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GQ> 어워드 | 지큐 코리아 (GQ Korea)

2017 <GQ> 어워드

2017-12-21T17:17:07+00:00 |ENTERTAINMENT|

2017년은 각자의 목소리로 외치고 항의하고 요구해서 열매까지 맛 보았던 한 해였다. 그러니까 하나의 목소리는 단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GQ>는 올해도 <GQ>로서 한 해를 치밀하게 돌아봤다. 편향과 편애로 무장하고 따졌다. 그리고 이것은 2017년 <GQ> 어워드다.

올해의 센세이션 | <고등래퍼> 첫 회를 보기 전에는 <도전! 골든벨> 혹은 청소년 버전 <쇼 미 더 머니>이겠거니 했다. 보는 동안 문득문득 청소년 드라마 <드림하이>, 영화 <파수꾼>, 만화 <슬램덩크>가 나타났다. 70년대 모드족을 다룬 영화 < Quadrophenia >를 2017년 한국에서 만든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순간도 있었다. 사실 그 모든 게 <고등래퍼>에 있었다. 그간 귀엽고 무해한 미성년자를 주인공으로 한 매체 서사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 <고등래퍼>에는 하여튼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려는 아이들이 나왔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한 명 한 명이 충격적으로 신선했다. 물론 이수린이 “아마 저 친구(윤병호)하고 제가 1등을 못 다툰다면 약간 (관객들) 청각에 문제가 있으신 거 아닐까 싶어요”라고 말할 땐 웃었고, 장용준의 사생활 논란이나 오담률의 멘토 결정전 사이퍼 랩에서는 혀를 찼다. ‘중2병’도 있었지만 ‘아재’에게 소스라칠 때와 다를 바 없는 순간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등래퍼>를 봤다. 아이들이라서 너그러웠던 것만은 아니다. 이 아이들이야말로 음악은 눈웃음, 몸매, 춤, 얼굴, 개인기가 아니라 일단 멋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등래퍼> 최종회가 끝나고 이어진 것은 <프로듀스 101> 시즌 2 예고편이었다.

올해의 시대착오 | <미운 우리 새끼> <미운 우리 새끼>는 시청률 19퍼센트를 찍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작년 8월 방영을 시작해 올해는 들러붙는 적수도 없이 일요일 밤의 왕좌를 굳건히 지켰다. 홀로 사는 남자의 어수룩한 면을 부각하고, 이걸 엄마가 지켜보며 혀를 차는 모습이 올해까지 이어질 줄 몰랐다. ‘결혼’, ‘좋은 짝’, ‘며느리’ 같은 단어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취미 활동이 철없는 행동으로 희화화되다가, 여성 게스트가 나오면 “마흔 살 처녀는 흔하지 않다”는 말로 중매를 이어간다. 올해 세상은 1인 가구를 넘어 1인 체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원탁에 둘러앉은 기성세대와 카메라 뒤 제작진들은 무엇을 부여잡고 있는 것일까.

올해의 발견 | <꿈의 제인> 구교환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이 다정하고 나긋한 위로를 건넨 이는 영화 <꿈의 제인>의 제인이다. 트랜스젠더 바에서 노래하는 제인은 가출 청소년 소현의 환상이자 꿈이다. 케이크가 세 조각이 남았을 때, “넷 중 하나라도 케이크을 포기하게 만들어선 안 되는 거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아야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라고 말할 줄 아는 진짜 어른. 불행하지만 어른스럽고,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제인을 온전히 자신으로 체화해낸 것은 배우 구교환의 몫이다. 거식증에 걸린 제인을 표현하기 위해 53킬로그램까지 살을 뺀 그가 제인을 연기하기 위해 참고한 것은 바로 오로지 그 자신이다. 약간의 쇳소리가 섞인 하이톤의 목소리, 우아하고 단호한 손짓, 담백하지만 뭉근한 비애가 묻어나는 눈빛까지. 그는 자신이 “제인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제인을 만났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멋진 여성이자 디바, 멋진 어른이 됐다. <꿈의 제인>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킨 그는 사실 독립영화계에서는 일찍이 주목받던 인물이다. <우리 손자 베스트>에서는 우아한 제인과는 정반대의 지질한 ‘일베충’을 연기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에게 놀랄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야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사실 이전부터 줄곧 빛나고 있던 이름이 발견되기란 시간 문제에 불과했을 것이다.

