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해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는 갑자기 과거의 질문이 됐다. 지금은 누구나 “이게 나예요” 하는 거다.

7월에 밴드 혁오의 공연을 보러 갔다. 가면서 자연스레 작년 가을 ‘위잉위잉’을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듣자마자 끌리는 곡에, 까끌까끌하면서도 귀에 착 안기는 음색이 좋았던 기억. 하지만 노골적으로 들리는 가사가 모든 걸 멈추게 만들었던 기억 또한. 언젠가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했을 때처럼, 하필 그런 종류라면 일단 거절하고픈 취향이라서 말이 다. 공연은 홍대 근처에 있는 한 멀티숍에서 소규모로 열렸는데, <무한도전> 출연 이후라 그런지 공연장 바깥에는 스크린으로라도 그들을 보려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한 곡 한 곡 호젓하니 개운한 매력을 느꼈다. 분위기도 한몫했다. 객석에서 연신 “귀여워!”를 외치는 것이 내내 음악과 한 몸인 듯 어울렸달까? 그런데 문득 어떤 멜로디를 듣다가 ‘이건 본 조비 같잖아?’ 생각했다. 듣는 이에 따라 전혀 얼토당토 않을 수 있겠다. 하지만 스스로 그 느낌이 매우 중요했는데, 곧 이런 생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 노래 속에서 어떤 부분은 본 조비 같고 어떤 부분은 90년대 말 시카고 근교 어디쯤에서 페이브먼트 같은 밴드를 하고 싶다며 홈레코딩을 하던 소년들 같다는 건 과연 뭘까? 우연히 맞아떨어졌 다기보다는 그 소리의 어떤 출발점을 생각하게 되는 건데, 말하자면 기존에 누군가 음악을 하 겠다고 마음먹을 때라면 응당 좋아하는 뮤지션을 가슴에 품기 마련이었다. 그건 곧 지향하는 음악적 질감이나 태도였으니, 선택은 불가피했다. 또한 그 선택은 여타 다른 선택을 배제하는 방식이었다. 과격한 예지만, 벨 앤 세바스찬 같은 음악을 하겠다면서 판테라를 래퍼런스 삼을 순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혁오의 노래를 들으면 서 느낀 바, 뭔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본 조비든 판테라든 태진아든 장기하든 모두 납작한 평면 위에 놓인 한 가지 이름일 뿐이다. 이게 가면 저게 오는 식의 반복이 아니다. 여기엔 필시 어떤 단절이 있다. 말하자면 혁오는 뭔가 완전히 끝나버린 판에 가장 눈에 띄는 무대로 올라간 이름 같았다.

대중문화에 국한하더라도 20세기의 속도는 21세기 들어 지루한 정체를 보였다. 새롭다는 모든 것은 기존에(20세기) 이미 있던 것들과 필연적으로 비교당하며 납부하듯이 에너지를 빼앗긴 채, 간신히 유행이라는 틀에 들어가는 걸로 잠깐씩 새로울 수 있었다. 역사를 파악하고, 아카이브를 다듬고, 거기서 뭔가를 접목하는 노력이 최선책이 되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 만큼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끝났다. 불과 얼마 전까지 느슨하게나마 젊고 새로운 것으로 간주되던 모든 이름이 페이지 뒷장으로 넘어가 버렸다. 결과, 여기는 진공이거나 공황이거나 그야말로 맨땅이거나, 금싸라기거나, 갑자기 텅빈 곳이 되었다. 무덤은 아니다. 분명한 기회다. 한 물 갔든, 두 물 갔든, 걸음마도 못 떼었든, 산 송장이라 불렸든 무엇으로부터도(심지어 그 자신과도) 비교당하지 않은 채, 이게 나예요, 시작하면 된다. 물론 미추는 있다. 고샤 루브친스키쯤 하나 사 입고, 나도 감각은 이렇게 젊어요, 하는 식은 추하다. 그건 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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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피처 디렉터] 곧 두 번째 책을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