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 최초의 SUV, F-페이스

몬테네그로에서 F-페이스를 시승했다. 재규어 최초의 SUV다. 한껏 부풀린 덩치만큼 재미와 실용성 또한 부쩍 늘었다.

몬테네그로. 재규어가 F-페이스의 시승회 치를 장소로 점찍은 동유럽 국가다. 이탈리아어로 ‘검은 산’이란 뜻이다. 최근 가장 뜨거운 여행지 크로아티아 밑에 있다. 각 나라 기자들은 영국 런던 인근의 판버러로 모였다. 에어쇼로 유명한 공항인데, 태그호이어를 만드는 태그 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여기서 재규어 전세기를 타고 몬테네그로까지 날아갔다.

전세기가 멈추자 창밖을 내다보던 기자들 입이 떡 벌어졌다. 비행기 옆으로 바짝 붙어 줄지어 선 신형 XF 때문이었다. 전세기 문이 열리고 우린 계단을 타고 내려섰다. 그리고 2인 1조로 XF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내린 순서대로 공항을 빠져나간 XF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렸다. 30여 분 달려 도착한 곳은 선착장. 우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XF에서 내렸다.

선착장엔 커다한 운반선 한 척이 해치를 활짝 연 채 떠 있었다. 배에 오르니 비로소 상황이 파악됐다. 배 안엔 우리가 시승할 F-페이스가 좌우 대칭으로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기자들이 모두 오르자 해치가 천천히 닫혔다. 곧 우렁찬 엔진음과 함께 뽀얀 포말을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기슭의 주택 양식과 풍광이 꼭 이탈리아를 연상시켰다.

이날 F-페이스를 실물로 처음 봤다. 존재감이 굉장하다. “재규어라면 200미터 밖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재규어 디자인을 총괄하는 이안 칼럼의 꼿꼿한 신념이다. 그런데 이제 그 거리를 좀 더 넉넉히 늘려도 될 듯하다. F-페이스는 재규어 역사상 가장 큰 덩치를 뽐내니까. 재규어 F-페이스의 차체 길이는 4.73미터, 휠베이스는 2.87미터다.

F-페이스의 덩치는 경쟁 브랜드의 중형과 대형 SUV 사이에 절묘하게 걸쳤다. BMW의 경우 X3의 차체 길이는 4.65미터, X5는 4.88미터다. 게다가 F-페이스는 휠베이스가 상대적으로 길다. 예컨대 길이가 12센티미터 더 긴 포르쉐 카이엔과 불과 2센티미터 차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이안 칼럼 때문이다. 그는 비율에 대한 못 말리는 집착으로 유명하다.

100퍼센트 디지털 계기판 이제 디지털 계기판은 완전히 새로운 도화지가 됐다. 거의 모든 정보를, 심지어 내비게이션까지 이렇게 단정하게 심어 보여준다.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다.

옆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캐빈(승객이 타는 공간)을 차체 뒤쪽으로 한껏 밀었다. 실용성을 챙긴 디자인은 아니다. 기다란 보닛과 쫑긋한 꽁지를 지닌 과거 재규어 경주차의 비율을 흉내 낸 시도다. 휠도 무려 22인치까지 끼울 수 있다. 다 비율 때문이다. 그래서 만만치 않은 거구지만 시각적으로 딱히 부담스럽지는 않다. 심지어 보는 각도에 따라 늘씬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안 칼럼의 주장처럼, F-페이스는 설령 엠블럼을 가린다 해도 누가 봐도 재규어다. 고유의 특징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서다. 가령 앞뒤 램프는 깍쟁이처럼 가느다랗게 떴다. 콧날의 그릴은 6인 가족용 화로 석쇠처럼 큼직하다. 범퍼도, 그 안에 품은 흡기구도 큼직하다. 몸매는 모난 곳 없이 미끈하게 빚었다. 스케일만 키웠을 뿐 재규어 특유의 우아함엔 변함이 없다.