올해의 완판 | 이상민 이상민은 <미운 우리 새끼>의 가장 꿋꿋하고 꼿꼿한 출연자다. 카메라가 집 안에 들이닥쳐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살던 대로 산다. 이미 채무자로서의 삶 자체가 극적이어서 누구도(엄마들도) 가타부타 잔소리를 끼얹기가 애매하다. 그러니 보는 시청자도 다른 무엇보다 이상민의 스토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 덕에 이상민은 관찰 예능의 광풍과 함께 가장 도드라지는 예능 캐릭터로 부각했다. 그 파급력은 그가 완판시킨 제품들의 리스트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 코 세척기, 휴대용 커피 머신, 유칼립투스 도마, 거북목 교정기, 에어베드, 혈자리 안마기, 보냉 물통, 5만9천원짜리 후쿠오카 여행…. 이상민은 올 한해 전지현 못지않았다.

올해의 밴드 | 새소년 ‘파도’ 도입부의 드럼 필인 10초만 들어도 새로운 한국 밴드가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과시인데 과시처럼 들리지 않고, 매우 부적절한 순간에 “잠깐!”이라고 외치면서 청자를 기다리게 하는데도 매력적이니까. 이 노래의 중모리, 자진모리를 오가듯 끊기고 이어지는 리듬은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이후에 처음 들어보는, 그러나 그것과도 결이 좀 다른 종류다. 리듬을 연주하는 것은 드럼과 기타이고 노래는 차라리 베이스가 하고 있다는 점도 낯설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타 솔로는 이 노래와 밴드에 대해 그 지점까지 가졌던 모든 선입관을 태울 만큼 폭발한다. 그러니까 새소년은 노래의 매 순간을 넘어선다. 거꾸러지더라도 무모하게 넘어서는 형식이 원래 밴드였다는 사실이 오랜만에 생각났다.

올해의 아이템 | 손풍기 국토가 수몰 위기에 처한 몰디브 같은 나라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처럼 지구 온난화를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나라도 드물다. 숨 쉴 때마다 콧구멍이 익을 듯한 한여름 기온은 말할 것도 없고, 열대야는 끝날 줄 모른다. 거제도에서 아열대 채소를 재배하고, 해남에서 바나나가 열릴 정도로 해마다 조금씩 고온 다습한 공포가 북상한다. 그래서인지 올여름 사람들의 손에는 휴대용 미니 선풍기, 일명 ‘손풍기’가 쥐어져 있었다. 몇 해 전 등장한 보조 배터리에 꽂아 사용하던 형태가 USB 충전식으로 진화했고 미풍, 순풍, 강풍 순으로 바람 세기도 조절할 수 있다. ‘쓸데없이 고퀄’의 정점은 아이리버의 제품이다. 배터리 잔량을 표시하는 기능까지 실어 한때 MP3 시장을 떡 주무르듯 했던 기술력으로 휴대용 선풍기에 화풀이했다. 손풍기의 인기는 대단했다. 해외에 나갈 때 여권은 빠뜨려도 손풍기는 챙겼다. 그동안 해외에서 한국인 판독법이 아웃도어 여행 복장 및 셀카봉이었다면, 2017년 업데이트된 최신 버전은 손풍기였으니까. 언론에서 과열로 인한 폭발, 안구건조증 유발 등 위험성을 보도했지만, 손풍기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처서가 한참 지나서야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올해의 파란 | 정상은 연변에서 온 귀화 재중 동포가 중국 선수를 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였다. 더군다나 중국에서 열린 대회였으니까. 아시아 탁구 선수권은 유럽 최강 독일을 제외하고 탁구 3강 한중일이 모두 참가하기 때문에 미니 올림픽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부상으로 생긴 공백 때문에 세계 랭킹 명단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정상은은 아시아 탁구 선수권 32강에서 마롱을 만났다. 변변한 중계 영상도 없을 정도로 어떤 미디어도 주목하지 않는 경기였다. 숟가락보다 탁구채를 먼저 잡는다는 중국 탁구 수준이 워낙 높고, 상대는 탁구 세계 랭킹 1위에 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마롱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은은 공격형 선수답게 드라이브를 퍼붓는 마롱에게 더 예리한 드라이브로 응답하며 두 세트를 내리 이기더니 결국 승리했다. 16강에 진출한 정상은은 이후 만난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차례대로 누르고 은메달을 따냈다. 2007년 세계 주니어 탁구 선수권에서 한국 최초로 우승한 후 10년 만에 일으킨 두 번째 파란이었다.

