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시인, 이준규

그라운드의 시인이 누구였더라, 몇몇 창의적인 축구선수들의 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시인 이준규는 축구는 축구고 시는 시이며,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달 간격으로 <반복>, <네모> 두 권의 시집을 낸 그를 축구장에서 만났다.



어릴 때 축구를 하셨죠? 네, 초등학교 때까지. 아버지한테 설득당해서 그만뒀어요. 네가 정말 잘한다고 치자. 근데 부상당하면 어떡할래?, 라고 묻는데 대답을 못했죠.

지금은 U리그의 팬이라고 들었습니다. K리그나 영국, 스페인의 리그가 아니라요. 축구는 가서 보는 게 재밌어요. 용돈이 별로 없어서 U리그를 보기도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됐는데 대학생들이 상상보다 훨씬 잘해요. 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동호회에서 축구를 해보니까 나이 먹어서 테크닉이나 속도는 안 나오는데 훨씬 여유가 생겼어요. 단점을 줄이는 방법을 안달까? 더 생각하면서 하니까 실력이 늘고요.

누구랑 하는데요? 인터넷 동호회에서 채팅으로 만난 모르는 사람들이랑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랑도 하고. 요즘은 홍대 음악가들이 만든 팀이 하나 있는데 그 친구들이랑 자주 해요.

시인이라고 밝히면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신기해하죠. 시인이랑 축구 처음 해본다 그러는 사람도 있고. 근데 뭐 대개 그런가 보다 해요. 속설이지만 음악가는 축구를, 소설가는 야구를 좋아한다고 하죠. 몰라요, 그런 게 있을 것 같긴 한데.

기질과 잘 맞나요? 네, 맞아요. 근데 전 야구도 아주 좋아해요. 그런데 야구선수 말고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잘 안 맞아요. 제 나이쯤 되면 안 뛰려고 야구를 하거든요. 저는 뛰는 게 좋아서 축구를 해요.

많은 시인이 각자의 취향에서 소재를 가져오곤 해요. 낚시라든지, 등산이라든지. 그런데 이준규의 시에서 축구가 소재가 된 적은 없죠. 저는 그런 방식으로 못 써요. 소재를 시로 연결시키는 걸 해본 적도 없고, 해보기도 싫고. 하지 않으니까 기술도 없어요. 축구에 담긴 철학에 별 관심이 없어요. 축구는 축구고 시는 시죠. 축구는 유일한 취미예요. 어렸을 때 선수를 꿈꿨지만, 지금의 내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데도 좋아한다는 게 좀 슬프지만요. 더 잘하고 싶어서 주중에 혼자 연습도 해요. 그 시간에 어슬렁어슬렁 산책하고 책 읽고 시 써야 하는데 말이에요. 축구는 어슬렁거릴 수 없어요. 거친 체력 훈련이죠. 음악도 상당히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소재로 사용되지는 않았어요. 곡명이랑 밴드 이름이 나온 적은 있어요. 록 음악은 워낙 좋아했고 잠깐 밴드도 했었죠. 20대 때는 영화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해보려다 만 걸 언급하긴 싫어요. 축구에 얽힌 아픔이 있으니까. 어떤 것도 시의 소재일 수 있지만 시는 시의 방식이 있어요.

개인적인 아픔을 드러내는 게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걸요? 아픔을 드러낼 거라면 다른 것도 많죠. 유년시절에 축구를 못한 아픔은 쓸쓸한 거지 치명적이지는 않아요. 그것보다 근원적인 슬픔이 있죠. 축구 관둔 건 가족사에 비하면 별거 아니에요. 한이 맺혀 있지 않아요. 가령, 축구를 못해서 폐인이 됐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시를 쓰잖아요. 축구를 못해서 뼈저린 건 웃기잖아요.

시집 <네모>를 보니 시에서 중요한 건 형식이라고, 형식을 세공하고 밀어붙여서 다다른 지점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듯했어요. <네모>는 형식적인, 최소한의 어떤 정형시죠.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서정시랑은 많이 다르지만 서정시를 안 쓰는 건 아니니까. 제 생각에는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요. 앞으로는 긴 시만 쓸 거예요. 굉장히 무기력하고 슬플 때 쓴 시들이 <네모>에 담겼어요. 그런 상태일 때마다 써놨다가 이번에 묶었죠. 한마디로 선물용이에요. 하나는 기존의 독자들이 머리 아프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시집을 선물하고 싶었고, 또 하나는 선물하기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비교적 짧으니까.

