좋지 않을 때는 대개 일본 드라마 특유의 만화 같은 설정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쉽게 결론을 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정말 일본 드라마의 만화적인 정서는 우리에게 어색할 수밖에 없는 걸까. 애초에 ‘만화적인 정서’란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건가. 이 지점에서 최근 KBS2 TV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직장의 신>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화학반응이 자못 흥미롭다.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리메이크한 <직장의 신>은 경제 위기 이후 넘쳐나는 비정규직들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다. 2007년 일본에서 방영된 <파견의 품격>은 못하는 게 없는 만능 파견사원(일종의 비정규직) 오오마에 하루코(시노하라 료코)를 통해 파견사원을 소모품처럼 이용하는 일본 사회를 풍자한다. “불경기에도 믿는 것은 시급과 나 자신뿐”이라고 선언하는 그녀는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긴 사회가 낳은 최후의 저항이다. 단순하게는 약자인 파견사원이 정규사원보다 우월하다는 걸 보여주는 데서 오는 대리만족, 그럼에도 서로 믿고 사는 인간성을 잃지 말자는 훈훈하고 식상한 결말. 판타지에 가까운 오오마에의 존재는 이 드라마를 ‘만화적’으로 만들고, 다들 유치하다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3년 리메이크된 <직장의 신>을 둘러싼 반응들은 “후련하다”, “비정규직의 현실을 잘 풍자하고 있다”는 등 의외로 호의적이다. 게다가 최근 연이어 터진 각종 갑을 관계에 대한 뉴스와 결합하며 그야말로 작금의 현실을 대변한다는 대우를 받는 중이다. 사실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는 조금 과장해서 말해 방송가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나 ‘만화 같은’ 일본 드라마를 그대로 옮긴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는 소재와 뼈대만을 차용해 소위 ‘한국적으로’ 각색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1995년 <별의 금화>를 리메이크한 <봄날>처럼 리메이크의 흔적을 깨끗이 지운 보편적인 이야기가 각색의 정석이었다. 이후 <꽃보다 남자>처럼 원작의 톤까지 그대로 살린 가벼운 드라마들이 연달아 흥행했지만 한편으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유치한 드라마’라는 꼬리표를 달아야만 했다. 어떤 방향으로든 일본 드라마 특유의 유치함은 제거 대상이었는데 <직장의 신>은 달랐다.

<직장의 신>을 둘러싼 여러 평가 중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현실의 반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드라마 속 비정규직에 관한 세심한 설정들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미스 김은 제목처럼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신’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신으로서의 그녀가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활약상에 공감하며 환호를 보낸다. 마치 21세기 홍길동전이랄까. 미스 김의 만화적인 설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밑그림이 된 현실은 도드라지는 전형적인 해학과 풍자의 화법이다. <직장의 신>도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일본 원작 <파견의 품격>에 비해 <직장의 신>의 몇몇 설정과 전개는 오히려 더욱 과장이 심하다. <파견의 품격>의 오오마에 과장은 일본의 여느 직장에 있을 법한 캐릭터라면 <직장의 신>에서의 미스 김은 한국 현실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렇게 완전히 판타지의 영역으로 날아가 버린 캐릭터는 의외의 효과를 자아낸다. 유치함을 넘어 익살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어차피 환상이고 가짜 아닌가. 괜히 동화 속 주인공이 어설프게 현실을 흉내 내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현실이 아님을 대놓고 인정한 틀 안에서 현실에서는 담아내지 못할 현실의 단면을 담아내는 것, 그것이 최근 일본 드라마 리메이크들이 취하는 전략이다.

요컨대 <직장의 신>은 직장인의 감정을 담아낸 어른 동화다. 뭐든 척척 해내는 미스 김의 존재는 확실히 후련하다. 갑을 관계라곤 하지만 모두 ‘을’뿐인 을의 전쟁 속에서 미스 김은 언제나 ‘슈퍼 갑’으로서의 자존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직장의 신>은 88만원 세대의 비애와 비정규직의 눈물은 물론 정규직의 불안도 함께 담아낸다. 판타지가 강해질수록 현실의 그림자도 짙어지는 풍자의 힘은 깊이 있는 웃음을 만드는 코미디의 매력이다. 생각해보면 비단 <직장의 신> 뿐만이 아니다. 최근에 일본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을 리메이크한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감각적인 영상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에서 벌어지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 동화적 상상력으로 연결되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만화적 설정. 하긴 모두 을이 되는 세상에선 가끔 이런 아주 우월한 모습들을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엔 호의적인 분위기에 힘입은 듯 <여왕의 교실>까지(고현정 주연) 제작이 결정되었다. 현실이 팍팍하고 비루할수록 우리에겐 영웅이 필요하고, 그런 만큼 당분간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계속 쏟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