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남자, 안동 여자

안동은 자칭 ‘한국 정신 문화의 수도’다.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이천리

확실히 상놈 소리는 많이 들어봤다. “글마 그거 완전 상놈 아이라?”라거나 “어데 근본 없는 돌상놈도 아니고” 같은 소리. 서울에서 안동 출신이라고 하면 양반 도시에서 오셨다는 말부터 들었는데, 정작 안동에서 양반이라는 말이 드물게 쓰였다. 내가 양반 가문 출신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기도, 더 이상하기도 했다.

선거철이면 어른들은 성씨와 문중부터 살피고 그 다음에는 서울에서, 정서적으로는 한양이라는 말이 더 가까울 텐데, 어떤 고위 관직을 지냈는지 봤다. 실례로 안동시장과 국회의원, 시의원은 문중세가 강한 안동 김씨, 안동 권씨에서 거의 다 나온다. 어른과 정치인의 소견과 철학을 두고 논쟁하는 일은 없었다. 반박이라도 하려 들면 입만 살아 나댄다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상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존경은 부당한 권위라도 복속하는 것이었고, 의리는 그 권위를 둘러싼 무리에서 비껴서거나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들에 상처 입고 좌절당하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감내하는 것은 남자다운 것이었다. 존경과 의리를 알고 남자다운 남자는 점잖다, 사람 참 양반이라는 평을 들었다. 안동은 정말 ‘대단한’ 곳이었다.

점잖은, 양반인 남편과 점잖게, 양반으로 키워야 하는 아들 사이에 아마 안동의 어머니들이 있을 것이다. 자식에게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훈육하는 한편 살림은 지혜롭고 알뜰하게 도맡아 살고 남편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 현명하게 내조하는, 이른바 현모양처다.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은 정부인 안동 장씨일 것이다. 예컨대 안동의 명소인 안동댐에 가면 정부인 안동 장씨 동상도 있고 그 부인에 관해 부정적으로 유명한 소설, <선택>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안동에서 그 책의 정부인 안동 장씨는 극히 당연하고 익숙한 여성상이었다. 여성은 양반이나 상놈이라는 품평에도 끼지 못하는, 오로지 어머니라는 기능으로만 사회에서 고정당하고 존재당했지만 남성뿐 아니라 여성조차도 그것을 딸과 며느리에게 재학습시킬 만큼 당연스럽게 여겼다.

얼마 전 어머니가 잘 아시는 분 얘기를 들었다. 안동에서 흔한 종부였고 그 며느리 역시 종부였다. 일 년 제사를 줄이고 줄였다는 것이 스무 번 가까이 되는데, 그때마다 서울 사는 종부 며느리가 내려와 제사상을 차린다. 마침 시어머니께서 병환에 걸려 몸져누워 근 한 달 가까이 내려와 간병도 했다. 종부 며느리는 안동사람이라 힘들다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들은 얘기로 지방에서 올라와 있는 사촌 형제들까지 집으로 불러 밥을 해 먹이고 반찬까지 싸줘 들려보낸다고 한다. 안동에서 그 정도는 미담 축에도 끼지 않아 그 말을 옮기는 어머니는 그저 당연한 종부 노릇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것까지도 괜찮았다. 종손이라는, 그 종부 며느리의 남편이 사단을 냈다. 아내가 내려가 시어머니 간병을 하고 있는 사이 회사에서 바람이 났다. 나중에 그것을 안 종부며느리는 이후 1년째 시집에 전혀 내려오지 않고 있었는데 어머니 말씀이 대단했다. “아무리 그래도, 집안일이고 조상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말이야. 그리고 사내가 사회생활 하다 보면 잠깐 한눈팔 수도 있지, 그런 거 한번 안 겪어본 사람 어디 있다고 저 혼자 시댁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응?” 자신 역시 그런 며느리 맞아들일까 두렵다고 한마디 덧붙이고 싶으셨을 텐데, 내가 자꾸 그러면 아들 장가 못 간다고 말한 탓인지 그 말까지는 안 하셨다. 그렇더라도 나는 여전히 장가를 못 가고 있지만. 지난달에 내려갔을 때는 남자가 버스터미널에서 아기를 아기띠로 싸서 안은 채 인터뷰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어머니는 그걸 보고도 한 말씀 하셨다. “난 정말 저건 못 봐주겠더라. 애 엄마는 어디 가고 남자가 저러고 있어.”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엄마, 지금 그런 말이 나오우? 매일 이 층으로 출근해 애 봐주느라 눈 밑이 새까맣고 쪼글쪼글해져서는, 전화할 때마다 요 몇 달 사이 바짝 늙은 것 같다 그러시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시우?” 3개월 조금 덜 된 손주를 안고 어르던 어머니는 그제야 배시시 웃었다. 나는 영영 장가를 못 갈 것 같다. 운 좋게 장가를 간 형은 퇴근하고 피곤하다는 어머니 걱정 덕분에 방에서 <카운터 스트라이크>나 하고 있었지만.

