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이 뽑은 영화 속 자동차 10

1955년 9월 30일 오후 5시 15분 U.S. 루트 466에서 완전히 찌그러진 한 대의 포르쉐. 마치 상징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라도 하듯 포르쉐는 포드 자동차의 끼어들기를 피하려다가 그냥 들이받았다. 그 자동차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제임스 딘이었다. 현장에서 다른 자동차를 운전한 간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맥박은 약하게 뛰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 상태였다. 나는 이야기를 여기서 시작하고 싶다.

먼저 제임스 딘이 자동차 경기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주기 바란다. 낯선 고등학교로 전학한 짐(제임스 딘)은 첫날부터 술에 취해 경찰서 신세를 진다. < 이유 없는 반항 >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학교 패거리를 이끄는 버즈는 시비를 걸 목적으로 누가 절벽 끝까지 차를 몰고 간 다음 나중에 내리는지를 놓고 겨뤄보자고 제안한다. 이때 니콜라스 레이는 가로가 긴 2.35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자동차에 올라탄 제임스 딘을 보여준다. 자동차를 찍기에 이보다 근사한 사이즈가 있을까. 알 수 없는 허무함. 승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속도에 자기를 내맡길 준비가 된 사람의 텅 빈 얼굴, 나는 영화 사상 모든 배우 중에서 제임스 딘만큼 자동차와 혼연일체가 된 표정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 두 대의 자동차가 있다면 이번에는 귀신에게 홀린 여자 매들린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따라 그녀 몰래 미행하는 탐정 스캇티의 자동차가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샌프란시스코를 마치 세트장처럼 사용하면서 < 현기증 >을 찍었다. 종종 스크린 프로세스를 사용하긴 했지만 언덕길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문득 가로세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커브를 틀 때도 히치콕은 결코 앞에 가는 차를 놓치지 않는다. 이때 자동차는 달려간다기보다는 거의 미끄러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 다른 두 대의 자동차라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첫 번째 영화 < 대결 >이 있다. 고속도로에서 단지 자기를 추월했다는 이유만으로 괴물 같은 대형 화물 트럭은 작은 구형 포드 자동차를 몰고 가는 데이비드를 살인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드라마도 없고 주제 따위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오직 두 개의 속도만으로 찍은 이 영화는 무심코 보던 당신을 기어코 일으켜 앉힐 것이다.

만일 속도만 가지고 말한다면 리처드 C. 사라피안의 < 배니싱 포인트 >가 ‘죽여준다’. 주인공 코월스키는 ‘지옥의 천사’라는 바에서 덴버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닷지챌린저를 몰고 15시간 안에 주파할 수 있느냐는 내기를 한다. (감이 잘 안 오면 지도를 확인해주기 바란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코월스키는 이 무의미한 내기에 모든 걸 건다. 컴퓨터 그래픽 따위의 도움을 빌릴 수 없었던 1972년에 이 영화는 ‘진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실감이 화면을 압도한다. 여기서 그림으로 떡칠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 따위는 비교하지 말아주었으면 고맙겠다. 만일 21세기 버전이 필요하다면 말할 것도 없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 데쓰 프루프 >가 역시 만족스럽다. 거의 공포영화에 가까운 역겹기 짝이 없는 1부가 끝나고 나면 짝을 이루듯 통쾌한 2부가 기다린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오마주를 바치는 명단에 < 배니싱 포인트 >를 포함시켰다. 역시 엄지 척!

이번에는 정반대를 선택할 작정이다. 만일 약간만 관대함을 베풀어준다면 여기에 데이비드 린치의 가장 이상한 영화 < 스트레이트 스토리 >를 포함시키고 싶다. 73살의 앨빈 스트레이트는 오랫 동안 불화 상태로 지낸 형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러 갈 결심을 한다. 운전면허도 없고 고속버스를 타는 것도 원치 않은 이 고집불통의 노인은 잔디 깎는 트랙터를 개조한 일종의 경운기를 타고 6주에 걸쳐 형을 만나러 간다. 기괴한 영화만 찍은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사건도 없이 그냥 묵묵하게 오직 트랙터를 몰고 가는 노인 앨빈의 여정만을 찍는다. 린치의 간단한 대답. “순수함이야말로 가장 부조리한 것이죠.”

자동차가 세계라고 믿는 두 명의 감독이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 10 >에서 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다음 테헤란 시내를 떠돌면서 그녀의 자동차에 올라탄 사람들과의 대화만으로 이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빔 벤더스는 < 길의 왕 >에서 (아직 분단이었던 시절) 서독의 국경을 따라 이동하면서 영화를 상영하는 영사기사의 여행길을 따라간다. 벤더스는 두 개의 유럽을 가로지르는 정치적 경계선을 따라가면서 세상의 끝에 와 있는 것만 기분을 느낀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자동차는 세계를 연결하는 하나의 선처럼 활동한다.

하지만 자동차가 주인공인 영화의 끝판왕은 나에게 단 일 초도 망설일 필요 없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 크래쉬 >다. 영화화가 사실상 불가능한 J G 발라드의 소설을 기어이 영화로 옮긴 < 크래쉬 >는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가 충돌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정신병자들의 이야기이다. 자동차라는 물신과 속도의 에로티즘 속에서 자기 육체 안에 금속이 파고드는 순간 오르가슴을 느끼는 이 이상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타나토스와 리비도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놓은 것이다. 이보다 더 섹시한 자동차 영화가 가능할까?

이 마약 같은 영화에 유일한 해독제로 장-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이에의 < 역사수업 >을 마지막으로 선택한다. 로마 시내를 맴돌면서 브레히트의 대사를 낭송하는 이 영화는 시작하고 거의 40분 동안 자동차 안에서만 진행된다. 출발은 크로넨버그와 같다. 자동차라는 물신. 하지만 스트로브와 위이에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속도라는 환각이라고 통렬하게 냉소적으로 비웃는다. 사실 이 영화는 정반대의 의미로 무시무시하다.

아직 할 말이 산더미지만 벌써 마지막 문장을 써야 한다.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다. 장-뤽 고다르는 간단하게 말했다. “영화는 한 자루의 권총과 여자면 충분하다.” 아마 고다르는 이때 자동차를 깜빡 잊은 것 같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네 멋대로 해라>의 첫 5분을 보아주기 바란다. 어쩌면 이미 말한 영화 열 편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