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스트라이커의 조건

요즘 스트라이커에게 필요한 건 골 결정력만이 아니다.

Sports판형

스트라이커는 득점 능력이 뛰어난 공격수를 말한다. 하지만 요즘 공격수에겐 득점뿐만 아니라 더 많은 역할이 요구된다. 과거엔 비교적 단순했다. 골을 넣으면 됐다. 1970년대 헤딩골의 명수였던 김재한, 키는 작지만 스피드와 힘을 바탕으로 득점을 올리던 이회택, 페널티 지역에서 골을 넣는 데 집중하기보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즐기던 최순호, 엄청난 스피드로 상대를 허물던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차범근은 각기 다른 유형의 선수들이지만, 어쨌든 과거 공격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골을 많이 넣었다.

최근에는 전술의 흐름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공격과 수비가 이원화된 예전 축구의 전술 형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측면 수비수들은 본연의 임무인 수비뿐만 아니라 윙어처럼 공격적인 역할도 맡는다. 최종 수비수들도 세트피스 시에는 골을 넣기 위해 상대 수비수들과 몸싸움을 펼친다. 공격수들 역시 전방에서 강한 압박을 가하며 수비 역할을 해낸다.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공격과 수비를 병행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수들의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프리미어리그 웨스트햄에서 뛰는 건장한 공격수 앤디 캐롤이나 아스톤 빌라의 크리스티안 벤테케 같은 선수들은 힘, 높이, 득점력을 겸비한 전형적인 센터포워드다. 하지만 이들은 시대를 잘못 만났다. 앤디 캐롤이 1930년대 아스널의 전설적인 감독 하버트 채프먼의 지휘 아래 축구를 했다면 가장 이상적인 공격수로 성장했을 것이다. 수비와 공격의 분업화가 잘 이뤄졌던 채프먼의 이른바 ‘WM 포메이션’에서는 공격수가 수비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전방 수비수와 일대일 싸움을 통해 골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공격수가 수비 가담과 미드필더와의 연계 플레이까지 매끄럽게 해내야 하는 현대 축구에서 이런 유형의 선수들은 최고의 공격수가 되기 어렵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토털 사커의 영향을 받은 아리고 사키 감독의 전술은 많은 대표팀과 클럽에 영향을 끼쳤다. 4-4-2 전형을 기초로 한 사키의 전술이 보편화되면서 최전방 공격수들에겐 더 많은 할 일이 생겼다. 공격수가 수비수와 동일선상에 설 수 있도록 오프사이드 룰이 개정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전에 비해 공수 간격이 급격히 좁아지면서, 선수들은 좀 더 촘촘히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했던 한국 대표팀은 이런 세계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첫 경기였던 벨기에전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상대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1990년대 중반엔 수비 뒷공간을 공략하는 것이 주요 공격 전술로 떠올랐다. 공격수들은 더 빠른 순발력을 요구받았다. 물론 공격이 발달하는 만큼 수비도 진화했다. 감독들은 공격수들에게 뒷공간을 내주지 않기 위해 수비 라인을 끌어올려 오프사이드 트랩을 만드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자연스레 선수 간의 간격 유지와 지역 압박을 병행하는 일자수비가 대세로 떠오르며 쓰리백 중심의 리베로 시스템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과거의 축구 형태가 남아 있던 잉글랜드에서는 여전히 앨런 시어러와 같은 전통적 스트라이커들이 맹위를 떨쳤지만,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는 이미 쥐세페 시뇨리나 필리포 인자기같이 침투에 능하고 오프사이드를 격파하는 골잡이들이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요즘으로 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하비에르 에르난데스나 리버풀의 수아레즈 같은 유형의 공격수들이다.

