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은 도시, 엑상프로방스

떠날 수 없지만 떠나고 싶다.

‘탈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 전에도 이민을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았다. 특히 정치적 상황이 부정적으로 흘러갈 때는 더 그랬다. 지지난 대선 두 번을 거치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에서, 친구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친척들을 만난 결혼식장에서, 그리고 엑상 프로방스의 한국인 가정에서 이민 가고 싶다는 말을 많이도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애국심이라는 모호한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한국을 떠나서 산다고 해서 삶의 질이 별반 나아질 것이 없다고, 어차피 다른 종류의 어려움들과 맞닥뜨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다 진지하게 이주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 건 앞서 말한 액상프로방스에서였다.

나는 2012년 가을부터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엑상프로방스라는 인구 13만의 소도시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덕에 가능한 체류였다. 출국을 앞두고 3개월짜리 연구 비자를 받기 위해 프랑스 대사관을 총 세 번 찾아갔는데, 한 번은 갑작스러운 휴무일 지정으로 돌아와야 했고 다른 한 번은 증명사진을 엉망으로 찍었다며 퇴짜를 맞았다. 많은 사람의 후기가 증명하듯 그 과정은 약간 모욕적이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만난 한국인들(주로 유학생들)과 친해졌을 때 이 이야기를 하자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충을 겪은 바 있는 이들은 “프랑스는 천재지변이 없지만 대신 공무원들이 있다”는, 이제는 일종의 속담처럼 여겨지는 말을 내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9월의 엑상프로방스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총인구가 대학생 반, 은퇴한 연금생활자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작은 도시의 가을은 회색과 노란색이었다. 우아한 노부부들과 활기찬 대학생들이 작은 테이블이 다닥다닥 놓인 예쁜 카페에서 커피나 맥주를 마시는 풍경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파리 다음으로 생활비가 많이 드는 도시여서 지낼 만한 집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지에 계신 분들의 도움으로 호텔에 딸린 구석방에 거저나 다름없는 값에 머무를 수 있었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커다란 흰색 창을 열면 노란빛이 감도는 햇빛과 거리의 소음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기에 행복했다. 머무르는 방에서는 인터넷이 잘 잡히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없었다. 해서 이런저런 소식들에서 자연스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의 아무것도 읽지 않고 거의 아무것도 듣지 않는 동안 9월이 지나갔고, 10월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우체국에 두 번 찾아갔다. 한국 대통령 선거 재외 국민 투표 신청서와 프랑스 체류증 신청서를 각각 주불 한국대사관과 해당 지역 프랑스 경시청에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 우체국이 그나마 친절한지(혹은 인내심을 갖고 외국인을 대하는지), 또 어느 우체국 영업시간이 그나마 긴 편인지를 익히게 되었다.창구 앞에 늘어선 줄에 끼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자면 언젠가 내 차례가 돌아오기는 했다.

어쨌거나 한가로운 시절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산책을 다녀오면 책상에 먹다 남긴 바게트 조각을 허겁지겁 갉아먹던 생쥐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펄쩍 뛰어 달아나고는 했다. 나는 생쥐에게 생-쥐돌스키라는 이름을 붙이고 쥐구멍을 찾아내 그 앞에 바게트 조각을 놓아두고는 했다. 다음 날이면 바게트 조각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재외 국민 투표 신청서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프랑스 경시청에서는 시종일관 답이 없었다. 어차피 프랑스에 대단히 오래 체류할 생각도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약간 불안했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이에 관해 묻자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기다려야 할 뿐, 그 외에는 답이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1월 말이 되었다. 여전히 경시청에서는 답이 없었다. 완연한 겨울이었으나 외부 기온은 영상 10도 안팎에 머물렀다. 가끔 미스트랄이라 불리는 사나운 바람이 도시를 뒤흔들고 지나갔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노란빛이 감도는 따뜻한 햇살이 거리에 내려앉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나의 프랑스어 실력은 커피 정도만 간신히 살 수 있을 정도여서 수많은 대화의 가능성들이 저절로 차단되었다. 가끔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낯선 말들 앞에서 무해한 짐승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기도 했다. 현지 출판사 관계자의 제안으로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데리다를 주제로 한 4회짜리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몇 개의 고유명사가 전부였으나 지적·신체적 고통을 자처할 정도로 그때의 나는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얼마 후면 떠날 몸이었다. 경시청에서 답이 오더라도 예정보다 한두 달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 한국의 일이 있었고 장기 체류에 필요한 돈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그곳에서 만나 친해진 한국인 유학생들과 저녁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프랑스 생활의 장단점을 주로 화제에 올렸다. 한국의 대선도 주된 화제였다. 하지만 재외국민 투표를 신청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투표를 하려면 파리까지 가야 했고, 왕복 비용만 2백 유로 정도가 든다고 했다. 이에 더해 적어도 이틀이 소요되는 일정이었다. 나 역시 한동안 고민하다 결국 투표를 포기했다. 성년 이후 처음으로 포기하는 투표권이었다. 당시에는 이 일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될지 미처 알지 못했다.