실내도 전형적인 재규어다. 재규어 세단처럼 문 안쪽에서 시작된 곡선이 매끄러운 호를 그리며 대시보드를 감싸고 돈다. 시트와 트림은 가죽으로 곱게 씌웠다. 게다가 재규어 F-페이스는 3열 좌석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 대신 어른 5명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챙겼다. 트렁크 또한 650리터로 여유만만하다. 4:2:4로 나뉜 뒷좌석을 모두 접으면 1,740리터까지 늘어난다.

트렁크 해치는 범퍼 아래로 발을 살짝 스치면 전동으로 열린다. 닫을 때도 스위치만 누르면 된다. 가족 단위 이동을 염두에 둔 차답게 12볼트 소켓은 3개, USB 포트는 5개나 챙겼다. HDMI/MHL 포트도 따로 있다. 트렁크 플로어 한 면은 고무, 다른 한 면은 직물로 마감했다. 필요에 따라 뒤집어가며 쓸 수 있다. 플로어 아래 공간엔 스페어타이어를 숨겼다.

실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디스플레이였다. 계기판은 100퍼센트 디지털. 아우디의 버추얼 콕핏처럼 12.3인치 계기판 전체를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바꿀 수도 있다. 계기판은 모드에 따라 다채로운 구성의 그래픽을 띄운다. 센터페시아엔 10.2인치 모니터를 심었다. 여기에서는 한층 다양한 정보를 띄운다. 심지어 가속페달을 밟은 깊이까지 그래프로 볼 수 있다.

재규어 최초의 액티비티 키 F-페이스는 액티비티 키를 갖췄다. 재규어 최초다. 플라스틱 밴드 형태로 안에 RF 칩을 넣었다. 둘째날 아침, 재규어는 시승차 옆 플라스틱 통에 물을 채우고 이 키를 담가뒀다. 방수 성능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액티비티 키는 아웃도어 활동에 요긴하다. F-페이스에서 내려 바로 물놀이를 할 경우 리모컨 키는 차 안에 둔 채 액티비티 키로 잠그면 된다. 다시 열 땐 액티비티 키를 해치 도어의 재규어 글자 가까이 대면 된다.

한편, 재규어는 F-페이스 차체의 80퍼센트를 알루미늄으로 짰다. 동급 최초다. 차체에 쓴 알루미늄 중 3분의 1은 재활용 소재로 만든 RC5754다. 재규어는 2천6백16개의 리벳과 72.8미터의 구조용 접착제, 5백66개의 접용점으로 F-페이스의 차체를 이어 붙였다. 가벼운 소재를 단단하고 짱짱하게 짝지은 결과 F-페이스는 신형 XF 수준의 비틀림 강성을 자랑한다.

차를 살펴보는 사이 배는 건너편 선착장에 도착했다. 해치가 열리고 F-페이스가 한 대씩 빠져 나갔다. 내가 먼저 받은 시승차의 파워트레인은 V6 3.0리터 디젤 터보 엔진과 8단 자동 기어. 피에조 인젝터가 2천 바bar로 뿜는 경유를 태워 300마력을 낸다. F-페이스는 뒷바퀴 굴림과 네 바퀴 굴림 등 두 가지 방식으로 나오는데, 일단 네 바퀴 굴림 모델부터 시승했다.

시승차와 코스,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비바람과 안개 때문에 방심할 짬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길은 사정없이 굽이쳤고 F-페이스는 너무 강력했다. 이 엔진을 품은 F-페이스는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을 5.8초에 마친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마냥 즐거웠다. 처음엔 위축됐는데 곧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최악의 환경은 역설적으로 F-페이스의 숨은 실력을 확인할 기회였다. F-페이스는 피렐리 여름용 타이어로도 섬세하게 접지력을 챙겼다. 탁월한 밸런스와 전자 기술의 승리였다. AWD 시스템은 구동력을 뒤에서 앞으로 0.165초 만에 옮긴다. 토크 벡터링 시스템은 코너링 때 안쪽 뒷바퀴에 약한 제동을 걸어 앞머리를 예리하게 밀어 넣는다.

