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가란 누구인가. 하필이면 이제 막 첫 소설을 선보이려는 신인 소설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소설을 몰랐다. 하지만 소설을 쓰고 싶었다. 왜, 어떻게, 얼마나 쓰고 싶었는지 풀자면 긴 얘기다. 하지만 어떤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는 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진실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 진실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헤밍웨이에게서 배웠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상권 끝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좋다. 지금 일을 다 끝내면 책을 써야겠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진실한 것만을,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만을 써야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전쟁에서 알게 된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이종인 역)

내가 잘 알고 내게 진짜인 것, 적어도 그렇다고 믿는 걸 쓰기란 무척 어려웠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정말 내가 잘 아는 건지, 진짜인지 모두 의심스러웠고, 또 내가 믿는다 하더라도 읽는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일지 의심스럽고 불안했다. ‘진실’이라는 단어조차 그랬다. 그 단어 마저 미심쩍어 사람들은 ‘실체적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많은 말이 이미 그런 처지였다. 정치는 알력으로, 권위는 강압으로, 순종은 굴종으로, 연대는 야합으로, 문화는 구습과 악습으로, 갑과 을은 계약서상의 쌍방이 아니라 주인과 하인으로, 기업의 정당한 이윤 추구는 소비자 기만과 약탈적 사익 추구로 모두 왜곡해 있고, 그 왜곡이 변형과 팽창을 거듭하다 못해 ‘헬조선’, ‘유슬림’처럼 괴이한 현상을 가리키는 괴이한 말까지 쏟아지는 것이 이른바 내가 쓰려는 현실이었다. 나는 늘 다시 제자리로 돌아 왔다. 문장은커녕 단어조차 자신 있게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시도로 내가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실체적 진실이라는 말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아야 했다. ‘실체적’이라는 관형사구에 힘을 빌려야 한다면, 진실은 이미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며 ‘사실’이라는 말과 구분할 수 없는 말이 된다. 허구적 사실, 실체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허구적 진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명확해 진다. 따라서 나는 ‘진실’이라는 뜻을 오직 진실이라고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했다. 내가 쓰는 모든 단어가 이 같은 필연으로 또렷하고 단단해야 했다. 동시에 단어에 담긴 냉소나 경멸, 근거 없는 애착이나 대책 없는 낙관을 모두 배제해야 했다.

내가 잘 아는 일을, 잘 아는 명확한 단어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자 비로소 문장을 쓸 수 있었다. 막다른 길에 부딪힐 때도 있었지만 내 손에 쥔 단어가 익숙한 연장처럼 확실했으므로 계속 파내려갈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헤밍웨이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그러나 새로 시작한 글이 전혀 진척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중략) ‘걱정하지 마, 넌 전에도 늘 잘 썼으니, 이번에도 잘 쓸 수 있을 거야. 네가 할 일은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중략) 만약 내가 미사여구를 동원해 글을 쓰거나, 어떤 것을 알리거나 소개하려는 사람처럼 쓰기 시작했다면, 그 수사적 표현이나 과장한 문장을 다 지워 버리고, 내가 첫 번째로 쓴 간결하고 진솔하며 사실에 바탕을 둔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다시 썼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 주순애 역) 나는 이 말을 원칙으로 삼았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어렵고, 나는 종종 어기는지조차 모르고 어기지만, 이 원칙 덕분에 보편적 함정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소설 문장을 쓴다면 가장 먼저 의식하는 건 문체다. 나 역시 아름다운 문장, 매력적인 문장, 경쾌하고 산뜻하거나 장중하고 삼엄한 문장, 그런 문장부터 써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사로잡히고 좀처럼 풀려나지 못했다. 하지만 쓰는 사람이 먼저 글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면 문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먼저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가 화음을 맞추는 모습과 소리, 냄새와 맛과 촉감 그리고 의식을 찾아내야 했고, 그것을 옮긴 것이 진실한 문장이며 비로소 소설의 문장이라고 할 만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이것을 알고 난 다음에야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문장이 막히자 일본어만큼 명확하게 이해하는 영어로만 단순하게 쓰기 시작했다는 일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진실한 단어를 찾고 진실한 문장을 쓴다면 이야기 역시 진실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이야기란 무엇일까? 진실한 인간의 이야기다. 기실 모든 인간이 다 진실하지 않은가.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썼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 한다. 어떤 사람은 둔하게, 어떤 사람은 더 가뿐 하게, 모두 능력껏 노력한다. 모든 사람이 출생의 잔재, 태고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죽을 때까지 품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이나 개미로 머무른다. 어떤 이들은 상체는 인간인데 하체는 물고기다. 그러나 모두 인간이 되라고 자연이 내던진 존재다.”(김인순 역).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 종이로 접은 것처럼 납작하고 쌀과 국이 아니라 타인의 살과 피로 연명하는 것 같은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본다. 그런 사람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끔찍한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그걸 볼 때 사람 들은 일단 분노하고 분개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똑같다면, 사람들은 대개 그것에 적응한다. 눈을 감거나 외면하고 급기야 그것이 옳은 것 이라고, 자신이 틀렸다고 단정한다. 물론 녹록지 않은 생활과 낙담, 절망의 괴로움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고, 받아들이면 편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람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복제물을 만들고 그것을 인형이나 노예로 부린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카프카의 소설 < 변신 >에서 제복을 입은 아버지가 이미 보여줬고,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지적한 바로 그 문제다.

