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가 아닌 전통주

주춤했던 전통주가 다시 꿈틀댄다. 전통주의 ‘전통주의’를 벗어 던지기 좋은 때다.

전통주 홍보 문구에나 나올 것 같은 “전통주가 달라졌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 요즘이다. 전통주의 변화를 감지할 만한 이슈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막걸리 열풍에 은근슬쩍 기대어 조악 한 술을 만들던 모습은 희미해지고, 다양한 도수와 맛의 술들이 식탁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2세 경영으로 변화를 시도한 몇몇 양조장부터 백화점이 직접 뛰어들어 다시 라벨 작업을 하는 경우까지, 변화의 시발점도 다양하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협력해 만든 ‘전통주 갤러리’도 지난 2월 개소했다. 약 2천여 종의 전통주를 둘러보고 시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전통주를 취급하는 위스키 바도 많아졌고, 전통주를 베이스로 칵테일을 만드는 전문 바텐더도 종종 보인다. ‘드슈’, ‘얼쑤’ 같은 근사한 전통주 주점도 늘어났다. 지난 4월, 켄싱턴 제주호텔은 지하2층 한식당 내에 전통주 전문 바를 열었다. 일상적인 외식 메뉴에 화요, 일품진로 같은 증류식 소주인 곁들이는 사람도 꽤 많다. 평양냉면이 그랬던 것처럼, 전통주가 새로운 것을 좇는 사람들 사이에서 ‘트렌디’한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달까?

술에도 당연히 유행이 있다. 와인 붐, 사케 붐, 막걸리 붐, 싱글 몰트위스키 붐 그리고 최근의 크래프트 맥주 붐과 전통주 붐까지…. 주종마다의 흥망성쇠가 몸치의 어깨춤처럼 제각각 들쑥날쑥했다. 이런 붐이 시장을 키우는 촉매제가 되고, 그 산업이 꺼지지 않고 유지되면 두 말할 것 없이 좋겠지만, 부흥 뒤엔 외면의 시기가 찾아온 경우도 있다. 그래서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전통주의 시대를 맞아 단단히 다지고 꼼꼼히 두드리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생겼다.

막걸리부터 차례주까지, 뭉뚱그려 편하게 전통주라고 부르고 있지만 전통주는 정확히 어떤 술을 지칭하는 말일까?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는 아직 없다. 막연히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 방식으로 만든 술, 오랜 시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셔온 술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법률에서 규정한 전통주의 기준은 이렇다. 2012년 시행된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몇 가지 기준을 세워 전통주를 분류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와 시·도 지정 문화재 보유자가 제조한 술, 식품 명인이 제조한 술, 해당 지역에서 생산한 지역 특산물을 주원료로 제조한 술(지역 특산주), 전승되어 오는 원리를 계승·발전시킨 술이다. 이런 문화적, 법률적 정의에 따라 전통주를 가늠하다 보면 행간으로 빠져나가는 술들이 있다. 전통주라고 부르기엔 어색할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훌륭한 술들 말이다. 전통주 시장이 성장의 탄력을 받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전통주의 그 ‘전통’을 조금 벗어 던질 필요가 있다.

