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Q AWARDS – 올해의 궁서체 ‘살려야 한다’

다 망했다는 말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그럼에도 특별히 배제하거나 더하지는 않았다. 진짜와 가짜, 기대와 실망, 성공과 실패를 한 상에 차렸다. 2015년을 돌아보면서 <GQ>는 가장 넓은 의미의 상賞을 상다리 부러지게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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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실제상황 전염병 메르스 첫 감염 환자가 발생한 날은 5월 20일이었다. 비현실적으로 한산했던 명동, 누가 재채기하는 소리만 들리면 불안하던 지하철, 슈퍼 감염자나 격리같이 무서운 단어가 난무했던 뉴스…. 69일간 확진자는 186명, 사망자는 36명, 퇴원자는 138명. 누적 격리 대상자 수는 1만6천9백93명에 이르렀다. 동탄성신병원 김현아 변호사가 쓴 “저승사자 물고 늘어지겠습니다. 내 환자에게는 메르스 못 오게”라는 편지가 공개됐을 땐 막연한 공포가 극복해야 하는 현실로 또렷해졌다. 사실상 종식선언은 10월 29일, 아직 위태로운 환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속칭 ‘건대 폐렴’으로 알려진 그 괴질은 아직 원인도 모르는 채 어쩐지 조용해졌다.

올해의 궁서체 살려야 한다 한편 서울대병원 홍보팀은 A4 용지에 궁서체로 출력한 글씨 ‘살려야 한다’는 의료진이 자발적으로 붙인 것이라고 <국민일보>에 해명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올해의 작가 정성주 작년에 <밀회>를 쓴 정성주는 올해 <풍문으로 들었소>를 썼다. 무엇보다 그는 알고서 썼다. 주제가 있고, 맥락이 있고, 계통과 운영이 있었다. 게다가 철저히 감추며 썼다. “도대체 저 드라마가 뭘 어쩌려고 저러나?” 라는 의문에 미리 알아챌 만한 힌트 같은 건 없었다. 밀어붙이는 걸로는 당할 자가 없었다. 힘이 있었고, 유연했고, 재미있고, 까다로웠다. 정성주가 시작해 정성주가 완성했다. 올해를 통째로 돌이켜본다 해도 <풍문으로 들었소>가 있었다는 사실에 간신히 안도할 수 있었다.

올해의 남우조연 오달수 배우 오달수는 올해 2월 <조선명탐정 : 사라진 놉의 딸>, 7월 <암살>, 8월 <배테랑>에 출연했다. 그는 세 편의 영화로 11월 15일 현재 2천9백98만여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는 중이다. 만약 11월 25일 개봉할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가 1만4천여 명만 넘기면 한 해 동안 관객 3천만 명 동원한 배우가 된다. 흥행하고 싶다면 부적처럼 오달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기록을 떠나, 주연들이 잔뜩 힘을 줄 때, 그는 오히려 눈을 가늘게 떴다. 맡은 역할 때문일까? 아니면 정감 있는 생김 때문에? 해야 하는 연기에선 안하는 듯하고, 안 해도 될 때는 완전히 물러나는, 올해의 (조연)배우였다.

올해의 여우조연 길해연 뚝 떨어지는 갈색 단발, 동그란 안경, 5센티미터쯤 되는 굽, 자로 잰 걸음걸이, 어떤 음흉함.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양 비서를 연기한 길해연은 참 기이한 장악력으로 화면을 잡아당겼다. 언제 어디서든 그녀가 나타나면 하던 일 멈추고 누구나 그녀가 무슨 얘길 하는지 들어야 했다. 조언가, 로비스트, 지략가, 유모, 비서, 모두의 왕언니. 풍모는 과연 캐릭터에 합당했고, 목소리는 두렵도록 맞아떨어졌다.

올해의 여우주연 김현숙 2007년 4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열네 시즌 동안 김현숙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여주인공이었다. 극중에서 이영애는 광고물 제작사 ‘아름다운 사람들’의 대리로 시작해 ‘낙원사’로 이직하고, 정리해고를 당한 뒤 ‘이영애 디자인’을 세우며 사장으로 독립한다. 최원준으로 시작한 연애는 장동건, 김산호, 한기웅, 이승준을 거쳤고, 서른 살이었던 영애는 서른여덟 살이 됐다. 덜 지운 화장을 한 채 숙취에 눌려 잠을 깨는 침대 신부터 곱창, 삼겹살, 포장마차를 오가며 벌이는 회식 자리까지, 카메라는 영애의 하루를 계속 쫓는다. 이 대서사시 같은 드라마가 질리지도 않고 이어지는 데는 김현숙의 무게가 크다. 김현숙은 화려한 ‘연기’가 아니라 ‘생활’이 축축하게 드러나는 주인공의 모습에 매번 집중한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이 때론 범죄(성희롱, 여성 비하, 인권 침해, 폭력 행사, 부당 노동)에 근접할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어도, 김현숙이 버티고 있는 한 그 에피소드는 벗어나고 싶은 현실의 풍자로서 기능했다. 올해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4>는 역대 최고 시청률인 3.4퍼센트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올해의 앨범 이센스 <Anecdote> 올해도 힙합은 여전히 논쟁거리였지만 음악의 고전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낄낄대다가도 <Anecdote> 같은 앨범이 있어서,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센스는 자신의 전체를 걸어오는 남자고, 오비라는 훌륭한 프로듀서와 함께 그의 전체가 이전에는 몰랐던 사람처럼 새롭게 육박해왔다. <Anecdote>로부터 랩 가사가 말놀이 이상이라는 것, 랩에는 낭송 이상의 음정과 톤, 발음이 있다는 것, 무엇보다 진실한 표현을 넘어설 수 있는 음악적 기술은 없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이 앨범은 이센스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적인 이야기는 힙합의 흔한 소재다. 하지만 그들과 이센스가 다른 게 있다면 호전성이다. 널리고 널린 게 싸움꾼 같지만, 여야 정치인이 그렇듯이 링 밖에선 친구다. 또한 언젠가부터 아티스트는 ‘여러분의 친구’가 되었다. 그들의 음악에서 싸움은 엔터테인먼트의 연장선이다. 이센스의 싸움은 자신과 싸우다 보니 다른 사람이 불가피하게 끌려 들어오는 종류다. 벼랑 끝에 음악과 자기 자신만 남겨놓은 래퍼만이 이런 가사를 쓰고 그 말을 실제로 증명한다. “머리가 아파오지만 끝내놓지 않고 집에 들어가기가 내키지 않아 아직 내가 못 꺼내놓은 게 있어 그것만 찾으면 가짜와 내가 구분될 있어.(‘Writer’s Block’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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