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없는 것 – 3

뻗대는 걸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시, 그렇게 도무지 불가능을 모르는 것 같은 도시, 그러나 막상 찾으려 들면 좀처럼 없는 도시, 아예 불모지인 것만 같은 도시, 서울. 서울에 사는 60인이 말하는 아직도 서울에 없는 것들



루프탑 바
여행지인 방콕에서, 출장지인 뉴욕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술을 마신다. 보통 떠나기 전날 해질녘쯤이다. 사진 찍고 싶은 욕심은 꾹 누른 채 도시의 정경을 최대한 기억하려 애쓴다. 고층 빌딩의 루프탑 바는 그런 곳이다. 평소보다 좀 더 근사한 기분이 들고, 그래선지 자기가 좀 더 멋지게 느껴지는 장소. 잔뜩 소심해지는 날이면 어느 꼭대기에서 이국의 도시를 보며 술을 마시는 상상을 한다. 가끔 남산 자락 중턱의 한 바에서 아쉽게나마 서울의 일부를 내려다봤는데, 이제는 그곳마저도 사라졌다.
문신애( PD)

검은색 튤립
검은 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핀란드, 네덜란드를 포함한 몇몇 유럽 국가의 공원과 거리엔 까맣고 긴 튤립들이 나무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튤립은 물에 약하기 때문에 한국의 습한 기후에서 예쁜 꽃을 피우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 사실 검은색 튤립을 가까이서 바라볼 자신은 없다. 아무리 꽃말이 “사랑에 불타고 있어요”일지라도 하지만 궁금하다. 조금 두렵기도 하고.
이승연(사진가)

UPLINK
한국에서 DVD는 희한하게 천덕꾸러기인 매체다. 영화 애호가는 많은데, DVD라는 매체에 집중하는 애호가는 드물다. 미디어극장 아이공이 작으나마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너무 ‘아트’에 치중돼 있다. 단순히 웃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든, 아이디어가 전부인 작품이든 다양성이 부족하다. 일본의 갤러리이자 소규모 영화관이자 DVD 숍 업링크 같은 곳이 단 한 군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많은 사람이 향유하지는 않더라도 일부의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소화하는 공간이 생기기를 바란다.
박의교(가구 디자이너)

차이나타운
중국집은 어디에나 있지만 정작 차이나타운은 없다. 차이나타운만 없는 건 아니다. 서울에 특정 문화권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그래서 특별한 분위기를 내는 곳이 있던가?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제외하곤 떠오르지 않는다. 그곳도 사실상 이슬람의 거리라기보단 인도, 이슬람, 아프리카식 가게가 섞인, 그러니까 ‘외국인 거리’에 가깝다. 뉴욕의 차이나타운은 소호와 맞붙어 있다. 소호의 거침없는 확장이 멈춘 건 차이나타운의 고집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호의 예술가들이 다 밀려나고 패션 브랜드의 거대한 매장들이 동네를 차지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 그 확장은 멈출 줄을 모르지만 유독 차이나타운 쪽으론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쪽으로 길 하나만 딱 건너면 물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고, 사람들이 다르다. 뉴욕을 찾은 관광객들은 5번가와 첼시의 갤러리를 찾는 동시에 차이나타운을 방문한다. 제 색을 갖춘 채 도시의 일부로 충분히 역동적인 것이다. 한편 싱가포르에서 요즘 가장 활기찬 거리는 아랍 스트리트다. 비단과 다채로운 패턴의 카펫을 쌓아놓고 판매하는 가게와 정성껏 물건을 골라놓은 빈티지, 스트리트 셀렉트 숍 등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질감이 들거나 경관을 해친다는 인상보단, 섞인 그 모양 그대로 자연스럽다.
이원진(연극배우)

창고형 클럽
베를린의 클럽은 소리를 듣고 찾아가야 한다. 겉으로 봐선 전혀 클럽처럼 보이지 않아서다. 구동독의 탄약고를 개조한 클럽, 교회를 새로 고친 라운지, 거대한 공장의 속을 그대로 살려두고 쓰는 건물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미친 파티가 열린다. 당연히 간판이 없는 경우도 많다. 어제 생긴 새 클럽이라도 그 공간만큼은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베를린 클럽에 모인 사람들의 복장과 태도가 유독 자유로워 보이는 건 그런 장소의 특성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페인트 냄새가 채 마르지 않은 공간에 공작새처럼 모여 파티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서울에 그런 데는 이미 차고 넘친다.
김진호(카피라이터)