그래서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예쁘장한 궤적을 그리며 코너를 감아돌 수 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성취감이 쌓인다. 의도와 결과가 척척 맞으니 신이 난다. 운전의 즐거움은 이런 과정을 거쳐 터진다. 그러나 더 욕심을 내면 스릴과 마주해야 한다. 분명 물리력의 한계에 대비한 울타리는 있는데, 거기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건 F-페이스뿐 아니라 재규어 전 라인업에 걸친 특징 중 하나다. 특히 서킷 운전에서 피부에 확 와 닿는다. 매력적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같다. 차가 어느 순간 변덕을 부리지 않을까 싶어 더 집중하고 몰입하게 된다. 때문에 별별 전자장비를 다 챙겨 얹더라도, 재규어는 재미와 스릴의 경계를 넘나들 열쇠만큼은 꼭 운전자에게 쥐어준다.

 

힘은 필요충분조건을 성큼 웃돌았다. 그래서 가속페달 조작이 과격하면 펄펄 끓는 토크를 뱉는 과정에서 다소 울컥거렸다. 굽이진 길이 반듯하게 펴질 때마다 F-페이스는 질풍같이 달려 나갔다. 흡차음재로 디젤 엔진의 존재를 감추는 과정에서 사운드도 함께 사라진 점은 아쉽다. 가솔린 슈퍼 차저 모델은 구성진 음색을 뽐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팀은 배정받지 못했다.

재규어는 오프로드 코스도 준비했다. 코스는 비에 젖은 낙엽으로 가득했다. 자연스럽게 난이도도 급상승했다. 시작은 오르막 체험. 저속 크루즈 컨트롤 기능이다. 재규어가 갈고 닦는 중인 ‘전지형 프로그레스 컨트롤’ 기능의 확장판이다. 시속 3.6~30킬로미터 사이에서 속도를 설정하면 가속페달을 밟지 않아도 꾸준히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눈길과 빙판길, 오프로드에서 출발하거나 오르막을 오를 때 요긴하다. 까마득한 오르막 앞에 섰을 때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인스트럭터는 개의치 않은 채 가라고 손짓했다. F-페이스는 걸어 오를 엄두도 나지 않는 진창길을 헛바퀴 한 번 없이 올랐다. 그것도 여름용 타이어로.

점심 식사 이후 차를 바꿔 탔다. 이번엔 직렬 4기통 2.0리터 디젤 터보 인제니움 엔진을 얹은 F-페이스를 탈 차례였다. 300마력에서 별안간 180마력짜리로 옮겨 타려니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흥이 오히려 더 컸다. 우선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다. 겸손한 엔진과 함께하며 알루미늄 차체의 장점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됐다.

변속기는 ZF제 자동 8단인데, V6 디젤과 하드웨어가 다르다. 적당한 힘을 물리니 킥다운도 한층 매끄럽다. 맹렬한 가속이 없는 대신 전반적 움직임의 밸런스가 도드라졌다. F-페이스의 승차감과 몸놀림은 속도나 조작의 템포가 빠를수록 맛깔스러워졌다. 이날 재규어는 “운전 재미를 위해 높낮이 조절식 에어 서스펜션 대신 쇠 스프링을 고집했다”고 설명했다.

재규어는 경쟁자가 득실대는 레드오션 시장에 늦깎이로 뛰어들었다. 퍼포먼스 크로스오버. 재규어는 처음 만든 SUV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리고 역대 어떤 재규어보다 비율과 안팎 디자인, 소재와 운전 감각에 집착했다. F-페이스와 더불어 재규어가 확실히 커졌다. 덩치뿐 아니라 재미와 쓰임새까지도. 분명히 도박이었는데, 재규어가 사운을 걸고 뛰어들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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