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영을 보았다

올해, 몇 편의 괄목할만한 영화에 그가 등장했다. 스치듯 했는데, 자꾸만 생각났다.

<신세계>,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화이>에 출연했죠. 그 각각을 생각하건데 ‘올해의 남자’라는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하지만 동의하기는 좀 어려워요.

그런데 모든 영화에서 빨리 죽었어요. <신세계> 석 회장은 나오자마자 트럭에 치였죠. 짧지만 강렬했어요. 다른 배우가 아니라 이경영이라서 그랬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신세계> 제작자였던 그 친구가 하는 첫 영화여서 ‘형이 도와줄 거 있으면 도와주겠다’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나는 잊고 있었는데 그 녀석은 잊지 않고 있었더라고요. 작품성으로나 흥행 모두 성공해서 그저 다행이었죠.

<더 테러 라이브> 보도국장도. 안에 있는 걸 다 걷어내면 비열하고 차가운 것만 남나요?
방법론인데, 그건 아니고요. 나는 기본적으로 성선설을 믿어요. 다 착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캐릭터는 시나리오에 기본적으로 다 드러나기 때문에, 충실히 작품을 따라가면 비열함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아주 단순하게 출발합니다. 시나리오 자체가 아주 많은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요. 그래야 캐릭터에 더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내 안에 알 수 없는 내가 많은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더 테러 라이브>는 편집을 해보니까 원래 연기한 것보다 훨씬 더 비열하게 나왔어요. 그러고 나서 감독님이 저한테 그랬어요. “선배님 고맙습니다.” 김병우 감독이 워낙 재능이 있어요. 편집 포인트를 너무 잘 알고 있죠. 배우한테 뽑아내야 할 것들을 정말 다 뽑아내는, 아주 영리한 감독입니다. 그리고 애늙은이 같아요, 감독님이. 하하. 어린 노무 자식이.

이경영이라는 배우가 다시 영화에서 보이기 시작한 건 작년 말 <남영동 1985>부터였죠?
내가 영화라는 이 거대한 숲에 다시 돌아오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남영동 1985>가 마련해 줬어요. 그 이후 영화인들의 관심, 애정이 다시 새롭게 시작됐고, 나는 그 애정을 아주 기쁘게 받았죠. 역할의 비중을 떠나 그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들. 2013년은 나이 50이 넘은 배우가 다시 연기의 걸음마를 떼는 것 같았어요. 2014년에는 걸음마도 배우고 말도 좀 배우고. 그렇게 다시 태어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 정도로 새로웠어요?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어요. 전에도 영화 자체를 즐기기는 했지만 내가 평생 함께해야 될 거라는 생각이 뚜렷하진 않았죠. 지금은 영화 자체가 생명줄 같아요. 요즘은 오직 영화 속에서만 살고 있는 거 같아요. 이렇게 인터뷰하는 시간, 촬영 끝나고 집에 가는 시간, 지인들과 소주 마시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행복을 느끼는 것은 현장에서예요. 그 시간이 지나면 나란 존재 자체가 굉장히 희미해지고 외롭고 그래요.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을 때 철저히 즐겨야 된다는 생각을 또 한 번 갖게 되죠.

더 절실해진 걸까요?
절실해지고, 솔직해지고. 더, 더 아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걱정하는 분도 있는데, 만약 지치는 시간이 온다고 해도 그때는 나름대로 숨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흐름에 자연스럽게 나를 맡겨두고, 뭘 어떻게 표현하려고 하기보다 느끼는 대로, 그러니까 아주 순도 높게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나는 단순해서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러질 않아요.

20년 전의 이경영도 지금처럼 단순할 수 있었나요?
나이 탓도 있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 보니 시간에 순응하는 법 자체가 저한테는 중요했던 것 같아요. 어떤 상황이 와도 내가 책임져야 되고 내 탓이라는 생각을 갖는 거죠. 내가 아무리 항변을 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주장을 해도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제 연기를 할 때도 그저 순응하는 법을 조금씩 알게 되고, 더 단순하게 접근하는 거죠. 사실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에요.

