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와 나 – 1 (디제이 소울스케이프)

김추자가 새 앨범으로 33년만에 돌아왔다. “늦기 전에” 팬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첫 곡 ‘몰라주고 말았어’를 들어보니, 오히려 몰라주고 늦은 건 우리들의 헌사였다. 한국대중음악에 관한 가장 진지하고 해박한 조언을 들려주는 네 사람, 디제이 소울스케이프, 이봉수, 하세가와 요헤이, 최규성을 찾았다.

‘오리지널’ 김추자

다섯 살 무렵이었다. 우리 가족은 몇 년간의 홍콩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부모님은 누이와 나를 먼저 서울에 보내고 동남 아시아로 몇 주간의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외가에는 항상 음악을 끼고 살던 삼촌이 있었다. 삼촌을 통해 한국 음악을 처음 접했다. 시작은 산울림이었다. 산울림의 동요 앨범을 들으며 아침을 맞이했고, 점심때 놀이터에서 놀다가 갑자기 그 음악이 생각나서 뛰어 들어가 레코드를 틀어달라고 졸랐다. 삼촌이 퇴근하면 삼촌, 이모까지 모아놓고 다 같이 들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당시 유행하던 혜은이, 엄청난 기운을 풍겼던 들국화의 데뷔 앨범도 자주 들었지만, 내 취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건 ‘어른들의 음악’이라는, 막연한 거리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음반들이 나오던 동시대를 산 건 행운이었다.

이모할아버지는 좀 더 굉장한 레코드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다. 어머니를 졸라서 가끔씩 갔는데, 벽장 하나를 가득 메운 음반 대부분은 클래식이었지만, 마이클 잭슨의 이 있었다. 당시 우리 집에 있던 모타운 레코드는 슈프림스나 다이애나 로스였고, 나는 그게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모할아버지 댁에 있는 템테이션스나 스모키 로빈슨의 앨범이 더 ‘쿨’해 보였다. 그 귀하다는 원판을 만지면 뭔가 영혼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테이프로 복사해서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이모부의 레코드 컬렉션 중에도 외가에서 접해보지 못한 음반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신중현이나 김추자처럼,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접해본 적 없는 가수들의 앨범도 있었다. 처음 들었던 김추자의 곡은 ‘무인도’였다. TBC <쇼쇼쇼>의 황금기와 톰 존스, 폴 앵카 등의 전성기를 살아오고 사랑한 어른들로서는 어쩌면 가장 선호하는 김추자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독특한 톤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매력적이었지만 이 역시 너무 어른들의 음악이어서 내 취향의 범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은 비교 대상이 없는 충격이었다. 겨우 열 살 무렵의 소년이 지미 헨드릭스나 머디 워터스를 알 리가 없었다. ‘미인’도 ‘미인’이었는데, 앨범의 다른 수록곡인 ‘할 말도 없지만’의 도입부 리프를 듣고는 또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도 클럽에서 정말 많이 트는 곡 중의 하나가 ‘할 말도 없지만’이다.

그 무렵에도 신중현, 김추자의 앨범은 아주 귀했다. 신중현의 활동 금지가 풀리고, 음반이 해금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명성만 회자되는, 지난 시대의 잃어버린 유물 대접을 받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음반 자체가 없어서라기 보다 시중에 유통이 되지 않았다. 1980년대, 가요계의 변화와 더불어 이 음악들은 동시대와 빠르게 멀어져갔다. 김추자는 은퇴했고, 김정미 등의 다른 신중현 사단의 디바들도 사라졌다. 연결고리를 잃은 채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에 대한 퍼즐은 완성되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많은 사람에게, 하나의 박제된 황금기일 뿐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디제이로서 레코드를 본격적으로 사 모으기 시작하던 90년대 말 무렵, 레코드를 사러 가장 많이 간 곳은 황학동의 승인 만물상이나 돌 레코드 혹은 그 근처에서 비정기적으로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던 가게들이었다. 물론 나는 가요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끔 음악다방이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 들어오는 1970년대 소울, 재즈 레코드를 구하는 게 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헤비 슬로 훵크’ 리듬 섹션에 이끌렸다. 저 음반이 뭐냐고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더니 김추자라고 했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김추자는 <쇼쇼쇼>와 <가요무대>의 방송국 오케스트라 반주에 실린 노래, 혹은 산레모 가요제에 나올 법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달랐다.

