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GQ 어워즈<1>

신중히 생각하고 완전히 멋대로 뽑았다.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로따로 올해의 수상자와 수상작과 수상한 것들을 가려냈다. 갈채와 꽃다발과 위로와 유감과 냉소와 분노 또한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로따로 전하고자 한다.



올해의 연기 / <감자별> 노주현
김병욱표 시트콤에 나오는 중년 남자는 언제나 좀 허당이다. 전형적인 가장이자 아버지라기엔 할아버지에게 너무 자주 쥐어박히는 형편이랄까? 하지만 결코 캐릭터에 붙박이는 법은 없으니, 그는 반항하고 수긍하고 따뜻하고 무서운 와중에 좀 모자라기도 할 뿐이다. 노주현이 <감자별>에서 연기하는 노수동이라는 인물도 그렇다. 다음은 21회에 나온 한 장면. 자신을 험담하는 제수(오영실)에게 억울한 감정을 느낀 노수동은 따져 묻는다. “제수 씨한텐 제가 그냥 평면 TV처럼 얼굴만 넙데데한 좀생이인가요?” 그럴 때 그는 자못 진지하다. 이치에 밝은 것도 같다. 이유야 어쨌든 길선자는 미안해한다. 하지만 갑자기 노수동은 이렇게 말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평면 TV는 저보다 제수 씨 아닌가요?” 제수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노수동은 완구업체 사장으로 중후하게 옷도 잘 입는 남자지만, 전립선비대증으로 ‘쉬’를 못해 힘들어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결정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구순이 넘은 아버지에게 별 이유 없이 꿀밤을 먹을 땐 “왜 때리세요?”도 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는 없는 인물을 연기하는 노주현은 유연하다. 이랬다저랬다 종잡을 수 없는 게 아니라, 한 몸으로부터 유연하다. 온전함이라는 잣대로 보자면 누구나 모자라다. 평범함이라는 잣대를 대면 누구나 평범하지만은 않다. 김병욱표 시트콤 속 인물은 거의 그렇다. 그걸 현대 드라마의 교양이라 여긴다. 노주현은 극본과 연출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을 넘어, 충분히 이해하고 연기한다. 과연 현대적 교양이 넘치는 연기다.

올해의 소문난 잔치 / 설국열차
<설국열차>는 큰 잔치였다. 총제작비 4백억원. 즉 영화 7~8편은 충분히 만들 수 있으니 말하나 마나. 기대는 컸고, 논란은 부풀었다. 이 성대한 잔치엔 손님이 많았다. 손님들은 잔치에 차려진 대부분의 음식을 맛있어했다. 미식가들의 품평회도 열렸다. 한쪽에선 요리사의 맛이 예전보단 덜하지만 여전히 맛있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선 음식을 내오는 순서와 배치하는 방식이 ‘자본주의의 억압’을 나타낸다고 찬양했다. 어쨌든 어떤 미식가도 ‘맛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접받는 잔칫집에선 맛있게 먹는 게 예의다. 하지만 그 잔치는 공짜도 아니었고, 초대받은 사람도 많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잔치에 가는 사람들은 제쳐 놓고라도, 이 많은 미식가의 입맛에 하나같이 맛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올해의 능력자 / 김수현
작년 ‘GQ Awards’에서 김수현은 ‘올해의 CF 모델’로 이름을 올렸다. 드라마 <해를 품을 달> 이후 밀려드는 CF를 모두 근사하게 소화해낸 데 대한 인정이었지만, 배우로선 여전한 물음표가 있었다. 올해는 그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꿨다는 점에서 능력자로 선정한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관객수 695만 명을 끌어들였다. 전국에서 1천여 개가 넘는 상영관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고, 젊은 배우들의 어린 여성 팬들이 팬 미팅하듯 영화를 관람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김수현이 아니었다면 분명 흥행 성적은 달라졌을 것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이후 아이돌을 주연급으로 내세운 영화가 흥행 면에서 여러 번 고꾸라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제 능력자라는 느낌표를 떼고 배우로서 한자리를 어떻게 차지할지는 다시 또 김수현에게 달렸다.

올해의 초능력자 / 이종석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의 이종석과 그 이전의 이종석은 완전히 다르다. 이런 걸 두고 ‘한 방’이라고 표현한다면 이종석이 서운할까?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목에 두른 헤드폰은 촌스러웠고, 피가 나기 일보 직전인 것 같은 붉은 입술과 껑충한 다리는 기존 남자 주인공과 결이 달랐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캐릭터로 승화시켰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들리는 초능력을 가진 박수하가 그랬듯이, 드라마 속 이종석은 한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끌어당겼다. <관상>과 <노브레싱>으로 이어진 작품에서 살짝 김 빠진 사이다 같은 반응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종석의 입지엔 큰 변화가 없다. 그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얼굴 여기저기에 가로세로로 가져다 대면 박수하의 초능력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으니까.