커다란 흰색 창을 열면 노란빛이 감도는 햇빛과 거리의 소음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기에 행복했다.

그리고 대선일이 되었다. 프랑스와 한국의 시차는 여덟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결과가 나와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휴대 전화를 쥐고 잠들었다. 기호 2번이 당선사례를 하고 있었다. 꿈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데이터 로밍을 신청해둔 휴대 전화부터 확인했다. 기호 1번이 당선사례를 하고 있었다. 기호 1번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꿈인가 했다. 아니었다. 그날 저녁, 투표를 하지 못한 재외 한국인들이 모였다. 누군가가 어쩌면 이번 일로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요는 말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딱히 태어난 나라를 떠나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다른 나라를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일인지, 태어난 나라의 문제를 홀가분하게 잊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모르겠어서였다. 어쩌면 용기와 결단력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거나. 그날 나와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대부분 유학생들이었던 한국인들 중 한 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른 몇 명은 여름방학을 맞아 며칠 한국에 머무르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친구는 어떻게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궁리를, 뼈까지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운 한국의 여름을 오랜만에 겪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든 계속해서 프랑스에 남을 궁리를 하고 있다. 그중 한 친구는 내게 액상프로방스에서 김밥 가게를 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파전 몇 조각 예쁘게 썰어 담아내면 한 접시에 5유로는 받을 수 있다고, 식전주에 후식까지 곁들이면 김밥 코스 요리를 구성할 수 있다는 거였다. 솔깃했으나 내게는 먼 나라에서 가게를 차릴 만한 돈도, 요리 실력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배짱이 없었다. 수년에 걸쳐 공부에 재능과 머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늦은 나이에 유학을 떠날 수도 없었다. “만약 내가 돈이 아주 많으면 학교에 등록하거나 일자리를 구하지 않아도 몇 년짜리 비자를 받을 수 있어?” 나는 한 친구에게 물었다. “아니.” 그가 대답했다. “3억 정도 있으면 가능할지도 몰라. 3억으로 체코에 집을 사면 이민이 가능하다고 들었어. 그다음에 EU 국가 아무 데서나 살면 돼.”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추석 연휴 기간 동안, 나는 다시 한 번 엑상프로방스에 다녀왔다. 도서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가끔 보물찾기를 하던 헌책방도, 토요일에 열리는 시장도, 고급 문구류를 파는 문방구도, 담배 가게도, 초콜릿 가게도, 남프랑스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크루아상을 판다는 빵집도 그대로 있었다. 너무나 변한 것이 없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다시 이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엑상프로방스가 국민 전선 지지율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라는 것도 잠시 잊고, 2012년 12월30일, 그러니까 출국 이틀 전에야 경시청의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도 잠시 잊고, 그래서 결국 체류증을 받을 수 없었으며 일정을 늘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와야 했다는 것도 잠시 잊고, 나는 순간적으로, 여기서 한가로이 지내며 김밥 가게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게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여기서 삶을 시작하는 순간 잠시 잊은 것들을 전부 또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도서전 부스를 지키고 있는 사이, 한 프랑스인이 다가와 한국에도 문학이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개를 학대하는 나라의 책은 사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순간을 ‘어이실종’이라고 하나, 생각하는 사이 그는 대답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프랑스의 10월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니스 공항에는 “DEPOSE MINUTE, KISS & FLY”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출판사 관계자들과 작별하며 나는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다음에는 길게 오겠다고도. 그렇게 작별 인사를 짧게 나누는 동안 뒤에서 트럭이 경적을 울렸다. 간다고, 가면 될 거 아니야. 나는 툴툴거리며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몸이 그렇듯 고향도 주어진다. 하지만 살아가고 싶은 도시는 선택할 수 있다. 이름을 바꾸듯 결단이 필요한 일만은 아니다. 부쩍 가까워진 세계 속에서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다만 살 수 없더라도 그곳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스스로 가늠해 나가다 보면, 지금 이곳에서는 불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만난다. 이달, < GQ >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이상적인 도시에 관해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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