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올림픽, 잘 치를 수 있을까?

당장 인스타그램에서 #일본여행 해시태그만 보더라도 도쿄나 교토는 울산이나 목포보다 가까워 보인다. 마침 엔화 환율은 1천원 밑으로 떨어지려 간당간당한다. 한 개인에게 지금 일본이라는 여행지는 어떤 곳일까.

여러 저가 항공의 출범, 토요코인의 확장 일로, 하네다 공항 리뉴얼 등이 널리 이롭게 진행되면서 일본 여행은 한층 쉬워졌다. 그것은 이제 ‘해외여행’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서울을 기준으로 볼 때) 아예 제주나 부산을 여행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인상과 현실은 달라서 막상 일본으로 가려면 여러 ‘부가세’ 같은 단계가 따라붙는다지만, 정서적인 측면만 놓고 봐도 일본이라는 여행지는 확실히 가까워졌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뿐 아니라 여느 중소도시나 시골 오지까지 그 반경이 확대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과연 일본은 북쪽으로 개마고원이나 블라디보스톡보다 더 북쪽인 홋카이도가 있고, 남쪽으로는 타이베이보다 더 남쪽인 이시가키 같은 섬이 있으니 그만큼 풍부한 관광자원을 지닌 나라고, 무엇보다 한 개인에게 소구하는 (문화적) 콘텐츠의 양과 만족도라는 측면에서 지구상 어디와도 비교가 안 되는 곳이다. 이는 곧 쇼핑과 직결되는 바, 일본을 여행하면서 뭔가를 사는 일은 거의 여행의 목적 자체가 되기도 한다.

나는 1998년 처음 도쿄에 갔고, 그 후로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일본의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결핍처럼 그때그때 도쿄를 원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없는 게 없고, 더 나은 것이 있으며, 모르던 것도 알게 되어 돈을 쓰게 만드는 도쿄는 갈수록 덩치와 위력이 커지는 듯했다. < popeye >나 < BRUTUS > 같은 잡지에서 도쿄를 새롭게 편집해 특집호를 낼 때마다 동요했고, < Tabelog > 사이트를 훑는 동시에 비약적으로 양과 질을 개선해낸 편의점 메뉴에 감탄했다. 파도 파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식의 비유가 그저 적절할 뿐이었다.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 말 한마디가 지닌 힘. 상업과 어깨를 맞댄 서비스야말로 일본이라는 여행지에서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시스템은 물론 직접 마주치는 그 사람들 말이다. 식당 주인, 매장 판매원, 택시 기사, 갤러리 도슨트, 매표원과 청소부, 곳곳에서 만나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 그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건 그 직업에 종사하는 이에게 바라는 온전 한 안정감이다. 물으면 답을 줄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다. (서울은 결코 그렇지 않으니) 예를 들어 택시라면 설령 정반대 방향에서 택시를 잡았다 해도 결코 (서울처럼) 잘못 탔으니 내리라는 신호 따위를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당황해서는 수습책을 강구하는 그들이다. 트렁크에 실어야 하는 짐을 갖고 있는 손님이 있다면, 차에서 내린 기사가 종종걸음 치며 인사하고 직접 트렁크에 짐을 싣는다. (서울처럼) “아저씨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굳이 이쪽에서 먼저 요청한 뒤, 손님이 짐을 실으며 “아저씨 여기에 뭐가 있어서 가방이 안 들어가요” 말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일본을 여행할 때마다, “여기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실은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가 합당함을 이미 알면서 말이다.

또한 내가 일본이라는 여행지로 한 단계 더 들어간 계기라면 일본의 시골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설국>의 고장인 에치고유자와로 가던 겨울에 갑자기 누마타라는 곳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을 때, 아침 일찍 내리는 폭설을 보면서 나는 아홉 살 학급 당번이었던 날의 조바심이 떠올랐다. 몇 개라도 조개탄을 더 받으려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갔던 날이 갑자기 떠오르다니. 평소에 전혀 기억하지 않았던 감각과 느닷없이 만나는 일. 뭔가를 정확하도록 되돌려놓는 힘. 지금 고향에 가서 그때 그곳에 발을 비벼도 상전벽해가 무색한 후일담이 있을 뿐 여기가 거기라는 감성은 삭제되다시피 한 마당에, 우연히 들른 타국의 소도시에서 고향과 유년을, 그러니까 한 개인의 역사를 갑자기 소환당하는 것. 두고두고 그것을 일본이라는 여행지의 진정한 힘으로 여겼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일본이라는 여행지는 항상 정련된 답을 내놓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일본에서 생긴 에피소드는 내 생각을 다소 바꾸는 경향이 되기도 했다. 올 봄에 긴자 한복판 편집숍에서 나는 뜻밖의 실랑이를 목격했다. 그곳은 정서적 장벽상 뭔가 차려입지 않고서는 쉽게 발을 들이기 어려운, 기꺼이 그 가게의 무드와 입장에 동참한다는 메시지를 공유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 데, 거기서 한 손님이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티셔츠를 왜 입어보고 살 수 없냐는 손님의 불만에 대해 원래 그렇다는 직원의 대답이 반복해서 매장을 메아리치는데, 그 시시비비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장면을 이제까지 일본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자극 때문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 그 말이 맞다. 일본에서, 더구나 긴자에서, 손님과 언성을 높이며 실랑이를 벌이는 점원이라니.