하지만 <네모>와 1개월 먼저 출간되었지만 형식은 다른 <반복>과 이어져 있는 것처럼 읽혀요. 그렇기도 해요. 이어져 있어요. 왜냐하면 <네모>를 시작한 건 2009년이었고, 지금은 14년이잖아요. 세월이 지났잖아요. <네모>에는 14년에 쓴 시도 들어 있어요. 그런데 <반복>은 거의 13년에 다 썼어요. 그리고 사실 <네모>에 있는 최근의 어떤 시들은 <반복>에 들어가야 하는데 시가 너무 짧아서 안 넣었어요. 자세히 읽어보면 형식적으로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저는 시각적인 것도 중요하게 봐요. 형태시에 관심은 없지만 대략의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형식주의자인데, 그걸 대충 해요. 꼼꼼하게 안 하고, 못하죠. 옷만 해도 사실 옷 못 입는 사람을 되게 싫어하는데, 제가 멋을 내진 않아요. 귀찮으니까. 창피하지 않은 선에서 입죠.

한 권의 시집에는 느슨해도 동일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네요? 그 부분에 점점 더 신경을 쓰고 성실하게 임하는 것 같아요.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도 형식이 있죠. 그 시집에 ‘문’이라는 장시가 있잖아요. 사실 ‘문’이 한 권으로 나와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못했어요. 하지만 이젠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려고 해요. 외적인 것도 결국 내적으로 드러나니까, 형식을 딱 정해서 가는 거죠. <네모>와 <반복>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볼 수 있어요.

형식을 얘기했지만, 사실 그간 써온 시들과 전연 다른 시들은 아니에요. 좀 더 정돈이 잘되어 있달까요. 이중성이 있어요. 형식적으로는 정돈이 되어 있는데 오히려 해석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예요. 시집이 가지는 물질적 속성은, 독자가 시집을 들고 읽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거예요. 쉬워서가 아니라 읽어서 기분이 좋은 거요. 허영심이건 뭐건 간에. 형식적인 일관성이 편안함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독자인 제 입장에서도 난잡하기보다는 정리된 시가 좋아요. 어렵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음악을 소재로 쓰진 않지만 시에서 음악적인 효과가 있다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해요. 그건 제가 음악적인 재주가 있어서는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을 반복하는 걸 좋아하니까, 반복하다 보면 리듬이 생겨요. 리듬을 고려하고 쓴 적은 없지만, 리듬감을 느낀다는 게 기분 나쁜 이야기도 아니고 당연한 것 같아요.

<반복>의 해설에는 ‘어떤 아름다운 이미지’의 음소를 분해해서 결합하면 ‘귀뚜라미’와 유사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있어요. 과연 그런가, 좀 과한 해석이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해설이 한국문학의 어떤 관문 역할을 하는 건 좋지 않아요. 유럽을 보자면 너무나 획기적인 작품이 나왔을 때, 독자나 문단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해설을 달았어요. 그게 아니면 일반적으로 안 하고요. 제 시가 은근히 새로운 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혁명적인 건 아니잖아요. 평론가가 평론집을 낼 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면 모를까, 작품에 붙는 건 아니에요. 잘못된 관행이에요. 없어져야 해요.

무엇보다, 시집의 해설을 좇아가는 독서가 많아요. 해설이 아니라 감상이죠. 그렇게 읽은 거지, 틀린 것도 맞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하나의 예예요. 근데 우리나라 독자들은 해설에 너무 의존해요. 멋대로 읽는 게 맞아요. 김소월이나 윤동주와 너무 다른, 서양문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시에 관한 길잡이로서, 고급문화의 활성화를 위해서 해설을 달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제는 끝내야 할 때예요.

시집에 붙는 게 아니라, 각자의 지면에 쓰는 거라면 괜찮을까요? 시를 잘 읽었네, 못 읽었네가 아니라 제가 가진 평론에 대한 불만은 세태에 대한 불만이에요. 근본적으로 한국 문단 시스템에서는 억지로 평론을 써야 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문제가 많아요.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중요해요. 만약에 콧대가 높아서 요즘 한국문학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면 안 쓰는 게 맞아요. 그런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에 대해 써야겠죠.

좋은 평론에 관한 논의에서 들어본 적 없는 관습적인 문제가 있었네요. 일부 평론가들의 망상 중 하나가 자기들이 문단을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미래파니 뭐니 문학의 유행을 억지로 만들어내면서 말이죠. 문학을 활성화하고 싶은 건지, 밥벌이를 하려는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기차를 멈추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좋게 본다면 좋을 수도 있고요. 좋은데, 억지가 너무 많잖아요. 비평가가 없어도 어렵겠죠. 없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형식이 단단해지는 과정에 대해 어떻게 물을까 하다가 문득 머리가 짧아진 게 눈에 띄었어요. 옷이든 머리든 제가 신경 썼던 건 스물서너 살이 끝이었어요.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막 입어요. 아내 없이 혼자 살았다면 동네 시장에서 보이는 아저씨들처럼 입었을 걸요? 뭐든 꾸준히 해야 하는데, 멋도 그래요. 갑자기 안 되는 거잖아요. 저는 1년에 한 번 머리를 잘라요. 이렇게 짧게 자른 건 10년 만인데, 가을 지나고 겨울 되면 또 머리가 덥수룩할 거예요. 그런데 축구할 때 시야를 안 가려서 짧은 게 좋기는 하더라고요.



