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치는 소년

한국 현대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줄이 있다면 박동욱이다. 혈혈단신 미국에서 배워온 클래식 타악기 분야의 개척자로, 국악과 클래식 사이의 연결자로, 자연을 타악기로 해석하는 작곡자로, 숱한 제자를 키워낸 교육자로 80년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 사이 그저 생각없이 두들기는 사람으로 비하되던 타악기 연주자의 위상도 높아졌다. 존중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업적을 책으로 남기기보단 소년처럼 내달리는 듯했다.

여든 해를 살아오면서 60년이 넘게 연주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하셨는데, 음반이든 책이든 자료가 너무 없어서 놀랐습니다. 기록보다는 그때그때 무대에서 공연하는 게 더 중요했나요? 그냥 앞만 보고 달렸어요. 원래가 그래요, 성격이. 내 연주도 다시 안 들어요. 뒷사람이 보고 평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한테는 지나간 뒷모습일 뿐이에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 잘 모시고 동생들 잘 챙기라고 그랬거든. 책임감의 영향이 컸어요. 어떻게든 남들 걸어갈 때 뛰어가고, 앞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음악도 마찬가지였죠.
타악기를 선택한 건 기질이 반영된 거네요? 그렇죠. 어려서부터 활동적이었고 스포츠도 좋아했어요. 복싱도 했거든요.

 

작곡을 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1964년에 예그린 악단 소속으로 미국에 연주회를 갔다가 저는 미국에서 타악기를 제대로 배워보려고 남았죠. 최초에는 타악기를 배우려는 것이었지만, 67년 무렵에 아메리카 윈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솔리스트로 발탁돼서 투어를 돌 때 한 가지 사건이 있었어요. 펜스테이트 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용, 연극, 음악을 망라한 아트 프로그램이었는데, 제가 발레리나 반주를 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 인연으로 그분이 나를 반주자로 추천해서 맨해튼의 부호들이 오는 연주회에 간 적이 있어요. 동양 사람은커녕 전부 백인만 모인 곳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이번 기회에 한국의 음악을 한번 들려주면 어떻겠냐는 거예요. 막 가슴이 벅차올라서 일주일만 시간을 달랬죠. 근데 국악 음반이 있나, 책이 있나, 내가 작곡 전공을 했나, 아무것도 없었죠. 그때 머릿속에 있는 우리나라 곡이 뭐였겠어요.

 

아리랑이요? 하하. 그래서 아리랑을 주제로, 플루트 세 대가 카운터 멜로디를 멋있게 연주하고, 그 뒤에 타악 주자 두 명, 나랑 제자 한 명 해서 5중주로 했죠. 좋다고 앙코르가 나와서 두 번을 더 했어요. 부자 몇 백 명이 모이다 보니까, 음반 출판하자고 별별 사람이 다 있었는데 누군가가 판권 뺏기지 않게 조심하라는 얘길 해줘서 계약 안 하고, 곧장 다니던 메네스 대학에 갔죠. 화성학 수업 때 만날 빨간 연필로 좍좍 긋던 교수가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 작품을 내 리사이틀 때 부악장, 작곡 선생한테 보여주면서 넣으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도 ‘Why Not?’ 이러는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우리 리듬으로 작곡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국악에 관심을 가진 계기도 그럼 그 우연찮은 데뷔의 영향이었겠네요? 그것도 있지만, 또 하나가 존 케이지 헌정 공연을 본 거예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제자들이 열어준 공연이었거든요. 그걸 보고 실망이 컸어요. 60년대 말에 앞서간다는 음악이라고 그들이 한다는 게 죄 일본 거더라고. 1973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것 자체가 우리 소리의 DNA를 찾고 싶었던 거예요. 한국에 올 때 사람들이 다 말렸어요. 유신 시절이었으니까요. 메네스 대학에 장학금 받고 들어가서 거기 있지도 않던 타악기 앙상블을 만들어서 하고 싶은 것 원 없이 했어요. 졸업하고 연주자로 활동하다 보니까 여기에서는 더 배울 게 없겠다 싶더라고요. 한국에서 계속 요청도 왔고요.