가격 물어보기가 겁나서 계속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는 순진한 사람들이나 레코드 가격을 물었다. 한국 레코드의 가격 거품과 허세가 절정에 다다라, 부르는 게 값인 시절이었다. 김정미 레코드가 1백만원이 넘는다더라, 히식스의 고고 사운드 앨범을 일본 마니아가 수백만원에 사갔다더라, 하는 얘기가 떠돌았다. 가난한 젊은이가 가요 앨범을 사는 건 꿈도 꾸기 어려웠다. 괜히 가격을 물었다가 그림의 떡이 될까 봐 겁났다. 그런데 “그거 1만5천원에 줄게”라고 주인아저씨가 얘기하는 순간, 레코드가 튀면서 같은 구간이 반복됐다. 가격은 1만2천원이 됐다. 그렇게 처음 구입한 김추자의 앨범이 <김추자와 검은나비>다. 김추자 관련 음반들 중에서는 이 레코드가 그래도 싼 편이었는데, 경력 후기의 앨범이기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검은나비, 호랑나비의 음반들은 정말 흔해서 그녀의 이름값이 희석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 소울 음반 중에서 최고의 리듬 섹션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음반이다. 수많은 버전 중에서도 이 앨범에 실린 ‘아니야’는, 클럽에서 서구권의 훵크 음악과 함께 틀어도 리듬의 합과 긴장감 면에서 밀리지 않는다.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편곡의 해석력이나 한국 음악에서 찾기 어려웠던 브라스 섹션의 힘과 통일감 역시 전무후무하다. 무엇보다 김추자의 노래가, 리듬 섹션을 모두 덮어버리고도 남는다. 김추자의 노래는 과연 소울 편곡의 노래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이 음반을 시작으로 한국 가요사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디제이로서 한국 음악을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김추자-신중현 작품집>은 보컬리스트로서의 관록을 자랑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한 작품이다. 또한 신중현 사운드의 완성이기도 했다. 외국 디제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제임스 브라운 사단의 여제 마바 휘트니의 초기 트랙을 듣는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이 앨범은 ‘하필 그 사람’ 한 곡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훵키한 리듬 파트 위에 수놓은 오케스트레이션과 브라스 섹션, 곡의 완급을 조절하고 설득력을 이끌어내는 김추자의 노래는 세계적인 음반 수집가들이 꼽는 ‘레어 그루브’의 모든 미덕을 갖추고 있다.

1969년에 발표된 <늦기 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해외의 음반 수집가들에게 가장 먼저 소개되었고, 지금도 인기 있는 앨범이다. 90년대 후반 황학동에서, 이 앨범에 대한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김정미, 펄시스터즈의 앨범들과 더불어 일본 음반 수집가들의 표적이었고, 이것이 가격이 10배 가까이 뛰어오른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 앨범에서 김추자는 이후와는 사뭇 다른, ‘하이 톤’의 앳된 목소리로 부른다. 당시 신중현 사단의 경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나뭇잎이 떨어져’ 같은 곡은 이후에 녹음된 버전과 비교해보면 더 직선적이고 담백하다. 설익었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레코딩과 편곡법에 최적화된 창법이었다. 김추자의 보컬리스트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이해하기 좋은 앨범으로 꼽고 싶다.

‘오리지널’ 김추자가 돌아왔다. 그녀의 귀환에 며칠간 흥분했다. 그저 얼굴만 내비치고 말았어도, 전통가요 한 자락을 부른 것이었어도 이랬을까. 김추자의 음악을 듣고 보니 ‘그 김추자’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김추자는 야심찬 소울 가수였다. 사이키델릭과 소울을 넘나드는 다양한 혼성모방이 이루어지던 1969~75년 한국 대중음악 황금기의 전통을 간직한 음악을 들고 나타났다. 송홍섭-한상원-정원영으로 이어지는 한국 ‘그룹사운드’ 계보 최후의 계승자들이 신중현의 미발표곡으로 만들어낸 조합은, ‘한때 우리 것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을 현재로 가져온 거의 유일한 결과물이나 마찬가지다. 김추자의 컴백 앨범인 동시에 한국의 록과 소울이 컴백한 순간이었다.

이 귀환이 온전한 ‘현재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녀의 음악적 업적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재평가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과거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많은 재발매, 데이터베이스 작업과 더불어 그에 대한 현재화된 담론도 활발해지는 것. 지역 음악이 세계화로 이어진, 이른바 ‘글로컬Glocal’ 신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태국의 룩퉁, 몰람 음악의 재발견 과정을 참고하면 어떨까 싶다. 이 음악들은 빌보드 차트에도 오르지 않았고, 유튜브 스타가 만든 것도 아니지만, 현대적인 관점으로 편집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의 문화‘산업’ 관념으로는 아직 요원한 일일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김추자가 생겼다. 박민준(디제이 소울스케이프, 프로듀서)

* 김추자와 나 – 2 (이봉수, 비트볼 레코드 대표)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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