윌리엄앤소노마 디시타월
설거지를 마친 후 건조대에 쌓여 있는 그릇들만큼 보기 흉한 것도 또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게 짱짱하고 물 잘 흡수하는 행주 혹은 디시타월. 물론 예쁘기까지 하면 더욱 좋다. 한국에선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괜찮은 디시타월들이 미국에는 가득하다. 특히 윌리엄앤소노마의 100퍼센트 터키산 코튼 소재 스트라이프 행주는 행주라 부르기에 미안할 정도다.
손기호(<보그> 패션 에디터)

포스터숍
공연시장이 꽤 커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공연 관련 상품은 활성화가 안 되고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해외의 여느 공연처럼 디자이너와 협업한 포스터가 나온다거나, 여러 종류의 포스터를 만드는 일은 드물다. 당연히 그런 것들을 수입하거나 만들어 파는 데도 없다. 서울에 멋진 포스터들이 모여 있는 가게가 있다면 어떨까? 90년대 언젠가 예술영화 붐이 일어났을 때 극장 근처에서 포스터 파는 가게를 본 적은 있지만, 본격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포스터 역시 음악이나 영화처럼 충분히 창의적인 작업물이니, 그것을 공연과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곳이 있었으면 한다. 김영혁(<김밥레코드> 대표)

도큐 핸즈
“직접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전시 판매하는 백화점.” 도큐 핸즈에 관한 설명이다. 휴양지인 세부에 갔을 때도 충실한 공구백화점 트루 밸류를 보고 놀랐다. 한국에서는 을지로 3가와 4가 일대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공구는 너무 기능적으로만 다뤄진다. 몇몇 인터넷 공구몰에서 갈증을 달래긴 하는데, 공구는 실물을 보고 만질 때 얻는 감흥이 남다른 도구다.
백승민(아티스트)

해리스
해리스Harry’s는 대학생 인턴으로 함께 일하며 친구가 된 두 뉴욕 청년이 설립한 면도 용품 브랜드다. 호주머니에 꽂은 채 다니고 싶을 만큼 예쁜 디자인만으로도 살 이유가 충분한 제품인데 가격도 합리적이고 품질까지 만족스럽다. 일단 홈페이지를 둘러보고 나면 빈 장바구니로 웹페이지를 닫기가 어려워진다.
정준화(피처 에디터)

앤아더스토리즈
스웨덴 여성 SPA 브랜드. 트렌드 뒤꽁무늬를 쫓는 기존의 SPA 브랜드와 달리 간결미와 담백함을 스타일리시하게 디자인한 게 특징. H&M의 언니 브랜드 격인데 옷도 예쁘지만 속옷이나 뷰티 라인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예쁘다. 외국 출장 가서 여자친구 선물이 걱정이라면 이곳에 들러 쇼핑백 한가득(SPA라 그리 비싸지도 않다) 사주면 된다.
경규리(그래픽 디자이너)

라파 사이클 클럽
요즘 들어 자전거를 타다가 라파를 입은 사람들을 심심찮게 한강에서 본다. 호기심이 가지만, 어떤 아이템인지 혼자 알고 지나칠 뿐이다. 라파 사이클 클럽이 서울에 생긴다면 거기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그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딱히 친구가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라파’라는 아름다운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김승현(바리스타)

베를린 소니센터 시네스타 아이맥스관
베를린 소니센터 안에 있는 멀티플렉스 시네스타의 아이맥스관에서 영화를 본 뒤, 한국의 아이맥스가 실은 아이맥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본 '카이주'는 진짜 카이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성훈(<씨네21> 기자)

알파로메오
알파로메오를 처음 봤을 땐, 뭐 이렇게 생긴 그릴이 다 있나 싶었다. 세모로 모은 입은, 웃는 건지, 화난 건지 헷갈렸다. 근데 잊히지가 않았다. 알파로메오는 보고 또 봐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특히 줄리에타는 색깔마다 모습이 너무 달리 보이기도 했다. 이런 차가 서울에 필요하다. 하지만 강남 8차선에선 골프와 구분하기 힘들 것 같다.
강문오(영상 디자이너)

브레스 케어
마늘을 좋아한다. 여자가 마늘을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지만. 먹은 후 당연히 양치한다. 한데 그런다고 냄새가 가실 리 없다. 위에 냄새가 남기 때문이다. 술 먹은 다음 날도 마찬가지. 브레스케어는 요즘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먹으면 위에서부터 입까지 냄새를 잡아준다. 일본 사람들은 워낙 냄새에 민감해서 그런 걸까? 써본 결과 트림이 나와도 불쾌하지 않다. 여자도 트림이 나온다. 참을 뿐이다.

