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OR NOTHING

검정색 없인 누구도 아무도 무엇도 멋지게 입을 수 없다.



1. JW Anderson 이 룩을 봤을 때, 궁극의 검정 바지를 비로소 찾았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의 휑한 발목과 복숭아뼈가 지긋지긋해진데다, 뾰족하고 꽉 끼는 바지를 입고 뒤룩뒤룩 걷는 것도 넌덜머리가 나는 즈음이었다. 종이쯤은 문제 없이 자르고도 남을 칼 같은 재단의 옷은, 웃지 않는 미녀처럼 곧 질린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하이틴 스타 뺨치게 생긴 제이 더블유 앤더슨이 바지를 잘 만드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늘 사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없던 바지를 꿈처럼, 거짓말처럼 눈 앞에 내놓는다. 재능과 미모를 동시에 가진 디자이너를 사랑하지 않는 건 무례한 일이다. 일어나서 어디에라도 외치고 싶어진다. “이 바지를 보라!” 아름다운 걸 보고 잠깐 이성을 잃는 건, 부끄럽지 않다. 강지영

2. Dries Van Noten 서울이든 앤트워프든 사진 속 모델처럼 입을 순 없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룩을 남성복이라 믿지 않을 테니까. 사실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과하거나 소스라칠 옷도 아니다. 검정색이라서 다 괜찮다. 꽃으로 장식한 실크 코트는 봄의 그림자처럼 처연해서 좋다. 이브닝 로브 같아 도톰한 검정색 리넨 팬츠와 입으면 딱이겠다. 하이더 아커맨이 피렌체에서 처음 선보였던 까슬까슬한 바지를 사둘 걸 그랬다. 푸른색 꽃 팬츠는 깨끗한 흰색 벨바쉰 티셔츠나 기브스 앤 혹스의 깊은 숄칼라 카디건과 입으면 좋겠다. 사실 볼수록 눈이 가는 건 슬립온. 밑단을 댕강 자른 낡은 데님 팬츠와 함께 신고 싶다. 톱은 제멋대로 구겨진 데님 셔츠 안에 티셔츠처럼 입는다. 오충환

3. Haider Ackermann 2014년 봄여름 하이더 아커맨이 첫 번째 남성복을 발표했다. 몇 해전 피티 워모에서 잠깐 남성복을 선보인 적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총 열여섯 개의 룩 중 분명하지 않은 건 없었다. 애매모호하거나 구색을 맞추려 껴 넣는 옷 대신, 열여섯 룩 전부 호화롭고 분방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디자이너와 꼭 닮은 보석색 자카드나 고급 실크, 파자마, 배기 팬츠는 나른하고 무기력해 보였지만, 풍류를 아는 남자들임엔 틀림없었다. 그중 파이핑한 검정색 재킷과 용무늬 자수가 새겨진 팬츠는 보수적인 남자도 충분히 응용할 만하다. 땡땡이 보라색 안감이 살짝 보이도록 대강 접거나, 스카프를 바지 안으로 넣어 입는 건, 내공이 필요할 테지만. 김경민

4. Prada 이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놓은 지 벌써 몇 시간째다. 뭐에 홀린 듯 이 룩을 골랐는데, 이유를 설명하자니 좀 막막했다. 전통적인 워크 재킷의 밑단을 과감히 도려내고 심지어 소재는 반짝이는 실크를 썼기 때문에? 검정색 바탕에 새빨간 꽃무늬를 넣은 하와이안 셔츠는 알고 보면 그 자체로 블루종이 되는 반전 때문에? 살짝 내려 입은 검정색 치노 팬츠는 폭이 무지하게 넓은데도, 밑단은 신발 위에 착착 붙는 게 재미있어서? 사실 저 난데없는 망치 가방 하나면 모든 설명은 끝난다. 마치 있는 대로 멋을 부렸지만 의외로 성품은 무척 수더분한 정비공 같은 룩. 니콜라스 윈딩 레픈이 미우치아 프라다와 함께 <드라이브>를 다시 만든다면, 라이언 고슬링은 이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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