4-4-2도 영원하진 않았다. 한동안 강세를 보인 4-4-2의 두 줄 수비를 뚫기 위해 여러 유형의 공격 전술이 다시금 개발됐다. 특히 순발력과 패스 능력을 겸비한 공격수 두 명을 같이 출전시키는 전술이 인기를 끌었다. 상대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의 공간을 교묘히 교란시키기 위해서다. 결국 2000년대엔 약점이 노출된 4-4-2를 보완하기 위한 실험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 중 하나가 최종 수비 라인 위에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를 배치하는 전형이었다. 최근까지도 많은 팀이 사용하는 4-3-3과 4-2-3-1 포메이션이다. 미드필더의 형태와 공격형 미드필더의 움직임에 따라 공격수의 역할이 달라지긴 하지만, 4-3-3과 4-2-3-1엔 스트라이커가 한 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각광받던, 흔히 ‘9번 공격수’라 불리는 스트라이커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 선수는 첼시에서 활약하던 디디에 드록바였다. 드록바는 수비수를 등지는 움직임과 제공권 장악이 뛰어나 수비 진영에서 넘어온 공을 동료들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측면과 중앙을 왕성하게 오가며 수비를 흔드는 능력도 출중했고, 세트피스를 허용했을 때는 수비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 전통적인 공격수의 성향을 탈피해 새로운 전술에 잘 적응했다고 말할 만하다. 요즘 공격수들 중에선 도르트문트의 레반도프스키가 이런 ‘9번 공격수’의 역할을 잘 소화한다.

이후 바르셀로나가 ‘티키타카’로 전 세계를 호령한 2000년대 말과 2010년대 초에는 펄스나인이라 불리는 ‘가짜 9번’ 공격수가 유행했다. 바르셀로나 축구는 점유율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공격을 전개해 나갔고, 상대 수비는 공간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수비 라인을 극단적으로 내리며 대응했다. 이런 빡빡한 수비를 뚫기 위해 좁은 공간을 파고들며 개인 기량으로 득점을 올리는 공격수들의 가치가 높아졌다. 동시에 역습이 공격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기술이 뛰어나고 발이 빠른 윙 포워드들을 선호하는 경향도 생겼다.

반면 ‘대세’에 따라 공격진을 운용하기보다 정공법을 고수한 기존의 강호들도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한 명의 공격수를 기용했지만, 활동량이 많고 패스 능력이 뛰어난 공격수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최전방 원톱과 세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수적으로 우세한 수비와 싸우기 위해선 공격진의 임기응변과 변칙적인 움직임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윙어와 측면 수비수들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왼발잡이 윙어를 오른쪽에, 오른발잡이를 왼쪽에 배치해 중앙으로 파고드는 공격을 자주 시도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 과정에서 최전방 원톱의 역할은 자연스레 골을 넣는 전문 스트라이커가 아닌, 측면보다 중앙 전방에서 활동하는 비율이 높은 공격진 중 한 명에 가까워졌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프랑크 리베리 같은 ‘다기능 멀티 윙포워드’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앨런 시어러와 비슷한 정통 스트라이커들의 이름이 리그 득점 순위에서 사라졌다. 오히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나 반 페르시처럼 페널티박스 밖으로 나오는 것을 즐기면서 어시스트 능력이 뛰어난 공격수들이 호날두, 루니 같은 유형의 선수들과 동반상승 효과를 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티키타카의 시대 또한 서서히 저물고 있다. 지난 시즌 바이에른 뮌헨과 올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축구는 또다시 세계 축구계의 전술 흐름에 변화를 불러왔다. 바이에른 뮌헨은 공 소유권을 잃었을 때 전체 조직이 순간적으로 압박을 거세게 시도하는 ‘게겐 프레싱’을 들고 나와 유럽 챔피언에 등극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은 아리고 사키의 4-4-2 전형을 현대 축구에 잘 접목시켜 올 시즌 대성공을 거뒀다. 바이에른 뮌헨의 공격수 만주키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공격수 디에고 코스타에게 첫 번째로 요구된 역할은 모두 수비였다. 두 선수는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전방부터 수비 임무를 수행했다. 본연의 임무라 할 수 있는 공격은 팀이 공을 가로챈 뒤부터 시작했다. 이렇게 현대 축구에서 스트라이커는 할 일이 무척 많다. 왕성한 활동량, 든든한 체격과 힘, 정교한 마무리 능력에 수비까지 해내야 한다. 결국 공격수로서가 아닌 축구선수로서 다재다능한, 못하는 게 없는 괴물에 가까운 공격수가 전방에 배치될 것이다. 즉, 가장 가까이는 맨체스터 시티의 야야 투레 같은 유형의 미드필더들을 공격수로 포진시키는 전술이 유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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