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 우먼> vs <악녀>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한 여성들이 6월 극장가를 점령했다. <원더 우먼>이 개봉 9일 차 약 160만 관객을 동원한 가운데, 8일 개봉한 <악녀>가 일일 박스오피스 2위로 올라섰다. 액션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녀들이 맞붙은 결과는 어떻게 될까.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참패로 혹평 세례를 받아온 DC의 유일한 구세주이자 역대 여성 감독 최고의 스코어를 갱신 중인 <원더 우먼>, 그리고 남성 위주의 척박한 한국영화산업 현실에서 탄생해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까지 초청된 <악녀>. 두 여성 영화의 전력을 비교 분석해보자.

#무기
갓킬러, 승리의 팔찌, 진실의 올가미 vs 장검, 단도, 도끼, 라이플 배트맨과 슈퍼맨이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빌런, 둠즈데이에게 고전할 때 박력 있게 등장해 그를 패대기쳤던 원더우먼. 솔로무비로 멍석을 깔아주자 말 그대로 날아다닌다. 아마존에서 여왕 히폴리타와 장군 안티오페의 무술을 전수 받은 원더우먼의 무기는 신의 딸답게 화려하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가 만들어 대상을 원자 단위로 벨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검 갓킬러, 제우스의 아이기스 방패로 만들어져 절대로 파괴될 수 없는 승리의 팔찌, 채찍으로도 쓸 수 있고 진실을 털어놓게 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는 진실의 올가미까지. 공격과 방어, 심리전까지 두루 무기를 갖춘 셈이다. 반면, 악녀에게 방어 따윈 필요 없다. 오로지 공격만이 있을 뿐. 그녀에겐 장검, 단도, 도끼, 라이플, 리볼버, 손에 쥐는 모든 것이 살상 무기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라이플을 쏘는 비교적 얌전한 장면부터, 오토바이에 올라타 장검을 휘두르고, 도끼를 들고 버스를 전복시켜버리는 장면까지, (봉준호 감독에 따르면) 약 60명에 이르는 남자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해치운다. 영화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 시점샷으로 전개되는 액션 신들은 쾌감을 극대화한다. 악녀 숙희를 연기한 김옥빈은 쌍검으로 쓴 단도가 손에 잘 붙어 가장 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운명
신 vs 살인병기 제우스와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타 사이에서 태어난 신, 원더우먼은 고결한 운명을 타고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인간 세상에 강림해 전쟁을 멈추려 하고, 마지막까지도 인간의 선의를 믿어보려는 자애로운 성품마저도 그 운명과 잘 어울린다. 원더우먼과는 달리, 악녀의 운명은 기구하다. 살인병기로 키워진 숙희는 무엇으로든 대체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녔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당하고 착취당하며 가장 믿고 사랑하던 대상에게 쓰디쓴 배신까지 맛본다. 이들의 운명은 왜 이렇게 다른 걸까. 타고난 환경 때문에? 꼭 핏줄만이 문제는 아니다. 여성들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원더우먼, 다이애나는 억압당해본 경험이 없다. 당대 여성들의 코르셋을 새로운 갑옷이냐며 어리둥절해할 정도다. 그러나 숙희는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은 채 그의 능력만을 착취하려는 남자, 악당, 국가기관들의 지배와 억압의 굴레에서 길러졌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숙희에게 다른 과거가 있었다면, 탈주하는 법도 알 수 있었으리라. 여성들의 나라에서 성장해 주체성과 자존감, 선의를 지닌 당당한 원더우먼과 속박과 억압의 구조에서 길러져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마지막까지 사랑을 구걸하려는 악녀. 작금의 한국 현실을 생각하면, 최선의 여성 원톱 액션 영화란 이 정도 선에서 타협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자
크리스 파인 vs 신하균 “난 오늘을 구할 테니, 당신은 세계를 구해요.” 자기 주제를 아는 남자의 명대사다. 크리스 파인이 연기한 스티브 트레버는 멋지고 신사적이며 “평균보다는 좀 크”고, 무엇보다 맨스플레인하지 않는다. 영웅 원더우먼을 내조하다 애틋한 순애보 사랑을 남기고 희생한 이 남자는 여자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남자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악녀>의 중상(신하균)은 어떤가. 어린 숙희를 데려다 살인병기로 기르고 사랑한다며 기만하고서는, 다시 돌아온 그를 없애버리려 한다. 아버지 같았고 연인이었고 보스였던 그에게 감정적으로 온전히 종속된 숙희는 최강의 살인병기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휘둘린다. 한 여자의 인생을 농락해놓고 죽는 순간까지도 맨스플레인을 해대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박쥐>에서 태주(김옥빈)의 악몽 같았던 강우(신하균)와 겹쳐지니 짜증은 더해만 간다. 왜 여자는 무시무시한 살인병기임에도 남자의 사랑에 죽고 남자의 사랑에 살아야 하는가. 왜 복수는 결국엔 자기 파멸로 귀결되는가. 안타까운 노릇이다.

#배우
갤 가돗 vs 김옥빈 <악녀>가 <원더 우먼>보다 명백히 더 나은 것이 있다면, 바로 주연 배우다. 합기도와 태권도 유단자에 복싱과 무에타이까지 섭렵한 김옥빈은 액션 영화가 처음이라는 게 의아할 정도로 배역에 적합한 인재다. 단지 무술실력만이 아니다. 남성 위주의 한국 영화계에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 여성 영화가 더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뚜렷하게 내고 있는 그는 여성 원톱 액션영화에 딱인 배우였다. 남성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 숙희에게 김옥빈은 과분한 배우기도 하다. 최근 GQ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와 숙희는 정반대다. 나는 답답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든 돌파하려고 해결책을 찾고 부딪히는 사람인데, 숙희는 억압해온 체계에 순응해온 인물이니까”라고 밝힌 바 있다. 반면, <원더 우먼>의 옥의 티는 배우다. 이스라엘인인 갤 가돗은 유대교 신자로 이스라엘군에서 2년 간 군복무를 했다. 문제는 그가 시오니스트라는 점이다. 2014년 가자지구 분쟁 사태 당시, 이스라엘이 민간인과 어린이, 환자를 가리지 않고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상황에서 갤 가돗은 페이스북에 이스라엘 군을 옹호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던 전적이 있다. 레바논과 튀니지, 알제리, 요르단은 갤 가돗이 출연하는 <원더 우먼> 상영 중지 처분을 내린 상태다. 원더우먼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의 선의를 믿으며 약자를 구하려는 강건하고 지혜로운 영웅으로, 갤 가돗이 이 역할을 연기하는 건 아이러니다. <악녀>의 김옥빈과는 반대로, 갤 가돗에게 원더우먼은 과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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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피처 에디터] 영화와 시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