또 한번은 고급한 아오야마 골목길에 위치한 리빙 숍에서 일이 생겼다. 마침 한 도예가와의 협업 작품을 선보이는 날이라 손님이 더욱 많았는데, 몇몇 직원이 자꾸 손님을 밖으로 데리고나갔다. 알고 보니 그날 행사는 미리 발급된 초대장을 소지한 사람만 입장할 수 있었는데, 정작 입장할 때는 확인을 하지 않더니만 이미 가게에 들어선 이들을 일일히 확인하며 초대장 없는 손님을 퇴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기에, 거의 쫓아내다시피 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다만 낯설었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 메이지 진구로 가서 관람객의 동선을 유도하는 예전에 없던 통행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두 가지 사실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요컨대 뭔가는 포화를 너머 과잉의 단계에 이르렀으니, 한둘이면 응당 부드럽게 처리되었을 일이 열이 되고 백이 되자 그만 당황해버린 입장들 말이다. 한마디로 관리가 안 되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 한편 일본 최대의 수산물시장이자 유명한 관광지인 츠키지 시장에서는 아침 10시 이전 외국인 관광객의 입장을 막는 규칙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10시가 가까워지면 직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관광객을 일렬로 줄세우는데, 그 장면 역시 부드럽고 조용하며 한없이 개인적인 일본이라는 여행지의 서비스로부터 광년 단위로 떨어져 보인다.

“도쿄에서 올림픽을 잘 치를 수 있을까요?” 나는 이 말을 2012년 3월 도쿄에서 한 일본인 큐레이터로부터 들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1년 뒤였고 그 자리의 대화 주제가 원전 사고였으니 과연 도쿄의 안전에 관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듭 그 말을 곱씹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던 바, 우선 일본을 여행지로서만 경험하면서 굳이 꺼내놓지 않는 것들에 눈감고 좋은 것만 보고 싶어 했던 내게 그 말이 충격이었음을 말해야겠다. 갑자기 누군가의 맨 얼굴을 본 것 같았달까?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극단적으로 경계하는 일본의 속성으로부터, “이랏샤이마세!”로 상징할 수 있는 과장되리만치 활기찬 손님 맞이 사이, 일본이라는 여행지가 보여주고 들려주고 기억나게 해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응대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한 사람 한 사람이 상대하는 식으로서, 일본은 여행자의 내면과 기억까지 파고들었다. 그걸 하나의 가면이라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일본을 여행하는 자에게 그 가면이란 마땅히 가면인 줄 알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주는 것이지 않는가. 그러니 모쪼록 균형을도 모할 일. 이제 더해진 사실은 혹시나 자꾸 가면이 벗어지는 일이 생길 거라는 추측에 스스로 가면을 벗으려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도쿄에서 올림픽을 잘 치를 수 있을까요?” 거듭 그 말을 생각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도쿄는 분명 변화를 맞고 있다.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온다. 올림픽이 열리는 도쿄의 2020년 여름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나는 하네다 공항에서 구입한 도쿄올림픽 기념 티셔츠를 입고 있다. 티셔츠가 썩 예쁘다.

 

일본에 대한 생각과 말과 행위에는 여전히 예민한 촉수가 도사리고 있다. 단순한 팩트일 뿐이라 해도, 가벼운 취향의 갈래라 해도, 거기엔 늘 개인적 입장과 맥락을 벗어난 것들이 고려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친일파’나 ‘한일전’ 같은 말이 여기에 조성해온 분위기 속에서 일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칫 덫을 피하느라 중심을 잃는 경우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두루 경계하며, 우리는 여행, 아이돌, 쌀, 자동차, 맛집, 로봇, 애니메이션 등 요동치는 단서를 두고 일본의 지금을 불쑥 들여다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