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다

실화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가 많아졌다. 과연 한국영화는 언론이 되고 싶은 걸까?

Film판형

한국영화는 언론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실화를 바탕으로 한 ‘팩션’이나, 다큐멘터리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과연 언론의 역할을 하고 싶어 영화를 만드는 걸까? 그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사회의 일원이기에, 지금 문제라고 생각하는 지점을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닐까? 간단히 말하자면 표현의 욕구가 사회로 향하고, 그 소재를 영화로 만들고, 관객이 스크린으로 확인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몇 년 사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가 쏟아졌다. 당연히 영화도 주목했다. 영화가 담은 현실은 때론 잔혹하고, 때론 어느 쪽인지 묻고 있으므로 논란을 일으켰다. 논란은 큰 힘을 지녔다. <스파이더 맨>의 유명한 대사.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지겹지만 한국영화 중 가장 최근에 관객이 1천만 명을 넘어선 <변호인> 얘기부터 꺼내야겠다.

이 영화는 부림사건을 다룬다. 가려진 사건을 통해, 그로 인해 (실제로도) 등장한 정치인을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부림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예, 혹은 아니오. 답변과 상관없이 다시 묻는다. “똑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양우석 감독은 “이런 역사가 반복된다면 감독인 자신과 주연배우인 송강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인식하기 위해 주인공의 성은 주연배우, 이름은 감독에게서 빌려왔다”고 했다.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가 지속적으로 힘을 지니려면, (그것이 어떤 사건이든) 개인이 거대한 세력에 불가항력적일 때 관객들은 이 영화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변호인>은 사건이 지닌 힘을 주연배우의 연기에 의지해 정면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영화는 엄청난 흥행으로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묻혔던 사건, 정치인, 그에 대한 기억, 추억, 그리움, (그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분노가 이 영화가 지닌 표면적인 힘이다. 하지만 아주 보편적인 (그래서 한편으론 폭력적인)기저는 이것이다. 송우석은 왜 변호사가 되어서 돈을 좇았나? 갑자기 왜 국밥집 아줌마의 아들을 도와주려고 했나? 이 두 가지 질문에 같은 답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이다. 송우석이 필사적으로 아파트를 사려고 노력하고, 돈을 좇는 이유는 처자식 때문이다. 돈밖에 모르던 송우석에게 ‘국가가 곧 국민’이라는 신념이 생긴 이유도 홀어머니와 아들로 이뤄진 조촐한 (그래서 더욱 감정이 폭발하는) 가족의 파괴다. 영화가 생생히 묘사하는 건 자식과 부인을 사랑하는 아빠, 유일한 가족이 사라진 홀어머니, 홀어머니를 걱정하는 아들이다. 반대편에 있는 수사관, 검사, 판사에게선 가족을 삭제했다. 덕분에 관객의 감정은 주인공 쪽으로 한 데 모인다. 이 영화의 표면적인 힘은 부정한 국가에 대한 분노지만, 영화가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권력은 가족으로부터 나온다.

