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에 배타적인 도시, 서울

2016년, 서울에서 내 나이로 산다는 것, 도시를 관찰하지만 발붙이지 않는 40대, 미로 속에 빠진 듯한 30대, 밥벌이를 고민하는 20대. 개인이 쌓고 제각각 흡수한 서울의 시간에 대하여.

정준화 41세, 칼럼니스트

서울의 어디에 사나? 북촌, 좀 더 정확히 짚자면 원서동. 애타게 발품을 팔다가 운명처럼 적절한 가격의 전셋집을 발견했다. 서울 안에서 아직은 동네 같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밤 10시가 넘어가면 술 한잔 할 가게를 찾기가 힘들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인가? 우리 집 침실밖에 생각이 안 난다. 휴가 첫날의 비가 쏟아지는 아침이면 특히 좋을 것 같다. 이곳과 가장 달라 보인 세계의 도시는 어디인가? 하와이의 호놀룰루. 머무는 동안 경적 울리는 차를 한 대도 못 봤다. 매일 이런 날씨와 풍경을 접하면서 지내면 삶의 태도가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회사 동료들을 제외한다면 포스터 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 C. 만나면 뭐든 계속해서 먹는다. 여기가 견딜 수 없이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위악적인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 들 때, 상식이 상식 대접을 못 받는 경우가 잦게 느껴질 때. 서울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무엇’을 꼽는다면? 결혼. 그렇다면 가장 과소평가된 것은? 서점의 가치. 비슷한 규모의 도시 가운데 서울만큼 서점 찾기가 힘든 곳도 드물 거다.

나와 서울의 관계는 무미건조하게 실용적인 부부 사이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 진학 이후로는 줄곧 이 도시에서 생활했으니 벌써 20여 년째 함께 부대끼며 지내는 셈이다. 특별한 애정은 없으나 이미 지금의 환경에 익숙해 져버렸고 이제 와서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좀비 떼의 습격을 받거나 브란젤리나 커플에게 입양되지 않는 한은 계속해서 서울과 섹스리스 커플처럼 살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지금껏 그래왔듯 서로에 대한 사소하면서도 확실한 불만들은 차곡차곡 쌓여갈 테지만 말이다. 서울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는 어떤 구성원일까? 출산율 상승에 기여할 생각이 전혀 없는 40대 독거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분리수거 대상이 됐을지 모른다. 물론 나 역시 이 도시에서 트집 잡고 싶은 구석이 한 다스쯤은 된다. 꾸준히, 그리고 빠르게 오염되고 있는 일상어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기억대로라면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과서는 표준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 이 문구를 뒤집고 비약하면서 멋대로 내린 결론은, 서울에서 교양이 점점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 저지르는 맞춤법 오류들은 어느덧 흔한 공해가 됐다. 해당 사례를 접할 때마다 지하철 안에서 낯선 사람의 뒤집힌 목깃을 발견한 것처럼 간질간질한 고통을 느낀다. 돈을 받고 글을 쓰면서 얻은 직업병적인 호들갑일텐데, ‘사겼다’ 혹은 ‘바꼈다’라는 어절이 포함된 문장을 SNS에서 목격하면 문득 10만원 이하의 벌금을 매기고 싶어진다.(이 잡지를 읽는 독자들은 익히 알고 있겠지만 ‘사귀었다’와 ‘바뀌었다’가 맞는 표기다.) ‘낫다’와 ‘낳다’ 사이에서 갈등하다 감기에 걸린 아이돌에게 수태 고지를 해버리는(“오빠, 빨리 낳으세요!”) 팬들 역시 전혀 줄어들 기세가 아니다. 볼 때마다 영겁의 데자뷔를 경험한다.

그런데 정말 곤란한 경우들은 따로 있다. 얼마 전에는 거실 바닥에 들러붙은 채로 스마트폰을 뒤적이다가 또 한 편의 일본 TV 드라마 리메이크 프로젝트가 방영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눈길을 끈 건 줄거리나 캐스팅이 아니었다. 나는 <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라는 제목 앞에서 빨간 펜을 씹으면서 잠시 괴로워했다. 일단은 가제라고 하니 누구든 나서서 ‘핍니다’를 ‘피웁니다’라고 교정해줄 거란 희망을 아직 버리고 싶지 않다. 그게 어렵다면 아내의 불륜 상대라도 부디 지금의 남편보다는 맞춤법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영화, 드라마 혹은 노래의 제목은 고유명사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다. 한번 정해지면 이후부터는 어쩔 수 없이 최초의 표기를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대.다.나.다.너’라든가 ‘오늘 모해’ 따위의 곡명은 철자가 틀린 문신만큼이나 난처하다. 때로는 실수고 가끔은 의도일 테지만 두고 보기 언짢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맞춤법 오류 자체보다 더 거슬리는 건 그 아래 깔려 있는 무신경함이다. 최소한의 규칙조차 무시하면서 그걸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바로잡으려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이는 눈치들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주위의 말들은 조금씩, 하지만 뚜렷하게 못생겨 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망가진 맞춤법은 기껏해야 눈에 거슬리는 흠집 이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단어의 오용에 대해서는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난데없는 오류들이 원래의 맥락을 씹어먹고 버젓이 통용되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이를테면 ‘중2병’의 예처럼 말이다. 나잇값 못하는 성인의 미숙함을 비꼬는 데 사용됐던 용어가 난데없이 실제 중학교 2학년생들을 겨냥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청소년들은 졸지에 집단 불안증 환자 취급을 받게 됐다. 문용린 전 교육감이 중2병 치료의 일환이라며 중2들을 난지공원에 집합시켜놓고 마라톤 행사를 벌인 사건은 < 시계태엽 오렌지 >의 10대 시트콤 버전 리메이크 같았다. 주워들은 단어를 엉뚱하게 사용한 일부 어른에게 면박을 주는 정도로 마무리되는 게 당연한 결말이었겠으나, 뜻밖에도 언론은 잘못된 용례를 고스란히 받아 읊고 확산시켰다.