올해의 강심장 / 아이유
모든 무대의 중심에는 꽃과 돌이 한꺼번에 날아드는 걸까? 환호는 그걸 이겨내는 사람만의 몫일까? 아이유에겐 자칫 가혹할 수 있는 한 해였다. ‘사진’ 한 장에 대한 실수, 밑도 끝도 없는 소문, 호사가들의 무표정한 입방아, 그저 호기심, 마음과 마음이 얽힌 일들, 유명인이라서 감내해야 한다고 우겨넣듯 참기엔 저열하고 비겁했던 것들. 그래도 그녀는 묵묵히 왔다. 가수 본연의 길을 가면서 배우로서의 외면도 확장했다. ‘그 사진’ 한 장에 대해선 “힘들고 자시고가 아니라, (자신이) 미안해야 할 일”이라고 단호하고 깨끗하게 말했다.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아서 좋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한민국 연예인 중 ‘악플’에 신경 안 쓰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거”라며 ‘하하하’ 웃고, “제가 고집이 좀 세요. 소속사도 하라고 해서 하는 애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말할 때는 그 굳은 심지가 제대로 보였다. 강한 사람만이 솔직할 수 있는 시대, 아이유는 나이와 관계없이 그렇게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래서 아이유는 거의 모든 세대의 연인일 수 있다. 자상한 누나이면서 나이와 관계없이 기댈 수도 있을 것 같은 어린 여자. 반주 없이 듣고 싶은 그녀의 목소리처럼, 공고하고 또렷하게.

올해의 뮤직비디오 / EXO ‘으르렁’
‘아이돌’이라는 말이 신선함을 잃었다고 지루해할쯤 엑소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금세 깨달은 사실은 ‘아이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리. 특히 그 뮤직비디오는 번쩍번쩍했다. 아이돌, 특히 SM의 뮤직비디오라면 으레 눈이 멀 것 같은 조명 아래 인형처럼 보정된 피부 톤으로 동작하는 ‘스튜디오형’ 뮤직비디오가 떠오르는데, 엑소의 ‘으르렁’은 우선 그걸 과감히 벗어났다. 그러고는 12명이나 되는 ‘하나같이’ 잘생긴 남자애들을 ‘하나하나’ 입체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물결치는 카메라가 멀리서 가까이서 몸소 12명을 체험해내는 ‘롱 테이크’를 택했다. 잔물결 같은 도입부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하는 건, 6명식 나뉜 2개조 중 두 번째 조가 화면 왼쪽으로 한 발로 뛰며 이동하는 안무를 카메라가 따라갈 때다. 과연 이 뮤직비디오가 주는 쾌감이 극대화되는 장면이다. 실은 뮤직비디오 이전에 모든 게 조화로웠다. 일단 노래가 좋았고, 아이돌의 영원한 아리아인 교복을, 어떤 의미에서 ‘대충’ 입은 스타일링이 빛났다. 그렇게 한 편의 뮤직비디오는 ‘아이돌’이라는 말의 중심부터 주변까지 단박에 갈아치웠다.

올해의 한국남자 / 샘 해밍턴
군대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한국말을 잘한다.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문법이 틀릴 때도 있지만, 질문의 핵심을 알고 대답한다. 그러다 힘들면 “삭신이 쑤신다”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핵심은 그 말에 있다. 불필요한 눈치와 쓸데없는 격식이 없다. 그러면서 위계질서를 배워간다. 한국에서 한국 남자들은 어느샌가 속 시원히 말하길 꺼려하며, 눈치를 보다 불만이 늘어간다. 위계질서에 맞춰 복종하기를 원하지만, 어느새 자신에게 복종을 강요하면 눈살을 찌푸린다. 완벽하게 서구화되었다고도 볼 수 없고, 깔끔하게 과거의 잔재가 없어지지도 않은 한국에서 샘 해밍턴의 모습은 새삼 새로웠다. “난 전생에 한국 사람이라니까.” 자신이 전생에 한국 남자였다고 당당히 말하는 남자, 과연 우리 주변에 많을까.