의외의 영화에서도 비슷한 갈등 해결 방법 을 만났다. <더 테러 라이브>. 이 영화에선 욕망 으로 가득 찬 앵커 윤영화(하정우)와 그를 압박하는 다른 사소한 욕망이 충돌한다. 이 영화가 훌륭하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대의’가 아닌 욕망으로만 캐릭터가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건 반가운 일. 차이밍량의 말처럼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는 영화보다 사적인 고민을 담은 영화가 더 낫다. 하지만 갈등의 시작과 끝엔 결국 가족이 있다. 갈등의 시작 – 테러범의 분노. 다리를 만들다 죽은 아버지 때문에 테러를 계획. 반대로 윤영화는?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테러범과 싸운다. 하지만 영화 종반에 테러범과 마주한다. 죽은 가장의 어린 아들. 감정선은 급격히 변한다. 그러다 다리 위에서 테러를 취재하던 (이혼한) 아내가 죽자, 지켜온 방송국을 폭파한다. 이 영화를 지배하던 윤영화의 욕망이 무너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에선 테러범과 윤영화의 가족이 마주하며 사라진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위 두 영화를 포함해) 크게 흥행한 영화 몇 편, <7번방의 선물>, <숨바꼭질>, <은밀하게 위대하게>, <관상>, <수상한 그녀>까지, 대놓고 가족이 소재거나 갈등의 핵심인 영화가 정말 많았다. 상업영화니까.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르듯이 큰 힘에 기대면 큰 책임을 면할 수 있다. 가족은 큰 힘이다. 흥행에 예민한 상업영화에서 가족은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소재다. 한데, 지극히 독자적인, 그래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기 쉬운 독립영화에서도 가족은 중요해 보인다. 게다가 전혀 다른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말이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미스터 컴퍼니>, <탐욕의 제국>은 각각 모험, 꿈, 고발이라는 명확한 소재를 지녔지만, 영화에서 제시한 갈등을 (완벽하든 완벽하지 않든) 꿰매는 방법을 가족에서 찾는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속 네 명의 청춘은 유럽에서 1년 동안 무일푼으로 산다. 그 안에서 서로 대체할 수 없는 개성을 보여주지만, 끝내 개인으로 남지 못한다. 우정으로 보이지만, 꿈 찾아 떠난 형을 몰래 따라가는 세 명의 동생을 보여주며 영화(여행)를 마친다. <미스터 컴퍼니>에선 ‘윤리적인 패션’을 꿈꾸는 두 명의 청년을 보여주지만, 그들이 말한 꿈과는 별개로 (현실을 넘지 못한 채) 각자의 새로운 가족을 등장시키고, 그래서 인생은 계속된다는 뉘앙스로 (다소 황망하게) 영화를 끝낸다. <탐욕의 제국>은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피해자의 억울한 감정과는 거리를 둔다. 만약 조금이라도 분노가 필요할 땐 가족을 ‘클로즈업’한다. 가족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마이 플레이스>, 극영화 <만찬>과 <셔틀콕>까지 독립영화에서도 가족을 계속해서 변주한다.

그러니까 <도가니>부터다. 한국영화는 공분할 사건을 어떻게든 스크린에 담아냈다. 그건 장르 영화, 다큐멘터리 등 형식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는 지금 스크린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책임감마저 느꼈을지 모른다. 그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소재의 장르 영화도 계속 개봉됐다. 하지만 이쪽도 저쪽도 가족에 기댄다.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 – 어떤 형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위로하는 – 에서 문제점을 해결하려 한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영화는 갈등 해결 방법을 매우 안정적인 방법, 즉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질문을 바꿔본다. 지금 한국영화는 과연 새로운 시도에 관대한가? 한국영화에서 압도적으로 놀랄 만한 미장센을 본 건 언제였나? 사회의 부조리든, 꽃미남이 쏟아지든, 잉여로운 현실이든, 그것이 어떤 소재이든 영화가 다수의 ‘동의’에만 집착한 건 아닐까? 쉽게 동의를 구하기 위해 한국에선 종교와 같은 가족의 힘을 빌린 건 아닐는지. 영화가 “당신을 설득하겠습니다”하며 가족을 슬쩍 들출 때마다, 눈은 침침해졌다. 누군가는 영화에서 아름다운 화면을 보며 만족한다. 영화가 예술일 수 있는 중요한 근거. 보고 또 보고 싶은 영화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아름다운 연출이 있다. 기민한 쇼트, 화면과 싸우는 사운드, 하나의 미술 작품에 가까운 세트…. 이제는 한국영화에서 아름다운 ‘표현’을 보고 싶다. 투쟁하는 시대에 아이 같은 투정인가. 그러나 내게 영화는 미지의 숲, 정말 ‘영화’ 같은 순간, 불편하고 도도한 노래, 언제나 열려있는 해석의 놀이터였다. 아이는 놀이터가 없으면 TV만 본다. 그러니까 이건 바보의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