 

사물놀이를 처음으로 해외에 올린 당사자라고 들었어요. 한국에서 아리랑을 변주한 곡을 선보이니까 어부지리 격으로 심사도 거치지 않고 문화관광부에서 세계 무대를 돌게 시켰어요. 79년 2월 2일에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했는데, 기립박수를 치고 난리가 난 데다, <뉴욕타임스>에서 아주 희귀한 음악이라는 평도 써줬죠. 그러던 83년에 댈러스 컨벤션에서 날 초청하면서 너희 그룹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근데 내가 민속악기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룹이 어딨어, 부랴부랴 사물놀이패를 데려갔죠. 사실 술 한잔 먹고 비즈니스 하는 자리라 내가 한국 리듬에 대해 강의해도 멀찍이 앉아서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분위기였어요. 근데 연주가 시작되고 냄비뚜껑 같은 걸로 리듬을 만들면서 악기가 하나씩 치고 들어와 서로 다른 리듬이 격이 맞게 어울리거든? 이 친구들이 하나둘 앞으로 오더니 리듬을 타고 웅성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앞부분을 끝냈는데 뒷부분에는 상모까지 돌리잖아요. 상모 돌릴 때의 발하고 리듬 치는 손하고 동작이 엇갈린다고. 사람들이 야단이 나서는 이후에 유명한 평론가들이 사물놀이에 대해 말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자연의 소리를 음악화하는 작업 또한 스스로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우리 집이 서울에서 굉장히 큰 집이었는데, 풍경이 방마다 걸려 있었어요. 밖에서 들리던 자치기 소리, 엿가락 소리도 기억이 나고요. 그게 내 정서의 기본이에요. 73년에 국립국악원 원장 김기수 선생이 제안해서 ‘봄 2’라는 곡을 타악기로 썼거든요. 그 곡을 쓰면서 산에 올라가서 나무 꺾이는 소리, 까치소리, 물 소리를 직접 듣고 봄을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근데 언젠가 집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골목에서 새소리가 들리는 거야. 근데, 새가 아니야. 녹이 슨 자전거를 탈 때 나는 소리였어요.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초연을 하고 김기수 선생님 친구 분이 나한테 물으시더라고요. 까치소리하고 새소리 내는 게 무슨 악기냐고. 깜짝 놀랐어요. 작곡가가 의도해서 뭘 쓰면 관객에게 전달된다는 신념을 굳게 가진 계기였어요.

 

“소리와 빛, 환희’ 라는 곡을 작곡하고 있어요. 10월 23일에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타악기 앙상블인데, 전 세계의 종이 등장해요. 이 복잡한 시국을 치료할 수 있는 곡이 되길 바라고 있죠. 산꼭대기 위에서 하늘을 머리 위에 받친 심정으로 쓰고 있어요.”

“소리와 빛, 환희’ 라는 곡을 작곡하고 있어요. 10월 23일에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타악기 앙상블인데, 전 세계의 종이 등장해요. 이 복잡한 시국을 치료할 수 있는 곡이 되길 바라고 있죠. 산꼭대기 위에서 하늘을 머리 위에 받친 심정으로 쓰고 있어요.”

 

 

지금은 자연의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이 더 많아졌겠어요. 자연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요. 까치소리만 들어도 암놈인지 수놈인지 알겠어요. 분당 탄천 쪽에서 산책하면서 까치들하고 놀거든요. 예전엔 단순히 ‘까가각’거리는 것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리듬을 더해가더라고. 예를 들면 암놈을 부를 때 수놈이 똑같이 흉내를 내거든? 저쪽에서 세 번을 하면 이쪽에서 세 번을 해, 그게 넷이 되고 다섯이 되고 나중엔 엄청난 리듬이 만들어져. 요즘엔 애들이 나를 반기는 것도 알겠어요. 얼마 전엔 아침 여덟 시쯤 탄천 다리 밑을 지나는데 햇빛이 물을 비추는 게 보였어요. 물은 흐르다가 돌에 부딪쳐서 다양한 모양의 물줄기를 남기죠. 그때 물줄기의 그림자가 보이더라고요. 나이 먹으면 눈이 흐려진다고 하잖아요? 나는 그 반대예요. 작은 꽃이 보여요. 언젠가 한 식물학자가 모든 풀마다 꽃이 있다는 얘길 했는데, 요즘은 그게 보여요. 탄천에도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꽃이 있고요.

 

동서양 악기를 가리지 않고 다뤘고 국악기 개량도 여럿 한 걸로 압니다. 많아요. 많은데, 선율 악기는 아니었어요. 플라타너스가 일 년에 한 번씩 잘려나가거든요? 그걸 가져다가 잘라서 양금주자들이 쓰기 좋은 스틱을 만들었죠. 또 칼림바를 장구 아랫도리를 빼고 위에 얹어서 울림이 나도록 하는 그런 것도 있었고요.

