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가 품은 4도어 스포츠카의 꿈

페리 포르쉐의 염원이 담긴 차

포르쉐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위대한 엔지니어였다. 나이 스물에 세계 최초로 하이브리드카를 발명했을 정도다. 하지만 경영엔 젬병이었다. 괴팍한 성격 탓에 직장도 여러 번 그만뒀다. 히틀러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 비틀(국민차)을 개발한 주역도 그다. 그러나 히틀러는 비틀 양산을 코앞에 두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었다.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비틀을 밑바탕 삼아 별별 군용차는 물론 탱크까지 개발했다. 결국 그는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 협조 혐의로 프랑스에서 투옥되었다. 아버지가 비범한 재능을 잘못 꽃피워 고초를 겪는 사이, 아들은 오스트리아의 한 오두막집에서 가업을 이었다.

아들인 페리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엔지니어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치시탈리아가 의뢰한 경주차를 개발해 받은 돈으로 보속금을 걸고 아버지를 감옥에서 빼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포르쉐 이름을 건 첫 차 356을 선보였다. 이후 911도 함께 개발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양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스포츠카 회사로서 포르쉐의 기틀은 아들이 다진 셈이다.

앞 엔진, 뒷바퀴 굴림 방식의 928, 엔진을 좌석과 뒤 차축 사이에 얹은 카이맨과 박스터, SUV인 카이엔 모두 페리 포르쉐의 아이디어였다. 외골수 아버지와 달리 페리에겐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물론 모두 성공하진 못했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초, 포르쉐는 절체정멸의 위기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창업주 일가는 경영에서 손을 뗐다.

페리 포르쉐가 꿈꾼 모든 차를 세상에 내놓진 못했다. 그는 늘 4도어 스포츠카에 대한 염원을 갖고 있었다. 포르쉐는 1950년대부터 4도어 세단 개발을 검토했다. 198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구체화시켰다. 그런데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5억 마르크나 쓰고도, 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포르쉐에는 딱 한 대의 신차를 개발할 돈만 남아 있었다.

당시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주인공은 포르쉐의 엔지니어였던 울리히 베츠 박사. 계획이 늦춰지면서 창업주 일가의 원망을 산 그는 결국 사표를 냈다. 이후 그는 지엠대우 연구개발센터를 거쳐 애스턴 마틴 CEO로 옮겼다. 그리고 래피드를 선보였다. 파나메라와 비슷한 구성의 4도어 스포츠카였다. 포르쉐에서 못 이룬 꿈을 애스턴 마틴에서 현실화한 셈이다.

페리가 원했던 4도어 포르쉐는 2002년 카이엔으로 먼저 세상 빛을 봤다. 우려의 시선과 달리 카이엔은 대박을 냈다. 덕분에 포르쉐는 세계 최고의 수익성 뽐내는 제조사로 거듭났다. 여기서 번 돈으로 2009년 페리의 꿈을 이뤘다. 바로 파나메라였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페리 역시 그토록 꿈꿨던 드림카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98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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