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비평은 필요한가?

지금의 대중음악 비평은 ‘챗봇’보다 나은가?

대중음악 비평은 읽히지 않는다. 1999년 웹진 <가슴>이 오픈한 이래 웹진으로 중심 이동했고, 대중음악 전문 잡지의 명맥은 끊겼다. 하지만 얼추 열 곳 정도 되는 음악 웹진도, 특별히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 겨우 음악 비평가 경력 만 5년을 채운 내 경우, 음악 비평은 ‘쓸데없지만 필요는 하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그러나 대중음악에 대한 비평적 콘텐츠의 수요가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블로그, SNS, 유튜브에 음악 비평에 준하는 콘텐츠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리액션 비디오는 자신의 반응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음악적인 분석을 시도하기도 하고, ‘일반인’, ‘전공자’, ‘나의 부모님’ 등 타인의 반응을 관찰하는 쪽으로도 확장했다. 본격적인 음반 리뷰, 마케팅 전략 분석이나 인물론 등 그 영역도 전방위다. 케이팝 가사를 문학 지문처럼 밑줄 그어가며 해석하는 영상이 등장해 신기하다 생각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뮤직비디오를 그렇게 다루는 영상이 나왔다. 레드벨벳의 ‘7월 7일’ 뮤직비디오가 세월호 참사 추모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해석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화제가 되었다. 어떤 유튜버는 아이돌 소속사의 공식 유튜브 계정에 초청받아 자신의 해석본을 게재하기도 했다. 아이돌 그룹의 곡을 틀어놓고 멤버들이 각각 몇 초씩 노래를 부르는지 계산하는 파트 배분 비디오를 보았을 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의상 이 글에선 이런 콘텐츠를 ‘대안 비평’이라고 부른다.

나와 내 동료들이 쓰는 글에 대해 어떤 팬의 의견을 접한 적이 있다. 팬들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사람의 평에 관심이 없다고, 아이돌에 일말의 애정도 관심도 없는 ‘전문 평론가’가 칭찬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고. 하지만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는다. 진정한 전문가라면 웬만해선 아이돌 음악에 관심이 없는 게 정상이라는 전제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돌 음악 비평을 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아이돌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문가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숙제가 남는다.

대안 비평이라곤 해도, 기성 비평의 영향이 진하게 보인다. 이를테면 디지털 음원보다 실물 시디를 많이 판것을 더 훌륭한 일로 본다. 시디가 음원보다 수익성이 높으니 기획사 입장에선 좋은 일일 테다. 하지만 한 주 반짝 음반 차트 1위를 찍는 음반이 음원 차트에선 90위권을 맴도는 경우도 있는 걸 감안하면, 시디 판매고의 가장 큰 의미는 팬덤의 크기와 열정이다. 물론 팬덤의 크기도 팬덤의 자부심이긴 하다. 그러나 앨범-시디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과거 ‘대중적인 음악은 싱글이, 작품성 있는 음악은 앨범이 팔린다’는 판단의 디지털 시대 버전이다. 디지털 음원은 그 가볍다는 싱글 시디보다도 더 가벼운 매체니까. 이것 역시도 실물 음반이 더 진정성 있다는 21세기 초까지의 사고방식을 재현한다. 또한 밀리언셀러가 속출하던 ‘가요계의 황금기’ 1990년대를 지금과 부적절하게 연관 짓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의 유령은 그뿐이 아니다. 공연장에서 심장을 울리는 묵직한 808 전자 드럼 사운드에 대해 말하는 팬은 거의 없지만, 아이돌이 밴드를 기용해 라이브를 하는 것은 음악성의 증명이 된다. 공연자로서의 기지 넘치는 표현력은 팬들 사이에서 애정의 대상이지만, 인정을 받으려면 결과물이 어떻든 ‘직접 작사, 작곡’을 해야 한다. (이제는 그나마 ‘음색 깡패’ 같은 표현도 있지만) 고음이 곧 가창력이란 프레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음악에 사회적 발언을 담는 것은 ‘다른 종류의 표현’이 아닌 ‘더 진짜 음악’이다. 섹시함을 드러내는 여가수에겐 지금도 멸시의 시선이 있다. 당연히 록/포크 기반의 싱어송라이터에 비해 아이돌의 댄스 음악은 저급하다. 그러니 음악 좀 안다는 전문가가 아이돌의 음악 따위를 진지하게 들을 리 없다.

이 ‘프레임’들은 종종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미리 특정 키워드를 입력하면 그에 따라 정해진 대답을 내뱉는 ‘챗봇’처럼 느껴진다. 직업 비평가가 챗봇 같은 글을 쓴다면 죄악이지만, 대중적인 콘텐츠에선 사실 그럴 수도 있다. 성실하고 참신한 의견을 내놓는 이들이 아주 많을 때, 그 틈에 챗봇이 몇 개 섞여 있다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 챗봇의 데이터가 1990년대에 정립된 비평적 프레임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동기화는 매우 부분적으로만 이뤄진다. 역설적이게도, 대중음악 비평이 아무런 과실 없이 허공을 향해 떠드는 일만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한 역설적인 부분은, 그런 ‘프레임’에 의한 고리타분한 비평이야말로 지금 대중음악 비평이 권위를 잃고외면받는 이유라는 점이다. 2000년대 들어서 ‘대중성’과 괴리된 비평 콘텐츠는 장르를 불문하고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나 대중음악 비평에도 기회는 있었다. 2000년대 말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와 함께 아이돌 붐이 일었고, 많은 비평가가 대중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한동안 등장하지 않던 아이돌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성인 팬을 빠르게 흡수하던 이 시기는, 비평이 아이돌을 전문적 시선으로 다뤄 관심을 끌 수 있는 계기였다.