최혜민(컨설턴트)

롤링 스톤스의 내한 공연
인기 없고 노회한 음악가만 한국에 온다는 정론에 균열이 생겼다. 이제 동시대에 이름 깨나 날리는 음악가도 한국에 온다. 그런데 롤링 스톤스는 오지 않는다. U2는 통일이 되면 공연 하러 오겠지. 하지만 예측 가능한 평화주의자보다 예측 불가능한 무뢰한이 더 좋은 걸 어떡하나.
이원열(번역가)

지역 특산물 판매점
물론 우리나라에도 특산물 판매점이 있다. 해당 지역 한 귀퉁이에 형광등을 희미하게 켜고, 한 달에 반절은 문을 닫아두는 음산한 특산물 판매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거기서 무엇을 사고 싶다는 생각은…. 일본의 D&Department만큼의 풍성함을 기대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런 개념의 숍이 서울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간절하다.
윤지원(번역가)

50퍼센트 이상 세일
우리나라 백화점 세일은 왜 30퍼센트 이상을 넘지 않을까. 선심 쓰듯 ‘빅세일’을 할 때도 50퍼센트가 한계다. 혹시나 해서 가본 70퍼센트 세일 매대에는 늘 몇 년씩 묵은 옷들만 수북하다. 홍콩처럼, 미국처럼, 팔다 남은 해당 시즌의 옷의 가격이 순차적으로 팍팍팍 떨어지면 좋겠다. 세일 폭과 사이즈의 반비례의 긴장 속에서 ‘득템’하는 즐거움을 서울에서도 좀 누려보고 싶다.
김다래(회사원)

토닉워터들
진로 말고, 캐나다 드라이 말고, 슈웹스 말고 더 다양한 토닉워터가 있었으면 좋겠다. 몇몇 종류의 칵테일은 토닉워터가 맛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 선택지가 유독 서울에서만 빈곤하다. 서울의 칵테일 바에서 진토닉을 마실 때마다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용을 쓰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정민구(광고기획자)

지사케
서울엔 늘 술, 술, 술이 모자라다. 특히나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무르익을 대로 익어 좋은 맛을 내는 지사케는 한국 땅으로 잘 넘어오지 않는다. 일본 내에서 자국 소비를 위주로 판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 한국엔 드물어서기도 하다. 주욘다이, 히로키, 덴슈, 지콘은 4대 난관이라고 부를 만큼 일본에서도 구하기가 힘들다. 지사케는 수량이 한정적이라고 무조건 가격이 오르는 건 아니라서, 무조건 몇백, 몇천 넘어가는 비싼 술만 좋은 줄 아는 비뚤어진 문화 때문에 밀려난 탓도 있을 테다.
김혜주(와인 칼럼니스트)

MB&F
MB&F가 한국에 온다 해도, 과연 몇 개나 팔릴까? 우리나라에서 시계가 여전히 과시의 도구로 여겨지는 이유는 MB&F와 같은 독립 시계 회사의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지. MB&F는 예거 르쿨트르와 해리 윈스턴에서 일하며 매출을 열 배씩 올린 시계 천재 막시밀리안 부쉐가 만들었다. MB&F가 대단한 이유는,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디자인을 시계로 구현하고, 전형적인 시계의 모습을 180도 뒤집어놓는다는 점이다. 가격이 파텍 필립을 넘어서긴 해도, 단지 가까이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워질 것 같다.
강병철(사업가)

나이 든 웨이터와 웨이트리스
한 식당에서 오래도록 일한 사람, 한 바에서 계속 실력을 갈고 닦은 사람,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그 장소에 그림처럼 스며드는 사람. 그런 웨이터, 웨이트리스, 바텐더가 없다.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근사한 식당엔 늘 그보다 더 근사한 백발의 웨이터가 있는데 말이다. ‘꽃할배’ 웨이터가 “레이디스!” 외칠 때마다 음식 맛이 더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성화주(‘스위스 관광청’ 대리)

라이트닝 볼트
하와이언 서핑 브랜드로 서핑 문화를 멋지게 만든 브랜드 중 하나다. 1970년대부터 서핑보드를 자체 제작했고 현재 다양한 의류 라인까지 소개하고 있다. 라이트닝 볼트가 제대로 들어오면, 진짜 서핑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주연(<쎄시> 패션 에디터)

예쁜 DND(Do Not Disturb) 카드
호텔에서 혼자 머문다면 DND 카드는 무시하기 일쑤다. 요즘엔 장기 투숙할 경우 환경 파괴를 고려해 침구류를 세탁하지 말아달라는 카드도 만들어놓는다. 잠시 머문 토론토 포 시즌스 호텔에선 단풍잎 모양의 나무로 만들었다. 왠지 그 단풍나무에 해가 될까 세탁하고 싶지 않았다. 뭐든 예쁘면 관심이 간다. 새삼 한국에 그렇게 예쁜 DND 카드가 없는 이유가 놀랍지도 않다. 제대로 예쁜 호텔도 없으니까.
김형준(<모터트렌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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