가톨릭대학교 이영자 교수는 <선택>에 관해 “페미니즘이냐 반페미니즘이냐 논할 가치도 없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돼 있는 작품”이라 평했는데, 적어도 내가 보고 자란 안동 사회에도 정확히 적용할 수 있는 평이다. 그것은 2003년쯤 서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지붕 없는 곳에서 여자가 담배 피울 권리를 달라고 신촌 행진을 할 즈음, 바로 옆 내가 다니던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건물 앞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얼마 전 건물 앞에서 여자 학우가 담배를 피우다 남자 학우에게 맞았는데 그것에 관한 찬반 양론이었다. 더군다나 남자들끼리는 옆차기를 당했다, 아니다 이단옆차기였다, 이단옆차기는 좀 심하고 옆차기면 괜찮지 않냐, 다 아니고 뺨 한 대 갈긴 거라니 그 정도는 할 만하다, 그런 얘기까지 돌았다. 과연, 안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할 만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안동이 대표하는 유교문화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안동 사람으로서, 좀 억울하다. 유교에서 한발 더 나아간, ‘유슬림’이라는 신조어가 명확히 드러내듯, 권위에 복종하고 약자를 배제하고 세력의 면적과 강성으로 옳고 그름을 나누며 그런 것을 윤리나 도리로 내재화하는 일은 역사와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하게 벌어진다. 중세시대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2차 대전 시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전체주의, 현대의 각종 사교와 IS 같은 무장단체를 비롯해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요약하자면 힘과 힘에 대한 숭배와 복종, 즉 미개와 야만이 문화라는 양털을 덮어쓸 때 항상 일어난다. 그 결과는 항상 약자에 대한 핍박과 유린, 동정과 연민이나 수치심이나 개인적 자존감 같은 근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의 학살과 말살로 이어진다. 개개인과 사회, 윤리와 가치가 모두 뒤틀리기 때문에 논리적 설득, 상식적 이해는 통하지 않는다. 사회와 구성원은 신앙공동체와 신자 관계를 형성해 ‘대단한’ 짓을 전혀 대단하지 않게 저지른다. 보수적 가치, 역사와 전통을 수호한다는 명분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그런 것과 단절하고 절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사례가 있다. 한국 유학의 시조인 퇴계 선생은 기대승과 사단칠정론을 논한 편지에서 유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유학儒學, 도학道學이라고 말하며 자신 역시 유자儒者라고 칭한다. 13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에서 허투루 쓰거나 짓눌러주겠다고 쓴 문장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모든 문장에 공들인 경청과 치밀한 논박, 인간미라는 말이 과장스럽지 않은 예의와 사려가 있다. 처음 서신을 주고받을 당시 선생은 선조 임금의 스승이자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기대승은 갓 대과에 급제해 홍패를 쥔, 스물여섯 살이나 어린 학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유학과 유교 사이에 생긴 단절과 뒤틀림의 연원을 찾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시대적 배경과 사회 분위기, 개인의 욕망과 이해 관계 여러 가지가 다 섞이고 얽혀 있어 큰 줄기를 잡기 어려운 데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다. 과거는 깨진 거울처럼 우리를 되비추는 것이어서 그 안에서만 길을 찾으려고 하면 늘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단절과 뒤틀림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는 일이며, 무엇이 단절돼 있고 어떻게 뒤틀려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이다. 