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와 가을꽃

가을하늘 공활한데 백자가 비었거든 가을꽃 몇 송이 담을 일이다.

비교하자면 이러하다. 봄꽃은 유난히 탐스런 놈을 한 가지 뚝 분질러 꽂으면 자기가 무슨 폭죽이나 되는 줄 알고 타오르기부터 한다. 그러다 시들 때는 또 얼마나 거창하든지, 사방팔방 ‘나는 간다’ 꽃잎의 무덤을 만들고야 만다. 진달래가 그렇고, 벚꽃이 그렇고, 목련이 그렇다. 여름꽃은 맑다. 새벽의 수련을 떠올리건대, 여름꽃은 저 혼자 피었다가 저 혼자 시들기를 도모하는지도 모른다. 여름꽃은 청초하다. 그런가 하면 배롱나무꽃은 여름과 가을을 이어준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마당에 백일이나 피고 지길 반복하니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대목은 느리고 긴 노래를 듣는 것과 같다. 가을꽃은 힘이 없다. 금방이라도 허리가 부러질 듯한 코스모스가 상징하는 바, 가을꽃은 제아무리 무리지어 피었어도 귀뚜라미 한 마리의 청승을 넘어서지 못한다. 백자는 사철 발 벗고 꽃을 안아준다. 특히 가을꽃에게 부드럽고 온화한 인정을 베푸니, 백자에 꽂은 가을꽃은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지친 사람을 떠올리게 만든다. 서울에서 눈 씻듯 고를 수 있는 백자로는 성북동 우일요에 있는 토전 김익영 선생의 작품이 으뜸이다. 고요하고 단아한 멋이 곧은 선비가 쓴 글 같다. 또한 서양의 백자에는 여유롭고 세련된 분위기가 있다. KPM 베를린의 흰색 꽃병 시리즈는 그대로 20세기의 역사다. 한편 젊은 작가 이명진이 만든 백자 화병을 보면서 마음을 다듬기도 한다. 네모지게 틀을 짜고는 한 면을 무너지는 것처럼 만들었는데, 정성과 참신함이 조화롭게 여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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