최근 들어서는 미디어들이 ‘아재’의 오역을 전도하는 데 일제히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재란 ‘꼰대’와는 구별되는 매력적인 중년 남성이며, 현재 아재 개그는 가장 각광받는 유행 코드다. 물론 젊은 여성들도 아재 파탈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라고 한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떠돌게 된 배경에는 각종 언론사의 아이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게 대부분 아재들이라는 후덥지근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다들 설날 풍등에 써서 날려야 할 소원을 지면 기사나 방송 원고에 대신 적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집요하게 재생산되는 오보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집단이 중년 남성들이라는 점도 크게 놀랍지는 않다. 몇 개월 전 터진 중견 감독과 젊은 배우 사이의 스캔들에 대해 굳이 보태고 싶은 말은 없다. 하지만 그 무렵 충무로의 어느 식당에서 이 화제를 들추면서 “요즘의 20~30대 여성은 한참 터울이 지는 연상을 선호하는 것 같다”는 둥,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푸짐하게 저지르던 아저씨들을 목격했을 때는 잔잔한 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중년 남성들이 어느 정도의, 최소한의 자기객관화만 거쳤더라도 ‘아재’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오용되거나 남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아재 열풍’은 그 자체로 대단히 아재다운 현상이다. 40대 초반의 아저씨로서 약간의 동족혐오를 담아 이야기하자면, 이 무리의 자기애는 거의 경이롭기까지 하다. 거슬리는 반론에는 편리하게 귀를 닫고 솔깃하게 예외적인 사례에 보편적으로 감정 이입을 한다. 하지만 성별과 나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정우성이나 이정재에게 묻어가려 하는 건 좀 염치 없는 일 아닐까? 물론 얼마 전 사무실 화분 두 개를 연쇄 살해했다는 브래드 피트의 인터뷰를 읽은 뒤, 멋대로 친밀감을 느꼈던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쯤에서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 같긴 하다만….

중2병과 아재를 비롯한 이런저런 단어들의 의미가 변질되고 유통되는 과정은 은근히 폭력적이다. 기성세대와 기득권의 편의만을 일방적으로 고려한 변용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맥락은 뿌리째 잘려나가고 의사소통은 당연히 혼란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엇비슷한 일이 왕왕 생기는 건 애초부터 오용의 주동자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데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는 바만 반복해서 강조할 뿐 타당한 입장을 가진 다른 목소리는 귓등으로 흘린다. 한마디로 학습에 심하게 인색하다. 학습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확성기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지금의 서울, 그리고 한국의 성가신 비극일 것이다. 덕분에 멍청한 말들이 필요 이상으로 크고 선명하게 퍼져나간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을 남성에 대한 역차별과 연결짓는 한심한 궤변에는 마이크보다 음소거 버튼이 적절하다.

맞춤법에 대한 잡담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거창하고 산만하게 옆길로 마구 새버렸는데, 이제 슬슬 수습을 해봐야겠다. 그러니까 나의 결론은, 언어에 대해서든 그 외의 문제에 대해서든 쉽게 무신경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현재의 서울은 예민함에 지나치게 배타적인 도시다. 맞춤법을 지적하면 유난스럽다 여기고, 무례한 농담에 시큰둥해하면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며 타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얼룩들을 묵인하기 시작하면 일상과 그 주변의 풍경은 점차 지저분하고 후져지지 않을까? 서울 혹은 한국의 40대 남성이란 프로필은 게으르고 후지게 살면서도 그런 사실을 모른 척하기에는 썩 유리한 조건이다. 나의 소박한 바람은, 적어도 나한테 어떤 얼룩이 얼마나 크게 묻어 있는지는 알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머쓱하지만 동료 ‘아재’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하면서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우선 그 신입 여직원은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아무리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도 두 번 세 번씩 반복하지는 말자. 그리고 웬만하면 맞춤법쯤은 지키는 게 좋겠다. 남들 눈에는 그게 본인 생각만큼 귀여운 실수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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