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음악 사이

하이엔드 오디오로 전망 좋은 호텔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 새로운 박람회 KHLF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어쿠스틱 아츠의 음향 기기를 시연한 사운드 스터디의 전시장

어쿠스틱 아츠의 음향 기기를 시연한 사운드 스터디의 전시장박람회장은 크다. 일반적으로 길든 넓든 거대한 공간에서 열린다. 이것저것 보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나간다. 빠져나올 땐 생각한다. 음, 이 드넓은 곳을 꼼꼼히 살폈군. 좀 생소한 도시에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박람회에서 소개하는 물건은 익숙할지라도 그 공간만큼은 낯설 테니. 그래선지 열심히 보고 나면 이제 좀 숙소로 돌아가 쉬어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구경하는 동안엔 좀 필사적인 맘도 갖게 된다. 빠짐없이 다 봐야겠다는 기분.

2015 KHLF with Lotte, 한국 하이엔드 오디오 & 럭셔리 페어(이하 KHLF) 역시 박람회답게 오디오와 럭셔리에 관한 모든 것을 총망라했다. 오디오와 홈시어터 전문 웹사이트 하이파이클럽과 롯데백화점 문화마케팅팀이 머리를 맞대고 준비한 만큼, 90여 개의 업체 및 기업이 참여한 풍성한 규모. 하지만 공간만큼은 좀 달랐다. 9월 3일부터 9월 5일까지, 롯데호텔월드 잠실의 1백 개가 넘는 객실이 각기 다른 전시장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하이엔드 오디오를 중심으로 의류, 미술품, 전자제품, 주류, 리빙 등 온갖 종류의 값진 물건들을 총 5개의 콘셉트로 구분했다. 전시는 11층, 12층, 14층, 15층까지 네 층의 객실을 사용했다.

 

 

하이엔드 오디오와 럭셔리라면 파격보다 전통이란 말에 더 가까운 듯하지만, 이렇듯 KHLF가 박람회장에 물건을 망라하는 방식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관람객이 행사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질 수밖에. 처음엔 좀 낯설었다. 왁자지껄한 활기에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하기보다 어깨라도 부딪칠까 호텔 복도를 조심조심 걸었고, 전시장에 들어설 때는 좀 망설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은 어디까지나 독립된 공간, 남의 방이었으니까.

12층 전부와 14층의 약 절반은 하이엔드 오디오 업체들이 전시장을 꾸렸다. 그리고 그 안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구색 맞추기 식으로 몇 개 갖다놓은 게 아니라 꽤 많이. 음악이 나오고 있으니, 관계자들은 간단한 눈인사로 손님들을 맞았다. 앰프와 스피커를 비롯해 방 한쪽을 꽉 채운 음향 기기들, 그리고 딱 적당히 떨어뜨려놓은 의자. 거기에 자리를 잡고 음악을 들었다. 선곡은 음향기기의 지향점에 따라 다양했다. 웅장한 교향곡, 단출한 연주곡, 보컬이 도드라지는 팝…. 소리나 음악이 맘에 들면 오래 머물렀고, 나중엔 그렇게 노래가 울려 퍼지는 그 공간이 좋아 더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판단하며 구별할 수 있었다. 좋은 것들 중 더 좋은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고급한 물건을 대하는 태도는 그렇게 더욱 정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취향이 섬세한 친구의 집들이에 초대받은 기분. 낯설기보다 궁금해졌다. 과연 다음 전시장은 어떻게 꾸며뒀을까. 온전히 음악만 들을 수 있는 방을 갖는 것이야말로, 음악 애호가들의 소망이자 숙원이 아닐는지. 여기는 그런 방이 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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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스토니 전시장의 구두와 가방들

더불어 11층 전체와 14층의 일부엔 의류, 액세서리, 미술품, 주류 전시장이 있었다. 그러니 음악을 듣다 술도 한잔하고, 맘에 드는 구두를 신어볼 수도 있었다. 더 이상은 박람회장이 어색하지 않았다. 커튼을 활짝 열고 시원한 전망을 보여주는 방과 조도를 낮추고 어울리는 조명을 켜둔 방, 꼿꼿한 등받이 의자가 있는 방과 푹 꺼지는 소파가 있는 방, 좀 더 넓은 방과 좁은 방. 구조는 비슷할지 몰라도, 똑같은 방은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 15층은 전자제품과 침대를 비롯한 가구(웨딩) 전시장이었다. 임시로 만든 ‘쇼룸’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 그냥 원래 그 방에 있던 것 같은 물건들이 제 성능과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물건을 구경하는 동시에 공간과의 조화를 가늠할 수 있었다.

아방가르드, 부메스터, 에소테릭, 어쿠스틱 아츠, 쿠르베, 아.테스토니, 예거 르쿨트르, 몽블랑, 란스미어, 라떼르프라그랑스…. 올해 첫 시작을 맞은 KHLF에 모인 ‘하이엔드 오디오와 럭셔리’의 면면이다. 그저 비싼 물건이 아닌 값진 물건을 거기에 걸맞은 방식으로 소개하고 다룬다는 것. KHLF를 찾은 관람객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한 방에 오래 머물렀다. 좋아하는 음반을 온전히 끝까지 듣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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