축구선수는 꽁지머리 아닌가요. 만일 축구선수였다면 파마를 하거나 삭발을 했을 거예요.

머리가 짧아진 것보다 머리가 길었다 짧았다 ‘반복’되는 게 오히려 이준규의 시와 잘 어울리네요. 귀찮아서 그렇지 항상 이렇게 자르고 싶어요. 제일 잘생겨 보이는 머리는 지금보다 살짝 긴 정도예요.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자를 거예요. 편하고, 이상하게 머리가 짧을 때 머리가 더 잘 돌아가요.

<네모>와 달리 <반복>의 시들은 상당히 길어요. 장시를 쓸 때는 미리 기획을 하나요? 대충의 길이만 생각해요. A4 한 장을 채우겠다고 시작했다가 반도 안돼서 쓰기 싫어졌는데 밀고 나갈 때, 더 써야 하는데 멈출 때도 있어요. 가장 좋은 건 애초의 생각이 딱 들어맞는 건데 그런 경우는 많지 않고요. <반복>에 있는 시들은 앞으로 나올 시들을 연습한 거예요. 제가 절차탁마해서 주옥같은 시들만 시집에 넣는 건 포기한 사람이거든요. 전집을 지향하는 거죠. 제가 낸 시집을 긴 흐름으로 볼 수 있기를 바라요. <반복>은 제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시집이에요. 몸을 풀었어요. 다음 시집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시가 더 나올 거예요. 본격적으로 소설 같은 시를 써보려고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얘기한 적도 있지만, “기계적으로 쓴다”는 건 장시를 쓰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자세 같네요. 축구가 시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축구선수의 삶은 알아요. 경기 전에 몸을 풀죠. 아주 기초적인 헬스나 골 트래핑 연습을 하고요. 저 역시 그런 자세가 몸에 배어 있어요. 매일 쓰려고 해요. 계속 쓰고 억지로라도 써서 좋은 걸 건지려고요. 엄청 써요. 술 먹고 영감 받아서 음풍농월하는 시인들과는 정반대의 자세를 취해요. 형, 시 많 이 써요?, 라고 물어보면 항상 쓰지, 시는 마음속에 있지, 이런 말 아주 싫어해요.

의무적으로, 일하듯이 시를 써서 그런가 싶기도 한데요. 첫 시집이 의미를 가능한 한 혼돈스럽게 만드는 쪽이었다면, <네모>는 의미를 통과하고 넘어서거나 혹은 ‘고구마’처럼 거기까지 가기 전에 멈춰요. 맞는 말이고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독자가 이렇게 느낄 거라는 계산은 없었어요. 유일하게 짐작할 수 있는 거라면 슬픈 감정이었죠. 그건 공통적으로 느끼지 않을까? 내가 슬퍼하는 대로 말고, 각자 슬퍼하기를 바랐어요. 이렇게 메마른 느낌으로 슬퍼하는 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요.

지금에 적절한 서정시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고맙죠. 제가 의도한 거였으니까. 이준규가 원하는 서정시를 쓴 거예요. <반복>의 시를 읽는 재미가 있겠지만, <네모>의 시가 필요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짧은 시는 좀 읽다가 딴 생각이 들면 덮어둘 수 있고,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괜찮고, 책이 되게 피곤하게 느껴질 때, 술을 많이 마셨거나 슬플 때 찾을 수도 있어요. 저도 그럴 때 찾는 시집이 있거든요.

<네모>는 일기처럼 보이지만, 일기로서의 시와는 가장 멀리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일기 같지만 일기 같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게 하루에 있었던 일을 쓴 시는 없어요. 계절을 섞었고, 어렸을 때 경험과 최근의 경험이 하나의 시에 들어갔어요. 어투만 일기인 거죠.

슬픔이라는 단어로 자주 설명해왔어요. <반복>에서는 ‘우울’이라고 <네모>에서는 ‘슬픔’이라고, 해설을 쓴 두 명의 비평가가 비슷하지만 다른 단어를 썼어요. 정확하게 봤다고 생각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우울해요. <반복>은 제가 가고 있는 길이니까 우울이 드러나는 건 당연해요. <네모>는 안 그래도 우울한 사람이 더욱더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썼죠. 그게 슬픔일 거예요. 우울이 공기 같은 거라면, 슬픔은 사건에 의해 일어나는 어떤 것 아닐까요?