언어의 장벽이 있긴 하지만, 해외의 아마추어 담론을 접해본 이라면 알 것이다. 국내의 전통적 비평 콘텐츠에 설득당하기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비슷한 형식의 한국어 콘텐츠를 찾거나 직접 만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돌 팬의 반응이 두려워서인지, 또는 대중과의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접근 방식이 갖는 한계인지, 작품의 의미를 밝혀주는 비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적당히 칭찬하고, 팬들이 격의 없이 사용하는 유행어들을 곁들이면서, ‘나도 이런 음악 즐길 수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젊은 세대와 함께 놀아보려 안간힘 쓰는 아저씨와 다를 바 없었다.

마침 2007년경 ‘길티 플레저’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비평문에도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비평가가 한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길티 플레저’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이는 그 작품이 그의 관심 영역 변방이라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관심을 갖고 즐긴다면, ‘길티 플레저’ 라도 그 종류를 구별하고 방향을 가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비평가에게 케이팝의 의미란, 자신의 전문적인 비평 영역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취미에 불과했다. 당연히 전문가로서의 비평일 수 없었다. 케이팝이 우리 대중음악 시장에서 차지하는 부피나 규모가 큰 만큼, 케이팝 음반에 대한 리뷰는 꾸준히 나온다. 그러나 이런 글을 쓰는 이들 중 케이팝이 자신의 비평 작업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힌다.

그러는 사이 외국 팬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케이팝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관련된 이슈를 성의 있게 논의하는 외국인이 넘쳐난다. 대부분은 아마추어이며 발언이 실리는 매체는 대체로 블로그, 유튜브다. 민감한 화제에 대해 일단 발언을 삼가고 보는 국내 매체의 ‘룰’을 따르지도 않고, 다양한 매체의 장점을 살려 기민하게 대처한다. 언어의 장벽이 있긴 하지만, 해외의 아마추어 담론을 접해본 이라면 알 것이다. 국내의 전통적 비평 콘텐츠에 설득당하기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비슷한 형식의 한국어 콘텐츠를 찾거나 직접 만드는 편이 나을것이다. 대체로 언어적 이해의 필요성이 낮은 리액션 비디오나 파트 배분 영상, 그리고 한국인이 제작한 해석본 등이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주로 팬 또는 ‘덕후’들에 의해 생산되는 ‘대안 비평’ 콘텐츠는 팬이 아니고선 알기 어려운 내용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팬이 아닌 비평가가, 9인조 그룹 멤버들의 목소리를 구별하여 그중 한 명의 보컬 비중이 지난 앨범보다 커졌다는 점을 파악해 이를 비평적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나? 수십 편에 달하는 티저에서 제시된 ‘떡밥’이나 예능에서의 발언이 음반의 콘텐츠 속에 어떻게 녹아 들어가는지 추적할 수 있나? 케이팝이 그에게 고작 기분 환기를 위한 취미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전통적 음악 비평에서 대안 비평은 경쟁 상대가 아닌 차라리 정복하기 어려운 강자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똑같이 말랑말랑한 형식을 만들어서 경쟁한다? 사람들은 주요 언론사가 SNS 팬 수를 늘리겠다고 인터넷 유행어를 분별 없이 주워 먹다가 저지른 실수를 숱하게 알고있다. ‘덕후’를 상대로 정보량으로 승부한다? 인터넷 시대 이전처럼 음악 평론가가 정보 강자인 시대도 아니고, 평론가라고 해서 산업 내부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접근성이 높은 풍토도 아니다. 대안 비평에 대해 전통적 음악 비평은 차라리 틈새다. 거대한 대안 비평이 미처 못 다루는 것들을 말하고, 증명해야 하는 입장이다.

음악 비평가의 일을 보다 선명하게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데이터’가 충실하지 못할 때, 챗봇은 일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부적절한 답을 내놓는다. 음성 비서에게 ‘자살’이라는 키워드를 말하면 자살 방법을 인터넷 검색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비평가는 달라야 한다. 챗봇이라 해도, 잘 만든 챗봇이어야 한다. 과거의 작품을 통해 적립된 ‘데이터’를 사용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세심히 검토해 특정적인 대답을 내놔야 한다. 결국 작품을 성실하게 다루는 문제로 귀결된다. 사용자가 제시하는 키워드가 정확히 어떤 맥락인지, 대답에 따라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매번 면밀히 살펴야 한다.

비평가가 틈새에 들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한 팬의 의견에 대해, 언젠가는 이렇게 자신할 수 있기를. “내가 아이돌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문가로서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은 가치 있습니다.” 나아가 그것이 이뤄질 때는 대중적인 ‘보급형 챗봇’ 역시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그에 따라 더욱 강력해진 대안 비평에게 음악 비평가가 계속해서 지위를 위협받길 기대한다. 비평가는 위기 속에 있는 게 가장 잘 어울린다.

비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비평의 권위는 사라졌다. 비평적 콘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비평은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비평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데 비평이 존경이나 관심과 가까웠던 적이 있기는 한가. 이달 < GQ >는 비평의 절대 변할 수 없는 불편과 이 시절의 고쳐 앉은 자세를 모두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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