누구나 어쩔 수 없는 분노를 각자 안고 사는 시댄데.
견뎌냈다기보다 자연스러운 때가 온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의지로 나를 이겨냈다, 이건 굉장한 오만이고. 지금은 시간이 아깝고 소중해요. 그런데 촬영장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은 굉장히 달라요. 현실에선 한없이 외롭고 혼자인 것 같아요. 그런 결핍들이 쌓여 현장에서 터지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혼자 있는 시간은 필요하지만, 외로움은 적응이 안 되는 거죠?
외롭지 않으면 또 끊임없이 외로움을 찾아가는 게 저희 쪽 사람들인 것 같아요. 자학이에요. 이 일을 하면서 생기는 불치병. 절대 고쳐지지 않죠. 그 안에는 즐거움도 있거든요. 두 세계가 충돌하면서 나오는 뭔가 있을 것 같은. 주변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죠.

혼자 있을 때는요?
잡니다. 잠, 되게 좋아합니다. 자거나 영화 보거나 지인들하고 소주 먹거나. 그거 외에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하하. 내년에는 <군도:민란의 시대>, <협녀:칼의 기억>, <해적:바다로 간 산적>이 개봉하죠? 가능할까 했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단순해서 그런 거죠. 아직 도화지 같아서, 좋게 얘기하면 아직은 다른 물감을 들이기가 좋은 상태인 것 같아요. 그러려고 노력해요. 일차적인 건 사실 표현보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과연 얼마나 다양한 것들을 느낄 수 있느냐가 일차적인 숙제예요.

출연한 영화들을 다시 보면 어때요?
부끄럽죠. 배우는 그런 것 같아요. 두고두고 후회할 것들만 만들어놓는 거 같아요. 근데 후회스러운 일을 가장 적게 만드는 게 완성에 닿아가는 꼴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스스로 만족을 했을 때, 나는 스스로 만족을 하게 되면 이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진 않아요. 어렸을 때는 가짜인 것까지도 진짜인 것처럼 했죠. 나이가 드니까 그런 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 같아요. 그 누군가한텐 부족해 보이더라도, 지금은 이렇게 작은 거라도 진짜이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거죠. 진짜인 것으로 평가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진짜이기 위해서 그를 둘러싼 작은 가짜들은 이제는 조금씩 털어내는 것 같아요. 놓아야 될 것과 지켜야 될 것들이 조금씩은 눈에 보이니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늘 힘들죠.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걸 놓아야 되는지는 아직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도 어릴 때 했던 연기와 확연히 다르지 않나요?
나는 연기 훈련을 단계적으로 한 배우가 아닌데, 많은 작품을 하다 보니까 지금은 나도 모르게 배에서 소리를 내요. 어릴 때는 목으로 한 것 같아요. 원래 이게 처음부터 그렇게 준비를 하고 그랬어야 되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굉장한 행운아죠. 예전에는 겉모습으로만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게 쌓여 여기까지 온 거 보면 저는 되게 영화한테 고맙죠. 저한테 그런 많은 시간에 대한 기회를 줬기 때문에.

인터뷰, 미디어에 대한 배신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랬다기보다 , 되게 멋진 남성들이 나오는 잡지에 내가? 내가 멋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가끔 술이 많이 취해 집에 가서 거울을 보면서 ‘너, 꽤 괜찮네!’ 이렇게 생각한 적은 있죠, 어렸을 때 술김에. 그래서 이런 인터뷰는 좀 생소하고 낯설죠. ‘올해의 남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올해의 남자’로서, 쑥스러움은 쑥스러움대로 두고 독자에게 한마디.
책임을 동반한 저널리즘에 대한 간절한 요구가 있죠. 물론 세상은 다수가, 다수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끌어갑니다. 소수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다수가 지배하는 세상에 그냥 더부살이처럼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본인이 소수라고 생각한다면 늘 깨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진실된 마음 하나로, 깨어 있는 소수가 돼주시길 간절히 바라죠. 제가 2013년에 인상적인 한 해를 보냈다고 생각해주시는 분들께는 대단한 감사와 송구스러움을 같이 드립니다. 그 송구스러움을 더 작게 하기 위해서, 내년에는 더 열심히 더 열심히 해서 ‘아, 저 친구가 열심히 사는구나’ ‘진짜이고 싶어 하는구나’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강아지 키우세요?
키웠었죠.

요즘은 안 키우세요?
강아지가 너무 스트레스 받을 거예요. 외로워서.

“지금은 영화가 생명줄 같아요. 오직 영화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영화가 생명줄 같아요. 오직 영화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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