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아저씨? 황정민 인물론

230 GQS_인물론 2-수정-황정민

관객 동원력만 본다면 지금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황정민을 넘어서는 배우는 없다. <국제시장>과 <베테랑>은 천만 영화였고, <히말라야>는 8백만 관객이 봤으며, 최신작인 <검사외전>도 이 글을 쓰는 2월 10일에 막 6백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이 네 편의 영화는 모두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나왔다.

숫자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숫자 자신 뿐이다. 엄청난 숫자인 건 분명하다. 사람들은 이경영의 다작에 놀라고 이를 이야기거리로 삼지만, 진짜 놀라운 건 황정민의 다작이다. 이 경영은 대부분 조연, 단역, 카메오이고 영화의 성공률이나 연기력도 들쑥날쑥하지만 황정민은 네 편 모두가 주연작이며 대 히트작이다. 무엇보다 그는 네 편 모두에서 기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거의 완벽한 황정민 연기를 보여준다.

이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 결과가 그렇게 재미있지 않은 걸까. 황정민의 히트 행진에는 편안하게 경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경탄할 수 없기도 하지만 솔직히 많이 심심하기도 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핑계는 그의 출연작들이 그렇게 좋은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검사외전>은 ‘배우발’과 연휴, 멀티플렉스의 상영관 몰이를 믿고 대충 만든 설날 영화라는 티가 팍팍 나는 무성의한 장르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히말라야>는 소재가 된 실화가 영화 중간 감상주의에 익사할만큼 노골적인 한국식 신파다. <국제시장>의 편리한 기회주의와 얄팍함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했 다. 이들 중 어느 정도 안정적인 비평적 성과를 얻은 작품은 <베테랑>뿐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역시 문제가 많으며 대체로 과대평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하지만 여기엔 보다 큰 이유가 있다. 그건 황정민이 이 네 편의 영화에서 맡고 있는 캐릭터들이 모두 한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베레스트에서 죽은 동료의 시체를 찾으러 산을 오르는 실존인물인 등반가, 한국전쟁부터 80년대 이산가족 찾기까지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해온 노인,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검사, 걸어다니는 폭탄과도 같은 재벌N세를 감옥에 집어넣으려는 광역수 사대 형사를 하나로 묶는 범주는 무엇인가.

모두 한국식 아저씨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중견 남자 배우에게 한국식 아저씨를 연기하는 것은 중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 남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몇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식 아저씨에 편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적인 중년 남자를 연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식 아저씨의 매너리즘을 익히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그럴싸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다른 길을 택한다면 아무리 연기가 좋고 사실적이어도 관객들은 그 사실성과 깊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아저씨가 아닌 중년 한국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를 가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장르물로 가면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필수 과제처럼 아저씨 연기를 거쳐야 한다. 모든 한국인 중년 남자는 아저씨의 변주다.

아저씨들을 표현하는 데도 종류가 있다. 송강호는 한국식 아저씨 연기의 전문가지만 그 아저씨다움을, 우스꽝스러움과 어리석음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거장이다. 물론 그가 그런 거장이 된 데는 박찬욱과 봉준호 같은 감독들의 협업이 큰 역할을 했지만, <넘버 3>에서부터 보여준 그의 특별한 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홍상수는 한국 인문계 ‘개저씨’들의 초라한 허위를 폭로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으로, 그의 영화에서 영화 감독 남자 주인공으로 나온 수많은 남자 배우(정재영, 이선균, 유준상, 김상경, 김태우, 문성근…)가 연기한 ‘개저씨’들의 묘사는 오싹할 정도로 가차 없다. 즉, 한국영화에서 훌륭한 아저씨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언제나 자신과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 사이에 거리를 둔다. 대부분 한국영화에서 의미 있는 아저씨 연기는 배우와 캐릭터 사이에서 나온다.

황정민의 경우는, 적어도 최근의 황정민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사정이 다르다. <국제시장> 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를 보라. 캐릭터에 대한 어떤 의심도, 냉소도, 반어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자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진실성에 도전 하지 않는다. <국제시장>은 종종 <포레스트 검 프>와 비교되는 영화인데, 적어도 캐릭터와 연 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비교는 맞지 않는다. <포레스트 검프>의 톰 행크스는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존중하지만, 이 캐릭터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 위에서 그를 객관적으로 표현한다. 황정민의 연기엔 그런 것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의 흥행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국제시장>은 캐릭터와 그 영화의 맞춤 관객들이 티끌만 한 의심을 던지면 영화 전체가 붕괴되는 종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주연한 또 다른 신파인 <히말라야>도 마찬가지다. 이 두 영화에서 그와 맞춤 관객들이 교감에 성공하는 이유는, 그 인물들이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관객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그들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테랑>과 <검사외전>의 황정민은 조금 다른 부류다. 안전하고 결백한 <국제시장>과 <히말라야>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이들은 정치적인 존재들이다. 두 사람 모두 사회의 부조리와 정면 대결을 하고 적어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승리한다. 내용과 주제만 본다면 이들은 <국제시장>과 <히말라야>의 보수성과는 정 반대 방향에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베테랑>과 <검사외전>은 진보적인 영화가 아니며 황정민의 캐릭터도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이 두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은 그냥 ‘개저씨’다. <베테랑>의 경우는 조금 약하고 <검사외전>에서는 더 노골적이지만 양쪽 모두 ‘개저씨’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두 보수적이고 무례하고 속되고 폭력적이다. 그들은 모두 정의를 추구하지만 그보다는 사나이의 ‘가오’가 더 중요하며, 맞춤 관객들이 공감하는 부분도 바로 여기다. 이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정의 실현이 아니라 주인공이 품고 있는 억울함을 폭력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며 폭력을 일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검사외전> 끝에 나오는 무성의한 사과는 오히려 그의 죄책감 결여를 입증한다.

송강호나 홍상수의 배우들과는 달리 황정민은 한국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정하는 남성 관객들의 기대와 욕망과 나르시시즘에 완벽하게 봉사한다. 그는 강동원처럼 대놓고 미남이 아니기 때문에 타자화나 질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한국식 정서에 대한 타고난 감각 때문에 영화와 따로 노는 일도 없다. 그는 일상의 천박함에 관대하며 이를 심하게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할 줄 안다. 이들은 모두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한국식 신파에 특화된 조건이기도 하다. 그가 네 편의 한국식 히트작에 연속으로 출연해 모두 성공했다는 것은 점점 그의 연기가 안전한 신파로 수렴되고 있다는 뜻이다. 전성기 배우의 연기가 한 점에 수렴되고 있는 듯 보인다면 그건 위험한 일이다.

여전히 황정민은 좋은 배우다. 그는 관객과 능숙하게 소통할 줄 알며 자신의 연기를 쓸데없이 명연기화해 페티시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그의 출연작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 문제점이 그의 존재감이나 연기였던 적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그의 영화에서 가장 나은 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영화들이 그런 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1년을 거치는 동안 모든 것이 습관화되어 버렸다.

천만 배우이자 스타로서 그는 언제든지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이어진 한국식 아저씨 멜로의 행진이 그를 위한 추진을 얻기 위함이라면,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가 천우희, 곽도원과 공연하는 나홍진의 차기작 <곡성>은 여전히 올해 가장 기대되는 한국영화다. 그가 앞으로 무슨 영화를 찍고 무슨 캐릭터를 고를 것인지는 참견할 바가 아니며 예측할 수도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2015년에서 2016년으로 이어지는 ‘황정민 영화’의 분주한 행렬이 보기만큼 재미있지 않았고, 많이 수상쩍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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