올해의 돌풍 | 박성현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드라이버를 휘두르면 골프공이 2백70야드를 훌쩍 넘게 날아간다. 프로 골퍼 박성현이다. 올해는 ‘2017년의 박성현’ 이 아니라 ‘박성현의 2017년’이라고 해야겠다. LPGA에 진출한 첫해 US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신고식 한번 세게 하더니 캐나다 오픈에서도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신인왕은 일찌감치 박성현으로 확정됐고, 끝내 세계 랭킹 1위 자리까지 꿰찼다. LPGA 역사상 데뷔 첫해에 세계 랭킹 1위가 된 사람은 박성현뿐이다. 단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미국에 진출하기 전인 2016년엔 KLPGA에서 이미 7승을 거두며 이듬해 보여줄 원맨쇼를 예고한 바 있다. 지금이 전성기인지, 전성기를 향해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1993년생,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이다.

올해의 라이프스타일 | 넷플릭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멈춘다는 의미에는 기존의 미디어로 돌아올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드라마 한 시즌을 뭉텅이로 켜둔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다큐멘터리를 보며 휘몰아치는 감동에 소파에서 자리를 고쳐 앉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Netflix Original Series’가 화면에 뜨는 순간 남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넷플릭스로 인해 여가와 TV 시청의 모든 것이 바뀌는 중이라는 것을.

올해의 피동형 |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진출당했다. 슈틸리케 감독 체제로 예선을 시작 했으나 졸전을 거듭했다. 중국에 0:1로 지더니 카타르에도 2:3으로 패하면서 슈틸리케는 결국 짐을 쌌다. 신태용 감독이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이미 수습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간 대표팀은 이란전에서도 젖은 빨래처럼 흐느적댔다. 위협적인 슛 한번 날리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나자 이번에도 경우의 수를 따졌다. 월드컵 진출 여부는 마지막 우즈베키스탄전과 다른 나라의 경기 결과에 달려 있었다. 결국 또 비기지만 어쨌든 진출은 성공. 최종 예선 성적은 4승 3무 3패였다. 이탈리아는 유럽 최종 예선에서 7승 2무 1패의 성적을 내고도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는데, 축구 국가대표팀이 국운을 월드컵 나가는 데 죄다 써버린 건 아니겠지? 경기를 마치고 축구대표팀은 신태용 감독을 헹가래 쳤다. 잔치는 잔치. 9회 연속 진출을 자축하는 그들만의 잔치.

올해의 억울 | 신태용 한 번도 한국 축구의 미래가 아니었던 적이 없는 신태용이 순식간에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했다. 대한축구협회의 비리와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감독직 의사를 밝히고도 그들에게 묵살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애꿎은 신태용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한국 언론과 시민사회의 성숙도가 하나도 변함없이 드러났다. 신화에 대한 맹목,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성향, 설명하기도 민망한 “내가 화가 났으니 너는 일단 사과하는게 먼저다”라는 불한당의 자세가 지금까지와 판에 박은 듯이 같았다. 안 그래도 천안 일화 우승 후 레슬링 선수 심권호에게 샴페인 대신 맥콜 세례를 받을 때의 딱한 표정이 담긴 ‘고전 짤’로 박제된 그에게 미안하지도 않았는지.

올해의 인생 |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변경 이름은 바꿀 수 있었지만 주민등록번호는 바꿀 수 없었다. 앞자리는 생년월일이고 뒷자리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규칙은 필연적으로 몇몇 사람에게만 얄궂었다. 2000년 이후 태어난 여자(4)의 고향이 세종시(4)라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세 자리가 모두 4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자리는 출생등록지의 읍, 면, 동 주민센터 고유번호인데 여기에도 4로 시작하는 번호가 있다. 그다음 자리는 해당 주민센터에서 당일 출생신고를 한 순서, 마지막 자리는 규칙적으로 적용하는 검증 번호다. 4444, 6969, 666, 1004, 2848, 8282, 1588 모두 가능한 규칙이다. 상상력의 종말이 오지 않는 한 ‘그깟 숫자’라는 건 없다. 1968년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도입된 이래 탈북 주민, 성전환자, 주민번호 오류인 경우에만 가능했던 뒷자리 변경이, 2017년 5월 30일부터 그보다 좀 더 광범위하게 그러나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돼 생명, 신체에 대한 위해 또는 재산에 대한 중대한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과, 성폭력 관련 피해자로서 주민등록번호 유출로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한해서다. 즉, 악마를 숭배하는 블랙 메탈 밴드 보컬리스트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전부 6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올해의 불청객 | 신정환 해외 원정 도박 혐의를 받던 신정환이 5개월간의 도피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후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두 가지다. 도박은 정말 끊기 어렵다는 사실(그는 2005년 이미 불법 도박 혐의로 적발된 적이 있다)과 뎅기열 치료 중이라며 병실에 누워 찍은 사진이다. 신정환은 올해 <악마의 재능기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에 복귀했다. 아니나 다를까, 7년간의 공백기와 문제를 일으킨 과거가 개그 소재로 사용됐다. 연예인도 도박처럼 끊을 수 없는 직업인가? 재능을 기부할 수 있는 연예인은 신정환 말고도 많다.

