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이 있다

그는 시인이다. 꼭 젊은 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첫 시집을 냈는데 책이 흰색이었다. 그 시집은 매우 아름다웠다



11월에 황인찬을 두 번 만났다. 수요일 저녁 6시 어둡는데, 계동 다방에서 벗은 코트를 옆자리에 놓으며 그가 말했다. “여기가 <우리 선희>에 나온 그 집이군요.” 일요일 오후 3시엔 신사동 스튜디오로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머리에 아무것도 안 바르고 왔어요.” 계동에선 커피를 마셨고, 스튜디오에선 설중매를 마셨다. 말할 때면 몸을 많이 썼다. 테이블에 손으로 도형을 그리거나, 두 팔을 허공에 휘젓거나. 의자 속으로 푹 꺼지기도 사마귀처럼 몸을 길게 세우기도 하면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점점 뭘 안 쓰고 싶어요. 다음 시집은 뭐가 더 없는 시집이 될 거예요.” 그 말이 조짐이었을까? 두 번의 문답을 녹음한 파일은 알 수 없는 기계음과 온통 웅웅대는 잡음으로 변해있었다.

남은 건 질문을 위해 써둔 메모뿐. 거기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두서도, 물음표도 없이 쓰여 있다. “문학상 심사평에도 ‘모르겠다, 근데 좋다’는 식의 말이 있을 줄이야! 첫 번째 시집으로부터 1년쯤 지난 소감. 그런데 이 시집은 하얗다. 흰색이라는 ‘컬러’라기보다 탈색되어 날아간, 흩어진, 그 이후 같다. 말하자면 빛일까? ‘있다’와 ‘없다’가 대립하지 않는 빛. 하긴, 이 시집에 컬러라고는 나오지 않는다. 물이 있으니 물을 마시듯이 시를 읽었다. 다 읽고 나면 제목을 다시 한 번 봤다. 말하자면 제목을 다는 건 당신이 시로 부릴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일일까? 멋일까? 신성과 결벽. 당신은 손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터치 터치. 어떤 죄의식. 이 시는 어디서 쓰였나. 유년도 여정도 없이 당신은 어디에 있나. 그곳을 모텔로 생각하기도 했다. 정오가 가까운 일요일의 모텔 침대. 거기서 시인이 쓰거나, 독자가 읽는다는 생각. 이 시집은 실내에 놓인 겨울 시집이다. ‘건조과’라는 말의 향기로부터 차를 끓인다. ‘건조과라는 말의 향기로부터 차가 끓는다’가 좋을까? 이미 제목을 정했다. 황인찬이 있다,라고.” 기억나는 말을 얼기설기 조립하는 대신, 기억나지 않는 그의 시를 생각했다. 생각하면 빛을 느꼈고, 읽으면 빛이 보였다. 실내에 빛이 닿는 곳, 그렇게 사라진 곳. 그곳을 둘러싼 빛이 아닌 것들. 어느 시엔가 “겨울은 낮에도 어두웠다”는 구절이 있다. 이 시집을 겨울에 처음 읽는 이들을 내내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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