진실한 인간은 이미 희귀하고 세상이 자동화, 관료화, 계층화, 집권화될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걸까? 소설의 재료는 사람과 세상이며 그것을 가공해 판매하는 대상 역시 다시 사람과 세상이다. 망치로 때려 납작해진 사람과 세상이 모루로 내리찍어 더 납작해진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 따위를 진정 필요로 할 리 없다. 설령 돈을 주고 사서 읽더 라도 그런 이야기는 한두 번 읽힌 뒤 중고 서점으로 나가거나 한 다발씩 비닐 끈에 묶여 이삿 짐 트럭 뒤에 남을 것이다.

진실한 인간이 희귀할수록 사람들은 진실한 인간의 이야기를 원한다. 진실한 인간만이 오직 인간의 즐거움과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해주고 또 번민과 고통을 나눠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진실한 인간이 어떤 것인지마저 잊어버리기 쉽다. 사람은 눈앞의 것에 현혹되기 마련이며, 생활은 눈 앞의 것들에 급급하고, 더 급급해져야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 점은 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앞선 사람들이 쓴 것을 생각했다. 수십 년, 종종 수백 년이 지나간 지금도 생생한, 나 같고 내가 아는 다른 사람 같은 진실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야기를 통해 진실과 진 실한 것을 현실에서 가려볼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 만화 대신 책을 읽는 것 아닐까? 그리고 나는 거기서 소설가라는 직업의 마땅한 책무를 떠올린다.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 풀베개 >에서 이렇게 썼다. “이 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중략) 옮겨갈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살기 힘든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 짧은 순간만이라도 짧은 목숨이 살기 좋게 해야 한다. 이에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송태욱 역)

신문사에서, 문학상 당선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집까지 걸어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조금 전 내가 한 말이 소설가의 말이라는 말머리를 타고 신문 지면에 나갈 터였다. 내가 무슨 말을 했을까? 그 말은 온당한 거였을까? 좁은 인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지나쳤다. 너무 과민한 걸까. 사람들은 이제 겨우 첫 책을 낸 신인 소설가의 말 따위는 괘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변명이고 도망이다. 신촌 로터리를 지나 얼마쯤 더 걸은 뒤에야 나는 바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 두려움과 무서움을 나는 감당하고 관리해야 한다. 똑바로 마주봐야 한다. 아닌 것을 맞다고 하거나, 비난받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침묵해서는 안 된다. 고작 그런 작가가 쓰는 소설을 나는 읽지 않았고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나는 더 나은 생각을 명석하고 확연하게 해야 하고 그것을 진실하고 정확한 언어로 말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럴 자질이 없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계속 시도해야 한다. 무섭고 두렵겠지만 그것이 도움을 줄 것이다. 내가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첨예하고 판명해져야 하는 거니까.

그렇더라도 나는 결국 실수하고 실패할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부끄럽고 창피하게. 그것 역시 두려움과 무서움처럼 사람다운, 사람의 감정이며 잘못을 잘못으로 인식하고 바로 잡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실은 그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나는 나중에 이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덜 부끄럽고 창피하기를 바란다. 적어도 여기에 쓴 것을 잊고 흐느적거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다만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은 위태롭고 생활은 언제나 그것을 사는 사람보다 강력하고 가혹하니까.

내가 진실한 것을 계속 쓸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진실한 것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며 진실하지 못한 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공평한 일이다. “쓴 만큼 썼을 뿐이고 쓸 수 있을 만큼 쓸 뿐이다.” 나는 그렇게 되뇐다. 내가 쓴 글은 내 것이며, 욕을 듣든 칭찬을 듣든 그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쓰는 것이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으로 쓰는 것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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