기실 더 크고 시급한 문제는 단절과 뒤틀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퇴계 선생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선생에 관한 여러 야사 중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첫 부인과 사별 후 예안으로 귀양 와있있던 권질의 부탁에 따라 그의 딸, 일족의 몰살 때문에 정신 질환이 있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들인 것이다. 하루는 정신없는 권씨 부인이 문상할 때 입는 선생의 흰 도포 헤진 곳에 붉은 천을 덧대 기웠다. 하지만 선생은 아무 말 없이 그 도포를 입고 상가에 갔고, 그곳에서 그런 예법이 있냐는 질문을 들어도 웃기만 했다. 어느 날은 권씨 부인이 제사상의 배를 집어 치마 속에 숨겼다. 그것을 안 형수가 부인을 질책하자 퇴계 선생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은 맞으나 조상님들은 후손을 귀엽게 여기시기 마련이니 손자며느리 행동도 노엽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라며 감쌌다. 제사가 끝나고 나서는 부인에게 연유를 물었고 부인이 배가 몹시 고파 그랬다고 하자 선생은 손수 배를 깎아주었다. 맏며느리를 맞아들이면서는 혼수도 성치 않았고 사돈댁에 상객上客으로 찾아가서 터무니없는 냉대까지 받고 돌아왔지만 발끈하는 문중 사람을 오히려 타이르며 중간에 끼인 신세인 며느리를 감쌌다. 조정에서는 자신 때문에 젊고 유능한 사람이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을 우려해 관직을 받을 때마다 병을 핑계삼아 도산으로 내려왔다. 퇴계라는 호가 퇴거계상退居溪上, 물러나 시냇물 위에 머무른다는 말을 줄인 것이다. 대학자로서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이다. 천하의 의리에 끝이 없는데, 어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했다. 죽기 나흘 전 제자들에게는 “내 평소 잘못된 소견을 갖고 제군들과 종일 강론하였는데,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퇴계 선생은 예법이나 경서, 문중이나 조정에, 이를테면 죽은 말과 산 권세에 붙들리지 않았다. 이치를 논하면서도 사람의 감정을 멸시하지 않았고 그것을 소중히, 왜곡 없이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갖 명분으로 휘두를 수 있는 예라는 것 역시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수단으로만 논했고 행했다. 선생은 자유로웠고 아주 사람다웠으며 늘 그 사람다움을 가르쳤고 지키려 애썼다. 그것에 관해 어렵다고,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하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았다. 대학자이자 대교사, 조정의 고위 관리, 유교 사회의 남편, 시아버지, 아버지까지 우월하고 편리한 지위가 많이 있었지만 선생은 사람이기를 택했고 사람으로 남았다. 그 선택은 안동에 누적되고 만연한 단절과 뒤틀림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자 그것을 회복하고 해소할 수 있는 단초다. 또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별칭이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안동에서 어떤 선택을 말한다면 정부인 안동 장씨의 선택이 아니라 퇴계 선생의 선택을 얘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안동 사람다운 것, 점잖고 양반다운 것일 테니까. 백성 민자를 쓰는 국민이 지금 본래 뜻을 회복했듯, 양반도 상놈 위의 계층이 아니라 문명화한 시민이라는 뜻을 회복시켜 쓴다면 말이다.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다. 고향과 여행지, 이제 막 다다른 곳과 언젠가 떠나온 곳, 잘 아는 동네와 두 번 다시 찾지 않은 고장. 우리는 거기서 겪은 시간으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말들을 부려놓는다. 제주를, 송파를, 안동을, 충남을, 남원과 철원과 분당을… 여행자이자 관찰자이자 고향사람이자 외지인으로서 각각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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