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座로부터

대구미술관에서 권부문의 전시 <ConStellation>이 열리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작가가 밀어붙이듯 열망해온 꿈들이 각각의 이미지의 방으로 재현된 대규모 전시다. 우리는 각각 그 앞에 선다. 그리고 그 풍경으로부터, 온전히 겪어야만 하는, 육박해 오는 실체와 맞닥뜨린다.

Boo Moon (Stargazing at Sokcho #6), 2002
Boo Moon (Stargazing at Sokcho #6), 2002

 

BooMoon (Stargazing at Sokcho #3), 1999
BooMoon (Stargazing at Sokcho #3), 1999

 

Boo Moon (Stargazing 1999-2013) : video installation for 32 monitors, 2013
Boo Moon (Stargazing 1999-2013) : video installation for 32 monitors, 2013

 

Boo Moon (Untitled #11510, Kvisker), 2010
Boo Moon (Untitled #11510, Kvisker), 2010

전시가 열리는 대구는 하필 권부문의 고향이지요.
모든 사람이 고향에 애증이 있지 않겠어요? 이런 일이 마냥 흔쾌하진 않아요. 고향이라는 의미라면, 이미 대학교 때 서울로 떠나면서 끝을 냈거든요. 대구에 와서 사람들과 교류할 때조차 외부적인 공기를 지닌 이방인 같았어요. 불편함을 주는 거죠. 내년에 제가 60입니다. 왜 이 시점에 다시 대구인가? 제의를 받았을 때 복잡했죠. 해야 하나? 누군가는 펄럭이는 전시 배너를 보면서 금의환향이라는 말을 해요. 우려하던 얘기라서 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죠. 금의환향이라는 것은 그 고향이 최종 타깃일 때다. 나는 아니다. 추호도 그런 의식이 없다. 나는 소환당했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소환이냐가 중요하잖아요? 아직도 이곳이 내게 고향이라면, 뜻한 바를 세워서 정한 방향으로 가는 출가로서 이 전시가 나를 소환한 의미를 갖는다면, 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에너지를 갖추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거죠. 마치 고향에 대한 애정이나 불편함을 소원 수리하듯이, 그렇게 대구를, 고향을 얘기하고 싶어요.

전시는, 지난 15년 동안의 작업에서 선별한 작품들이 각각의 방을 만드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여 있고 또한 따로 있습니다.
거침없이 나를 밀어붙여서 밀고 온 작업들을 각각의 이미지의 방으로 실현했죠. 정말 꿈꾸던 이미지의 방을 구현한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은 스마트폰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선택한 이미지를 보는 세상이에요. 옴짝달싹 않고 요 정도 사이즈로 원하는 이미지를 불러내죠. 여기서 내가 이미지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절실해진 시점이 오는 거죠. 인간의 눈으로 아무리 들여다봐도 파리의 눈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잖아요. 그러나 현미경으로 그것을 어마어마하게 드러내줄 때 다른 세계를 알게 되잖아요. 그 실체를 경험하는 거죠. 환상이냐? 환상 아니죠. 그것은 세계 자체죠. 제 사진 앞에 서는 사람에게도 그것이 세계 자체가 될 수 있게 하고 싶죠. 말하자면 제 사진 이미지들이 전시장을 통해서 사람을 소환하잖아요. 그곳에 서게 하는 장치잖아요. 각각의 이미지의 방을 통해 자기화하는 공간을 던지는 거죠.

전시 제목을 ‘성좌’라고 붙이셨죠? “별 사진인가” 그러기도 합니다.
사실 별자리를 만들던 시대의 인간은 어리석었죠. 죽은 빛에 이데아를 붙였던 거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어떤 이미지를 가장 공들여 자기화시킨 좌표이자 표상이 별자리였다는 사실이 오늘날 더 빛나는 거죠. 이미지의 실체 앞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금 입장에서 보니, 그 시대의 어리석은 인간들이 너무 현명한 삶을 먼저 살았던 거예요. 이미 그걸 이데아화시켰던 거니까요. 그 앞에 선 오늘날의 관객들이 자기화하는 시간을 거치면서 다른 인식의 장을 경험할 거라고 생각해요. ‘별 사진’으로 오해할 수 있지 않느냐. 오해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런데 사실 이것을 컬러 맵으로 봐도 괜찮아요. 자유로운 입장을 주고 싶은 거죠. 개념적인 작업으로 봐달라는 주장은 없어요. 전시를 하는 입장에서는 제 작품을 이미 알아챈 자와 아무리 얘기해도 내 영역 바깥에서 출발한 자가 있다고 봐요. 제가 섬겨야 할 사람은 말하지 않는 사람이겠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상대로 작업해서 잘 누리고 사는 작가도 많죠. 저는 그런 쪽에 서고 싶지 않아요. 말하지 않는 무서운 한 사람이 지나가는 상상을 항상 하죠.

그렇게도 권부문은 여전히 단독인 걸까요?
진짜 자기 작품을 불살라버리고 싶은 사람은 자기 손으로 불사르죠. 카프카처럼 불사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맡긴 사람은 사실 불멸을 믿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제가 외톨이를 선택한 건 아니에요. 용서할 수 없고 고통스러워서 외면하다 보니까 외톨이가 됐는데, 이제는 외톨이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거죠. 그러니 소환당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꾸 뭔가를 드러내야 하는 게 불편하죠. 야바위꾼이 되지 말아야 하는데 자칫 그렇게 될 가능성이 너무 커요. 어차피 인간 사회의 프로모션이니까요. 거기에 화투패처럼 깔려놓고 내가 거부할 수 있는가? 이런 회의가 크죠. 여기서 어떻게 버틸까 하는 건 나한테 과제예요. 잘 버텨야 한다, 그래야 다음 작업이 있다, 그렇게 가는 거죠. 안타까운 작가 많이 봅니다. 존경하던 작가가 말년에 직접 화투패 뿌리는 거죠. 돈은 다 따먹고 야바위판은 성공하죠. 하지만 자기가 고갈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가 더욱 영민한 놈이 되길 바라죠. 영민하지 못하니까 장치를 둬요. 주위에 나를 극단적으로 엄격하게 지켜보는 인간들을 포진시키는 거죠. 한순간에 나를 “저 새끼 쓰레기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지내는 사람을 주위에 두는 거죠. 내가 말을 안 다듬잖아요. 무서운 사람 곁에 서고 싶은 거예요. 나나 잘 하지, 남 얘기해서 뭐 하나 싶지만 반면교사를 잘 삼아야 해요. 더 주도면밀하게 봐야죠. 대개 “안 보면 그만이지” 하잖아요. 근데 그건 안 봐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거거든요. 저는 더 이상 없어요. 다른 땅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