올해의 다사다난 / 다이나믹듀오
시작은 ‘올킬’이었다. 지난 7월, 음원 차트에서 가장 잘 팔린 음반은 다이나믹 듀오의 7집 였다. 힙합보단 다른 요소들을 대거 투입하며 변신을 꾀했던 전작 와 달리, 성공적이었던 초기작들의 방법론을 되살렸다. 8월엔 이센스의 폭로에 가까운 디스곡으로 잠시 휘청거렸지만, 음악이란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일로 볼 수 있었다. 그 곡에서 이센스는 최자는 “랩 퇴물”이라 표현했다. 9월에 터진 최자와 설리의 열애설은 그 말에 대한 위트 있는 반격으로 작용했을까? 그리고 10월, 다이나믹 듀오는 다시 의욕적으로 전국 투어를 계획했다. 연말까지 세 번의 공연을 계획했다. 그 사이 같은 소속사의 프라이머리는 무한도전 가요제에 출연했다. 박명수에게 ‘I Got C’를 써줬다. 개코는 랩을 맡았다. 11월 2일, 무한도전 가요제의 음원이 공개됐다. ‘I Got C’는 공개 직후 표절 시비가 불거졌고, 결국 판매 중단 조치를 내려야 했다. 최자와 개코에겐 퍽 ‘다이내믹’한 여름과 가을이었지만, 아직 12월이 남았다.

올해의 안방마님 / 이보영
<내 딸 서영이>의 최고 시청률 47.6퍼센트.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최고 시청률 23.1퍼센트. 모두 이보영이 만든 기록이다. 올 한 해 안방극장에서 이보영만큼 시청률과 이슈를 모두 잡은 여배우는 없다. 청바지보다 펜슬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이미지, 나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은 착한 딸의 얼굴, 기구한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눈빛 때문에 주말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이보영은 늘 빛났다. <내 딸 서영이>는 이보영이 잘하던 걸 최대치로 끌어올려 성공한 드라마에 가깝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이보영의 존재감은 그래서 더 신선하다. 그녀의 얇은 목에 젊은 남자의 얼굴이 감길 때, 그녀가 얇은 살갗에 주름을 만들며 오리 입술을 삐죽 내밀 때, 안방에 앉은 사람들은 이 ‘언니’의 로맨스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올해 지성과 결혼해 진짜 안방마님이 됐다.

올해의 극본 / <나인>
아홉 개의 향초를 피워 아홉 번 20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설정 자체는 오히려 평범하다. 작가가 매회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에 비하면. <나인>은 이미 틀이 꽉 짜여져 시청자의 물음도 제작자의 변심도 끼어들 틈이 없는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이 최대치였다. 과거로 돌아간 후 나비 효과처럼 변하는 현재의 상황이나, 시청자의 짐작을 훌쩍 넘어서는 이야기의 의외성은 치밀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특히 한 회 한 회 완결성 있는 에피소드를 꽉 채워 넣고, 다음 회에 대한 충격까지 준비한 회차별 구성은 시트콤 출신 작가의 비범한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드라마가 끝나면 칠판을 끌고 와 타임라인을 직접 그려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 지적 쾌감도 충분했다. 송재정 작가의 3년 고생이 시청자의 즐거움으로 돌아왔다.

올해의 흥행 / 대림미술관
작년부터 올 3월까지 이어진 <스와로브스키, 그 빛나는 환상>과 올 4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슈타이틀展>는 엄청난 흥행으로 이어졌다. 이번엔 <라이언맥긴리 - 청춘, 그 찬란한 기록>이 내년 2월까지 이어진다. 그 다음 전시는 영국의 디자인 그룹 <트로이카展>로 내년 4월부터 10월까지 열릴 예정이다. 대림미술관이 원래 1년에 두 번의 전시만 하는, 장기전을 주로 하는 미술관은 아니었다. 아마도 2011년, <유르겐 텔러 - 터치미>와 <칼 라거펠트 사진전>의 흥행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1년에 두 작품씩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올해 <슈타이틀展>의 경우 주말이면 아이와 어른, 연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그 모습이 흡사 놀이공원에 온 것 같았다. 이제 대림미술관은 미술의 격의를 없애고 누구나 쉽게 미술을 접하는 장소로 꼽힌다. 하지만 대림미술관이 가장 아름다웠던 건 주명덕의 사진이 걸려 있을 때였다.

올해의 멋 /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멋은 부린다고 나는 게 아니라지만, 이왕 부리려면 어떤 시선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올 한 해, 서울아트시네마를 통해 생소하지만, 누군가에겐 절실했던 영화들을 소개했다. 특히 최근의 ‘마스무라 야스조와 이치카와 곤’ 특별전이나, ‘이스라엘 영화제’는 1천만 영화의 무덤에서 유일하게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했다. 외국 영화뿐 아니라 한국 다큐멘터리를 ‘가족’이라는 카테고리로 엮는 시도나 여름휴가 기간에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보여준 헤수스 프랑코, 알랭 로브그리예의 뱀파이어 영화에선 어떤 영화를, 언제 틀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멋이란, 확신에서 출발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서울아트시네마를 서울에서 제일 멋진 영화관으로 만들었다.