 

예전에 국악기 개량 심포지엄에 참가했던 자료에서 인상적인 게 있었어요. 우리나라의 명인이나 장인들은 너무 전수에만 치중하고 그걸 문헌으로 남기려는 노력이 없다고요. 그동안은 앞만 보며 달려왔는데 나중에 나름대로 교칙본을 쓸 계획은 갖고 있어요. 내 나이를 아니까 하는 말인데, 교육자로서 제자나 후배들을 질책하던 마음이 어느 순간 알래스카의 얼음이 녹듯이 녹았어요. 고마움으로 되돌아오더라고요. ‘에코’처럼. 이번 세계 타악기 페스티벌 때 나에 대한 헌정 공연을 제자들이 따로 해줬어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거였어요.

 

음반으로 남기는 건 어떤가요? 그게 쉽지 않아요.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해요. 국악기를 세계에 알리는 잡지가 있어요. 거기에 기사를 싣는데 필요한 사진 자료도 도와줄 수 없다고 해서 내 돈으로 필름 사서 줄 정도였다고. 음악가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거지만 계속 작품이 들어오고 있어요. 그거 쓰기 바쁜 탓도 있어요.

 

앞으로의 꿈이 타악기 문화센터 건립이라고요. 마스터플랜이 있어요. 우리 음악의 DNA는 정말 우수해요. 서양음악이야 쿵짝인데, 우리 음악은 진양조부터 휘모리까지 리듬이 다양하죠. 게다가 이게 지방마다 색깔이 다르단 말이에요. 대단한 거예요, 이 조그만 땅에서. 그걸 알기 때문에 다시 한국에 왔어요. 아이들에게 한국 음악의 우수성과 리듬을 가르치고 싶어요. 리듬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에요. 조롱박 같은 단순한 재료를 써서 아이들이 직접 악기를 만들게 할 거예요. 그걸로 합주를 하는 거죠. 서로 다른 리듬을 연주하다 보면 다른 음 높이의 소리가 모여 노래가 된다는 것도,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뭔지도 알테고요. 그럼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자기 눈에 나빠 보이는 것도 사실은 한 사람의 개성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오랜동안 대학에 출강하는 동안 가졌던 신념이 있어요. 얘네들이 날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얘네들을 위해 있다는 것.

 

참선이나, 그림, 서예도 다 음악을 위한 것이었죠? 그렇죠. 하고 싶은 것 다 해봤는데, 다시 돌아오더라고요. 자연으로. 제자나 후배에게, 국악 하는 사람은 꼭 붓질을 해봐야 한다고 가르쳐요. 사군자 있죠? 또 난 치는 것. 거기 그림이고 철학이고 음악이고 다 담겨 있어요.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원으로 이어주는 운동. 연주고 인생이고 간에 다시 돌아오거든요. 다시 돌아와서 미운 사람을 다시 봐요.

 

국립관현악단을 그만둔 게 삶에서 가장 큰 갈등이자 전환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오케스트라에 묶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바깥의 역할을 못하는 것도 싫었지만, 국립관현악단이 KBS로 이관되는 과정에서 전부 다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했어요. 지휘자가 찾아와서 설득하고 그래도 내가 피했어요. 음악이 아니라 정치하는 집단인 줄은 내가 알았지만, 더 이상은 시간 낭비 같아서 싫었어요. 자유인으로 학생들도 가르치고, 또 다시 미국에 나가서 나도 공부하고 그렇게 왔어요. 박동욱이 지금 팔순이 지나가고 있는데, 섭섭했던 게 다 가셔서 기뻐요.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었고, 그때 주먹이 날아갈 정도로 싸웠던 이강숙 총감독하고 이젠 악수도 했으니까요.

 

옛날과 화해를 하면서 스스로 바뀌었다는 말씀이신데,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속담은 틀렸나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그럼요, 틀렸어요. 내가 만든 건 내가 스스로 푸는 거예요. 세 살 버릇은 고칠 수 있어요. 스스로 치지 않아서 그래요. 시간과 리듬 안에서 해야 할 것과 안 해야 할 것을 정해야죠. 자기 틀을 짜놓고 가면 돼요. 남이 어떻게 바꿔주는 게 아니에요. 다만 버릇이라는 게 그 사람의 좋은 캐릭터일 수도 있으니까 그건 조심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