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낙천주의 연구

 

마음이 소액 대출 창구에서 거절 당한 것처럼 춥고, 생활은 하루도 나를 속이지 않은 날이 없고, 만사가 사후 경직처럼 뻣뻣해 인간이 되는 것조차 무서울 때, 사람들은 내일 혜성이 지구를 박살 내도 유실수를 심자던 스피노자의 태평한 금언을 빌린다. 핵의 대학살 순간에 들국화 꽃잎을 세는 여자아이 모습도 그린다. 그 철 지난 음풍농월들을. 조금만 참으면 이런 일쯤 금방 지나갈 거라던 솔로몬의 속삭임도, 가장 위대한 선은 타인의 행복이라던 프란시스 허치슨의 예쁜 말도 다 성가실 뿐이다.

이번 겨울은 평생 가장 길고 추웠다. 뼛속까지 빙점이었다. 오늘, 젖은 담요처럼 하늘을 덮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음습한 추위도 걷히고 청라 언덕 위에 햇빛 비치는 봄이 간신히 왔는데, 마음은 화창해지지 않는다. 조명 박스에 끼워진 엑스레이 필름을 보는 이런 기분은 무엇일까? 몸통을 통과한 저 희미한 음영은 뭐지? 검은색과 흰색 중 어느 것이 더 불길하다는 얘기야? 이런 쇠락한 감정에는 마법 같은 특징이 있다. 되돌아 갈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뭔가 돌보려 한다는.

역사는 간략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이성을 지키기 위해 이성을 버린다. 그런데도 스스로 이성적인 동물이라 우기는 이들의 대문 앞에서 매일 비웃어주고 싶지만 나는 마감도 해야 하고 바쁘다.

신경과학이며 사회과학은 사람들이 현실보다 낙관적이라고 밝힌다. 공부 안 하고도 시험 잘 보고, 문자 하나로 마음을 얻고, 본 보인 것 없이 아이가 분별 있기를 바라고, 시든 재료 써놓고 최고로 맛있다고 윽박지르는 건 우리의 일상이며 이상. 일주일에 낮술 포함 여덟 번 술을 마시고, 좋아하는 음식은 글루텐 범벅, 운동이라곤 숨만 쉬어온 내장 비만의 황제가, 평균 수명보다 30년 더 살 거라고 눈 부릅뜨는 것도 이해는 돼. 이해하긴 싫지만. 적도에서 선크림을 안 바른다거나, 위를 4분의 3이나 잘라냈는데도 폭식 습관을 못 버린다거나, 5년 부은 적금을 깨 개미 투자 승부사가 되는 걸 보면 불안한 낙천성이 명랑한 모습 뒤에 숨겨진 반응을 얼마나 질펀하게 드러내는지 알겠다. 실은 뭐에 홀려서, 타고나길 그래서, 어디서 본드를 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 한쪽 다리를 잘랐지만 죄책감 없이 종일 TV를 봐서 너무 좋다는 후배를 보면 진짜 꼬리 달린 세포 핵에 숨겨진 마법사의 돌이 미래의 황금 광산으로 저 아이를 데려가는 것 아니야? 상을 주려고? 싶다. 아님 단순히 뇌의 깊은 곳 피질하부의 조작질? 아무튼 낙관 속에서 놀라운 탄성을 자랑하며 어떤 경우에도 나쁜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가히 현대의 참 스승 같다. 의식의 혁명에 이렇게 기름을 퍼붓다니.

그런데 정작 내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비관적이다. 웃을 때도 씀바귀 씹는 것 같다. 호환, 마마를 찜 쪄 먹을 뉴스들만 창궐하니 그동안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희망의 나라가 어디 있었겠어? 물론 약간의 우울증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미래도 허장성세 없이 예측하게 만든다. 비현실적이도록 활짝 핀 성격을 관리하는 신경 메커니즘이 없다면 인간은 맨날 미간에 온천 마크를 그리며 살았겠지. 낙천주의의 진실은 태어날 때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상들은 절대 모험을 안 했을 테고, 멀리 떨어진 부족들을 찾지도 않았을 거고, 추운 동굴에서 체온으로 부대끼며 사느라 벽화 그릴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기분이 나쁠 땐 얼른 기분 좋은 생각을 꺼낸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같은. 와인 몇 잔 천천히 원샷 하고 나면 착륙 멘트가 들리고, 기장과 스튜어디스에게 무사히 태워줘서 고맙단 미소를 날린다. 고주파 음을 내는 아기도, 만취해 흰 눈자위 까뒤집는 엑소시스트 승객이 없어서 더 좋았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신경 세포는 워낙 재미있는 추억을 개인사의 상점에 예쁘게 진열하도록 설계된 탓에 나쁜 정보를 일일이 새기지 않는다. 부자의 성공담을 들으면 그자처럼 갑부가 될 날이 와줄 것도 같지만, 송사 이야기를 듣는다고 내 결혼도 파탄 나겠지, 그러나?

기억이 늘 생생할 리는 없다. 옛날 일을 재생하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퍼즐들이 재조립되는 동안 세세한 정보는 지워지고 해괴한 상념들이 주입되기도 한다. 기억의 핵심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비해 미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 확실히 낙천주의는 인간이 가진 가장 비정상적인 재능이다. 예전 일을 관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예견하며 시간의 앞뒤, 공간의 좌우로 움직이는 건 장구벌레보다 복 받은 능력일 텐데, 그건 재난 영화에서 끝까지 남는 사람들의 생존 기술이기도 하다. 태평한 상상력이 진화 과정 중 선별된 건 그래서일 것이다. 오늘 나의 행동이 다음 세대에 끼칠 영향을 헤아리는 것이 사회 속 나의 영향력으론 거창하게 들리지만, 100년 뒤의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구 온난화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 지금 건강을 외칠 필요도 아이를 가질 명분도 없다. 어쨌든 미래를 보는 능력은 어차피 할아버지 신 내림을 받아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해마가 담당하기 때문인걸.

결정을 내린 뒤엔 갑자기 판이 달라진다. 여태껏 내린 판단 중 제일 괜찮아 보이고 다른 옵션은 괜히 별로 같다. 꼬리 달린 신경 세포가 기대치를 신호화하고 계속 추적해 보상 과정을 처리하다 보면 가치가 점점 확장되다 결국 마음의 보상으로 돌아오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맨날 두 번째 선택이라는 의혹만으로 빽빽해질 것이다.

나는 몇 년 전 크게 아파서 후유증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내가 얻은 건 뭐지? 세상이 아름답다는 황홀한 자각?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는 차분한 결의? 아니, 아무것도. 솔직히 더 잘생겨 보일 때는 있었지만, 병원 침대에서 살이 빠져 윤곽이 뚜렷했을 때 얘기고, 지금은 다시 투포환 선수로 돌아왔다. 하지만 공자님도 부처님도 일이 꼬이다 보면 종국엔 이 불행이 축복의 가면이라고 합리화할 근거를 찾을 것이다. 누구도 태생부터 지닌 성향을 이해하도록 태어나진 않았으니 허리 아픈 그 후배처럼 속 편하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 허리에 철심 박은 철인 28호로 둔갑할지 모르지. 아무도 못 건드리게.

희망의 업적은 경험을 이긴다. 세상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모태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없었잖아. 윤리적 자양분을 모두 낭비한 사회가 익사 직전에 숨을 몰아쉬게 된 봄날, 그동안 증언하지 않던 시절을 살게되었다. 서재 창문 밖으로 나의 꿈, 나의 달, 나의 봄꽃 가지가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