전통주는 으레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명주이거나 2~3대에 걸쳐 명인이 만드는 술이라는 생각을 먼저 깨뜨려볼까? 지금 가장 맛있는 전통주를 꼽아보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함평에서 만드는 ‘자희향’을 꼽겠다. 자희향은 술을 처음 출시한 지 3~4년밖에 안 된 양조장이다.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술 빚기를 배운 노영희 양조가가 2009년 자신의 친가가 있는 함평에 양조장을 차렸다. 국화가 유명한 지역이라 술을 빚을 때 국화를 사용했고, 그 향기가 말끔하게 올라온다. 약주와 탁주 모두 훌륭하다. 홍천에 위치한 양조장 ‘예술’에서 만드는 술도 한번 맛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홍천 지역의 특산물인 단호박을 넣어 혀를 계속 쩝쩝거리고 싶은 여운이 남는 술이다. 충남 아산에 양조장이 있는 이가수불은 ‘이상헌 약주’와 ‘이상헌 탁주’를 만든다. 인천에 위치한 삼양춘에서 만드는 담백한 맛의 탁주도 훌륭하다. 이 두군데 양조장은 설립된 지 이제 1~2년밖에 안 됐다. 전통주갤러리의 명욱 부관장은 “새로운 술을 찾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프리미엄 전통주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3~4년 사이에 스무 곳 가까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오비맥주보다도 역사가 짧은 술을 두고 전통주라 부르는 게 좀 어색했을까? 싱싱한 이들 양조장이 내세우는 건 어쩐 일인지 ‘새로움’이 아니다. 그들이 기대는 건 고문서에 등장한 전통주다. 그 시대의 술을 복원한 복원주임을 대대적으로 내세우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자희향은 석탄주, 동몽은 호산춘을 복원했다고 말하지만, 고문서 속 술과 지금 만드는 술은 분명 맛이 다를 테다. 그리고 고문서 속 술을 복원한다고 해도 양조가가 가감하는 부분이 많고, 고문서에는 없는 지역 특산물을 더 추가하기도 했다. 게다가 양조 기술이 좋아져서 그때 보다 지금의 술맛이 훨씬 더 좋을 확률이 높다. 몇천 가지가 넘는 고문서 속 술 자체도 맛의 변별력이 아주 큰 편은 아니다. 전통주 공방 ‘서로서로’의 기획과 홍보를 맡고 있는 최우택 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3~4년 차의 신생 전통주 브랜드들은 처음엔 0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고문서에 기록된 옛 술과 지역 특산물에 기댈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야 이야깃거리도 생기고 홍보도 되고요. 하지만 최근엔 또 달라졌어요. 지금 막 시장에 진입하는 양조가들은 복원주나 지역 특산물 없이 순수하게 자기 스타일로 양조도 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후발주자가 많아질 것 같고요.” 술맛을 보고 평가하기보다는, 전통이 길고 명성이 드높아야 비로소 관심을 보이는 소비자들도 생각해봐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전통주는 으레 청주나 탁주일 거라는 생각도 깨뜨려볼 만하다. 오미로제라는 스파클링 와인이 그 생각을 깨는 가장 날카로운 도구가 될 수 있다. 오미나라의 대표 이종기 교수는 계약 재배한 문경 오미자를 원료로 샴페인 제조 방식을 그대로 적용해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를 만든다. 위스키부터 와인까지 국내 양조 분야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이종기 교수가 그간의 경력을 쏟아 부어 완성한 술이다. 맛도 고속도로 변에서 파는 저렴한 과실주와는 완전 딴판이다. 이종기 교수가 생각하는 전통주의 정의는 “술의 원료가 한국산이되, 전례되는 양조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살릴 것”이다. 그는 “문경 오미자로 만드는 오미로제 역시 전통주”이며 “오미로제는 서양의 기술로 만든 술이 아니라, 현대의 진화된 기술로 만든 우리나라의 술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강조했다. 이달엔 오미자 와인을 발효시킨 브랜디인 ‘오드비’를 신제품으로 내놓았다. 우리나라의 과일 발효주는 애매한 경계에서 고충을 겪는 중이다. 물론 법률적으로는 지역 특산주에 속하지만 제품명에 무슨 무슨 ‘와인’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고, 별다른 역사 없이 이제 막 양조를 시도하는 술이다 보니 전통주라는 소비자 인식이 낮다. ‘머루 드 서’, ‘추사 사과와인’ 등도 계속 발전하는 중이다. 단맛 일색이던 과실주의 맛도 ‘드라이한’ 술의 등장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래 전부터 술을 빚어온 명인이 만드는 유서 깊은 전통주는 모두 맛있을까? 이 생각 역시 (아프지만) 깨뜨려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명맥이 끊기기도 했고, 쌀이 귀했던 시절이라 제약도 많았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때문에 긴 전통을 자랑하는 양조장의 경우에도 실제로 대를 이었다기보다는 문화 계승 차원에서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한 사례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양조장에서 술을 빠르게 발효해 대량으로 생산하려는 의도로 누룩을 많이 사용했는데 (쌀 1kg에 200g 정도) 그 방식을 고수하는 일부 명인들의 술은 전통주의 향긋함과 깔끔함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는 집에서 술을 빚는 가양주 위주의 양조 문화가 발달해 산업화가 늦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관혼상제, 향음주, 상견 등 우리의 삶에서 술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은 한순간도 없지만 근대화가 다소 더뎠다는 설명이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가양주 문화도 사라졌다. 된장, 간장은 대를 이어온 명인들이 있지만, 술의 경우는 가혹한 주세령과 금지령으로 큰 위기를 겪었다. 주변 국가들이 몇 대에 걸쳐 명주를 만들어온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전통주는 새롭게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전통주는 정말 ‘전통’이 길어야 할까? 국산 재료로 만든 와인은 전통주가 될 수 없을까? 아직 대중적으로 합의가 약한 ‘전통주’라는 단어를 놓고 이렇게 범주를 따져보는 것만으로도 전통주는 발전할 동력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