시에서 주체를 혼란스럽게 해놓는 것도 이준규 시의 특징이에요. 갑자기 ‘그것’이라는 주체가 등장하죠. 그래서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보이는 시도 결코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여기에 대해 ‘현대사회의 분열된 자아’ 같은 말로 설명하는 건 정말 싫어하실 것 같아요. 없지 않아 있겠지만 제 의도는 다른 몇 가지가 있어요. 화자나 주체가 뚜렷하고 일관성이 있으면 이야기가 생겨요. 사람들이 그걸 따라가죠. 하지만 쓰고 있는 제게 그런 내용이 없어요. 주체가 바뀌는 게 자연스럽죠. 여기서 가장 간단한 방법이 ‘나’나 ‘너’가 아니라 ‘그것’이라고 쓰는 거예요. 내가 아니기도 하고 나이기도 하고. 읽는 사람이 편할 것 같았어요. 편하다는 건 쉽다는 게 아니라 멋대로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시는 멋대로 읽는 게 좋으니까요. 시에서 유일한 인물은 나인데, 시는 아주 주관적인 건데, 나라고 쓰면 쓰는 나도 피곤하고 자꾸 쓸데없는 감정이 담겨요. 저는 난해하게 써야만 표현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나 우스운 거죠. 제대로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면 옛날 어른들처럼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게 차라리 나아요.

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몇 개의 소재가 있어요. 그중에서 가장 집요한 건 ‘언덕’이죠. 언덕을 아주 좋아해요. 산보다 언덕을 더 좋아하는 게 언덕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는 데서 살아보질 않았어요. 줄곧 서울에서 살았거든요. 이를테면 그냥 지나다가도 해가 저무는 곳에 언덕이 있으면 그 뒤가 굉장히 아름답잖아요. 넘어가면 똑같이 빌라고 연립주택이겠지만 여기에서는 볼 수 없죠. 언덕 너머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을 좋아해요.

관습적인 의미의, 고지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언덕’이 아니네요. 전혀 상관없죠. 언덕을 좋아하는 건 그 단어가 가지는 성적인 이미지인데, 그건 아무도 얘기를 안 해요. 잘 들여다보면 성적인 이미지가 뚜렷해요. 여자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 거죠.

이번에 나온 두 권의 시집 제목이 이준규의 시를 잘 설명해줘요. 그중에서도 ‘네모’. 제가 어릴 때 축구를 관두고 나선 회화가 꿈이었어요. 그림이 네모잖아요? 그게 강력하게 나타난 거죠. 이걸 그림으로 봐주길 바라는 거예요. 축구장도 네모나고요.

원은 의미를 생각하지만 네모는 형태에 가깝고, 단순한데 위압감이 느껴지고, 차가우면서도 어떤 감정이 담기고. 모두 이준규의 시를 수식할 수 있어요. 그렇죠, 어떤 제한된 형식을 이야기하는 거고, 제한된 형식을 좋아하는 거죠. 확대해석하면 이상한 거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유도 규칙이 있어서예요. 싸움을 잘하는 편이지만 규칙이 있는 복싱이 좋거든요.

어제 ‘문학은 사치다’라는 트윗을 올렸어요. 가령 뭐 살인을 아주 잘 묘사한 연쇄살인범에 대한 소설이 있다고 쳐봐요. 근데 연쇄살인범이 그걸 읽지는 않아요. 그런 이야기예요. 책을 읽을 시간이 있고, 책을 든다는 건 시간이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건 학생이건 말이죠. 예술은 다 사치예요. 사치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사치요. 사람한테는 사치가 필요하잖아요. 자동차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문학이나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계속 있을 것 같지만 문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예전처럼 작가의 수가 적고 사회가 단순했을 때는 문학작품의 파급력이 컸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닌 것 같아요. 문학이 너희만의 리그냐고 하는데, 그런 거예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끝까지 가는 거예요. 머리 나쁘고 정의감이 투철한 문인들이 섣불리 나서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춘다고 하는데 다 헛짓 같아요. 그러고 싶다면 사회운동에 참여하거나, 자기 앞마당이나 잘 쓸었으면 좋겠어요. 쓰레기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기계적으로, 억지로 쓴다는 건 최대한의 사치네요? 그렇죠. 더 깊이 들어가면 쾌락을 누리려고 애쓰는건데, 한 인간이 어떤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시 쓰는 건 갈수록 힘든 일인가요, 즐거운 일인가요? 제가 쓰는 게 시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시의 규칙이 사라진 시대잖아요. 뭐 하나 아냐면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 시인이 쓰는 게 시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오해해서 시인을 무슨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라고 여기지만, 그냥 시 쓰는 기계예요. 시 쓰기 전문가예요. 하지만 이게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시 쓰는 사람이 인격도 갖추고 사회지도자도 될 수 있다면 좋을 거예요. 근데 지금 단계에서 시인이 해야 할 역할은 아닌 것 같아요. 기계적으로 써야한다는 게 지금의 제 입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