올해의 음반 / 김현식 < 2013년 10월>
유작에는 신화가 반쯤 덧붙는다. 그것까지 걷어낼 만큼 야박한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설사 인정머리 없이 굴려던 사람도 김현식의 유작 앨범 앞에서는 그렇게 못할 것이다. 상업 음반으로서 최소한의 꼴을 갖추기 위해 스트링이나 피아노 등의 간단한 반주를 더한 건 알겠는데 그게 오히려 방해 같다. 김현식이 임종 이틀 전 병실에서 카세트 데크에 녹음한 ‘그대 빈들에’에는, 절박하게 부른 노래가 청자의 마음에 닿는다는 추상적인 관념이 사실로 확인되는 위대한 음악적 순간이 있다. 9곡의 미발표 곡과 전작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지만 병실과 자택을 오가며 다시 부른 12곡도 들어 있다.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곡들을 복원한 최악의 음질인데도 거의 귀기를 품고 부르는 김현식의 노래를 당해낼 도리는 없다.

올해의 프로그램 / <그것이 알고 싶다>
SBS가 막 개국했을 무렵에는 일요일 아침에 편성돼 있었다. 주로 초자연적 현상을 다뤘던 걸로 기억한다. 빙의, 귀신, 혼령 같은 것들. 이후 <그것이 알고 싶다>는 꾸준히 진화했다. 2010년에는 천안함을 둘러싼 공방을 정면으로 다뤘다. 올해는 범죄와 사고에 집중한 경향이 있었다. 7월 20일에는 아시아나 HL7742기의 추락을 다뤘다.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일의 이면을 집중 추궁했다. ‘모녀의 시신’, ‘여대생 청부 살해 사건’, ‘이별 살인’ 같은 말은 듣기만 해도 잔근육이 움츠러들었다. 하물며 모두 사실이라서…. <그것이 알고 싶다>가 추적한 이면은 그냥 사건의 기록이 아니었다. 이 시대를 같이 살아내는 어떤 사람의 매우 극단적인 추악함을 목도하는 일이었다. 방송 직후에는 전국적인 분노가 들끓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었지만, 그리고 알아서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 사회라는 게 본디 그다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고, 그러니 직시해야 하는 일들을 피하면 안 된다고 <그것이 알고 싶다>는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1992년 이래 지금까지, 그들이 쌓아온 꾸준한 신뢰를 기반으로.

올해의 포장 / 에프엑스
‘첫 사랑니(RUM PUM PUM PUM)’가 수록된 에프엑스의 2집 앨범은 분홍색 VHS 비디오테이프 상자 안에 담겨 있다. 앨범 타이틀은 ‘핑크 테이프Pink Tape’, ‘분홍색 비디오 테이프 안에 다섯 명의 소녀가 들어있다’는 건, 어떤 의미로 꽤나 자극적이었다. 선공개한 아트필름도 그랬다. 소녀는 자체로 아름답되, 그 바탕에는 아찔할 정도의 불안이 잠재돼 있다는 걸 SM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드러냈다. 창조하고 전시했다. 위태위태하고 비밀스러워서, 그래서 예쁜 순간들을 F(x) 2집의 디딤돌로 삼았다. 이렇게 쌓은 상징을 바탕 위에 공개된 무대는 노래 이상의 이야기를 덧입고 있었다. 한 곡의 노래,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쌓은 건축적 구성. F(x) 2집의 포장과 마케팅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야말로 지금 가장 성실하고 영리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는 분홍색 증거였다.

올해의 과대포장 / 트러블 메이커 ‘내일은 없어’
사진 한 장으로 시작했다. 현아가 거의 속옷만 입고 장현승의 다리 사이에 앉은 모습이었다. 만만치 않은 수위였다. 이어 여러 종류의 동영상 티저가 나왔다. 춤만 추는 버전, 서로 싸우다 갑자기 키스를 하는 드라마 버전 등등. 공식 뮤직비디오에 이어선 현아가 아예 장현승의 위로 올라앉은 미공개 사진이 나왔다. 무삭제판 뮤직비디오도 따로 있다고 했다. 한정판 미공개 컷은 또 뭘까. 거기선 장현승의 손가락이 현아 입 안에 들어가 있었다. “완전 19금”, 베드신 위엄”, “파격 란제리”란 뉴스는 뭐든 하나씩 발표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따라붙었다. 복잡하고 떠들썩한 게 콘셉트인가? 정작 뮤직비디오는 야하지 않았다. 그런 과잉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이미지로 충분할 것을, 이야기와 연기와 배경과 분장을 더했다. 자의식 가득한 장현승의 얼굴이 조커로 변하는 장면에선 과연 적수가 없다는 현아의 ‘색기’조차 무용한 것 같았다. 전작엔 적어도 긴장한 듯한 장현승을 거침없는 현아가 리드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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