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코트

계절처럼 마음이 바뀔까 봐 걱정될 때, 이런 코트를 산다. 당장 마음이 놓인다.

Raf Simons
올 가을겨울 컬렉션 중 제일 좋은 건 라프 시몬스다. 전엔 한 번도 그의 옷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고, 그에 대한 평가는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룩이라면 마음이 바뀔 수밖에. 실크와 얇은 울을 섞은 것도 재치 있고, 펄럭이는 분홍색 셔츠 소매도 적절하다. 그리고 허리에 묶어야 할 벨트를 풍향계처럼 만들어 목에 두른 것이야말로 기발하다. 조롱거리가 될지 유머와 위트가 될지는, 이처럼 완성도에서 판가름 난다. 모델이 보릿자루 들 듯 쥐고 있는 가방은 이스트팩과 라프 시몬스의 협업 제품이다. 파리 콜레트에서 딱 하나 남은 제품을 두고 독일 남자와 신경전을 벌이는 틈에 엉뚱한 중국 여자가 채갔다. 이렇듯 인생은 알 수 없다. 라프 시몬스를 좋아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강지영

 

Burberry Prosum
뻔한 트렌치코트는 지루했다. 우연히 길에서 몽크 스트랩을 도용한 수상한 고무줄 구두를 보기 전까진. 그제야 전통적인 트렌치코트의 소매 끈이나 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났다. 유독 올해는 다들 이런저런 부분을 바꾸며 국적불명의 트렌치코트만 잔뜩 만들었다. 트렌치코트의 영역을 어디까지 확대해야 할까? 디자이너의 선택도 디자인이라면, 지금 현재적인 시점에서 어떤 옷, 이를테면 전형적인 트렌치코트를 만드는 것도 디자인이다. 무작정 비틀고 바꾸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바꾸기 위해 바꾼 디자인에서 진짜를 찾긴 어렵다. 여기 소재만 바꿔 놀랍도록 화끈해진 송치 트렌치코트가 있다. 이런 게 잘 된 디자인이다. 오충환

 

E.Tautz
이타우츠는 온전히 패트릭 그랜트가 맡으면서부터 젊고 국제적인 감을 찾았다. 그는 요즘 오래되고 느린 세계였던 새빌로의 재단을, 빠르고 감각적으로 살린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번 쇼의 주인공은 여러 용도로 쓰였던, 과장되고 굵직한 스코틀랜드 프레이저 타탄체크였다. 그러던 중 ‘커피 브레이크’처럼 잠시 잠깐 눈에 띄었던 게 있다. 울 소재 트렌치코트로 깊은 보라색이다. 어깨 끝부터 목 뒤로 넘어가는 래글런 소매, 적절한 길이와 양감, 질끈 묶은 벨트의 위치, 같은 소재로 맞춘 크루 햇까지 뭐 하나 거슬리는 게 없다. 게다가 결정타는 코트 안에 입은 페이즐리 무늬의 실크 셔츠와 바지. 아, 역시 영국 남자란. 김경민

 

Valentino
싱글 트렌치코트를 좋아한다. 거추장스러운 더블 트렌치 코트엔 손이 잘 안 간다. 일단 허리 스트랩 자체가 성가신데다, 묶고 남은 가닥이 어정쩡하게 남는 것도 싫다. 스트랩을 푼 채로 단추만 잠그면 바보 같고, 다 풀어 젖히면 덜렁거리는 스트랩이 난잡하고, 그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손을 넣고 뺄 때마다 빠지고, 그걸 다시 집어넣고…. 발렌티노는 비슷한 형태의 갖가지 싱글 트렌치 코트를 만들었는데, 가장 마음에 든 건 이거다. 평범한 듯 비범한 포도주색 체크, 단단한 질감, 래글런은 아니지만 유연하게 꺾이는 어깨선. 그리고 가장 좋은 건, 누르거나 당기면 끝인 스냅 버튼. 성가신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단순한 남자를 위한 최고의 트렌치코트다. 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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