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평론가는 누구인가?

오늘날의 대중문화 평론가는 ‘무엇에 대한’ 최고의 평론을 쓰는지조차도 정확하지 않다.

고백하건대, 대중문화 평론가는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술적인 대중문화 비평이 아니라 TV나 인터넷 포털사이트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대중문화 평론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다. 내가 아는 한 대중문화 평론만으로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한국에 아무도 없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 주 수입원이 따로 있다. 또한 대중문화 평론의 영역은 정작 평론가와 대중 어느 쪽에서도 합의된 바 없다. 대중문화 평론가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써본 적 없는 클래식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대해 평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한 스포츠 신문의 기자는 내가 코멘트를 거부하자 기어이 자신이 멋대로 쓴 코멘트에 내 이름을 도용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매체에서 필요한 내용이면 무엇이든 코멘트를 하는 사람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중문화 평론가라는 이유만으로 연락했다거나, 전혀 알 수 없는 분야에 대해 “그냥 재밌게 써주세요”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기 전에 민망해진다. 아예 ‘대중 문화 평론가(아이돌을 비롯한 음악 산업에 대해 그나마 전문성이 있고 TV 프로그램 리뷰를 어느 정도 씀. 다수의 연예인 인터뷰 진행)’라고 스스로를 소개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잘못된 크레디트를 건 채, 내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순간에도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내 코멘트나 글에 ‘대중문화 평론가’라고 이름 붙이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방탄소년단에 대해 쓰면 아이돌 평론이고, MBC <무한 도전>에 대해 쓰면 예능 프로그램 평론이다. Mnet <프로듀스 101>처럼 아이돌과 예능 프로그램을 동시에 알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아이돌 평론가의 관점에서, 예능 프로그램 평론가의 관점에서 글을 쓸 수 있다. 아니면 그냥 칼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중문화 평론가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 중 꽤 많은 숫자는 이 평론가들이 아이돌과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아이돌의 팬덤 문화와 대중의 욕망과 산업의 전망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대중문화 평론가라는 말 자체는 매체들이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을 본격적으로 싣기 시작하면서 널리 쓰였다. 대중적 콘텐츠를 다루는 분야, 어제의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하는 분야. 사람들의 즉각적인 관심사에 대해 무엇이든 말해야 가치를 인정받는 평론가. 크레디트만 있고 직업은 아닌 이 일이 SNS, 특히 트위터의 등장 이후 위기에 놓인 것은 당연하다. <프로듀스 101>에 대해 트위터 이용자들이 날리는 짧은 평들은 대중문화 평론가의 코멘트를 양적인 면에서 압도한다. 질적인면이라면, 그런 트위터 이용자 중 상당수는 업계 종사자이거나, 그 분야의 마니아거나, 눈에 들어오는 문장을 쓸 재능을 가졌다. 물론 잘 쓰면 된다. 하지만 대중문화 평론가로서 잘 쓰려면, TV나 영화 평론을 잘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정의부터 정립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렴풋이 대중문화와 관련된 대상을 범위로, 콘텐츠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그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까지 포괄할 수 있어야 ‘대중’ ‘문화’ ‘평론’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대중문화 평론은 존재할 수 없는 분야가 된다.

TV나 음악이 아닌 대중문화 평론가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원하는 만큼 보고, 듣고, 쓰면서 살 수 있을 만큼 부자에 재능까지 있어야 한다. 또한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정도의 노력을 들여야만 겨우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직업이 될 수는 없다. 그보다 어떤 작품이나 현상이든 자신이 전공으로 공부한 분야의 관점에서 안 읽어도 이미 읽은 것 같은 멘트를 하는 것이 쉬워보일 것이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연예인의 스캔들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둘 다 전문적인 능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대중문화 평론가는 그 둘에 대한 외고나 코멘트를 같은 날, 심지어는 한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해야 할 수도 있다. 청탁을 하는 쪽, 그리고 그에 응하는 쪽 모두 그럴듯하지만 내용은 없는 글이나 말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다. 1976년생인 내가 스물아홉살이었을 때, ‘선생님’이 은방울 자매나 바니걸스의 당시 인기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던 한 연예 프로그램 작가를 잊지 못한다. TV에 나오게 해준다는 이유로, 보통 원고지 1매당 1만원 안팎의 원고료를 준다는 이유로 이렇게 쉽게 일을 해도 되는 것일까. 그때 덜 쓰든 더 벌든 돈이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면 정말 TV에서 바니걸스 이야기를 할 것 같아서.

그러니 대중문화 평론가라 불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유명해지는 것뿐이다. <씨네 21>의 기자이자 영화 평론가인 김혜리가 매주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독보적인 문장과 존경스러운 관점을 제시하는 한국 최고의 영화 평론가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반면 대중문화 평론가는 ‘무엇에 대한’ 최고의 평론을 쓰는지조차도 정확하지 않다. 평가는 매체가 원할 때 얼마나 적절하게 코멘트를 할 수 있는가, 그래서 대중이 그 사람을 얼마나 더 많이 아는가로 갈린다. 그래서 요즘 대중문화 평론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나면, 진심으로 유명해지라고 말한다. 그것이 이 일을 하면서 자존감을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다.

SNS에서 빠르게 이슈에 대해 코멘트 하고, 그 코멘트가 많이 퍼지고, 그래서 외고가 들어오고, 그것을 발판으로 TV에 나간다. 그때쯤에야 이 일을 직업이라고 부를 만큼의 돈을 벌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 사랑하는 것, 그래서 쓰고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 쓰는 모든 영역에 대해 각 분야의 전문가만큼 지식을 갖고, 그것을 통합해낼 정도가 되거나. 물론, 그런 천재가 굳이 대중문화 평론가라는 일에 목을 매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른 분야의 평론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문화 평론가라는 크레디트로 묶인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아무리 글을 써도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무엇에 대해 쓰고 말하건 확신은 사라지고, 세상에 도움은 커녕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불안에 시달린다. 그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세상만사 다 아는 사람처럼 행세하고 다닐까 봐 더욱 불안해진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쓰는 영역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거나, 자주 만나려고 애쓴다. 내가 한 일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엉터리로 쓰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부끄러움이자 욕심이 컸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려내고, 한 분야에서라도 깊이를 가진 채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보다는 이 이상한 직함이 사라지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너무 오래 붙어 다니는 꼬리표가 됐다. 그만큼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비평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비평의 권위는 사라졌다. 비평적 콘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비평은 소비되지 않는다. 누구나 비평적인 목소리를 내지만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근데 비평이 존경이나 관심과 가까웠던 적이 있기는 한가. 이달 < GQ >는 비평의 절대 변할 수 없는 불편과 이 시절의 고쳐 앉은 자세를 모두 들여다본다.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