올해의 만화 | <여중생 A> 이야기는 한 소녀의 불행에서 시작된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빠, 가난한 가정환경, 학급에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미래는 게임의 세계 속에 푹 빠져 있다. 거기서 만난 소년과 친해진 소녀는 차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친구를 사귀는 법을 알아가고, 짝사랑을 경험하고, 글쓰기라는 꿈을 찾으며 게임이 아닌 현실 속에서 한 뼘씩 성장한다. 허5파6의 힘주지 않은 담백하고 단순한 흑백의 그림 속 외톨이 소녀는 조금씩 따듯한 색으로 주변을 채워나갔다. 우리가 사랑했던 여중생 A가 중학교 시절과 무사히 작별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모두의 어린 시절을 조금씩 닮아 있는 미래를 응원하던 독자들은 미래의 미래를 기쁘게 맞았고, 저마다 현실에서 살아갈 용기를 조금씩은 얻었다.

올해의 행정 | 서울로 7017 서울에서 영등포 로터리 못지않은 혼잡 구간이었던 서울역 앞 도로는, 고가도로를 산책로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무간지옥이 됐다. 2015년 말부터 공사를 시작해 약 1년 반 동안 서울역 앞을 지날 때마다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자’라고 생각하며 완공을 기다렸다. 정식 명칭은 서울로 7017. 1970년에 만든 고가도로가 17개의 사람이 다니는 길로 향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제비뽑기로 뽑은 듯한 이름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돌았다. 편견 없이 보려 했지만, 이렇게 만들 생각이었으면 뉴욕에 있는 하이라인 파크 이야기는 애초에 꺼내지도 말아야 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여전히 서울의 색 ‘회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배치된 대형 콘크리트 화분은 장애물에 가깝다. 그래도 하이라인 파크와 비슷한 게 아예 없진 않다. 하이라인 파크 근처의 첼시마켓처럼, 서울로 끝엔 롯데마트가 있으니까.

올해의 소설 | 황정은 <아무도 아닌> 황정은은 일관되게 “아무도 아닌” 것으로 취급 받는 사람들을 다룬다. 아주 사소한 일도 커다란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는 비루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 하지만 소설의 어느 지점에서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일로, 사소한 일로 판단하는 독자 자신이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인 한국 사회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자문까지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원소스 멀티유즈’의 시대에 그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이야기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이야기다.

올해의 세상만사 | 야민정음 댕댕이는 멍멍이, 비버는 뜨또, 대한민국은 머한민국. 디시인사이드 야구갤러리에서 시작해 올해 온라인을 휩쓴 한글 표기법이다. 디시인사이드 야구갤러리가 여태까지 만들어낸 신조어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올해는 단어의 의미와는 아무 관련 없이 단지 글자가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유행한 신조어가 많았다. ‘뻐카충’이라는 충격적인 줄임말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10대 청소년들이 “댕댕아 이리 와봐”라고 말하는 장면을 실제로 보고 몹시 거슬렸다면 이미 ‘꼰대’가 된 건가?

올해의 오리무중 | 부산항 붉은불개미 지난 9월, 부산항 감만부두에 붉은불개미가 나타났다. 곧이어 1천여 마리가 서식하는 개미굴까지 발견되자 무장공비 색출 못지않은 작전이 벌어진다. 원산지는 남미지만 정확히 어디서 ‘밀입국’했는지 알지 못했고, 수출선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잠입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방역 당국은 콘크리트 바닥까지 걷어내며 하루에 많게는 1천5백개의 알을 낳는 여왕개미를 찾아 나섰으나 허사였다. 처음에는 강한 독성을 지닌 살인 개미라고 알려졌지만 사태가 길어지자 독성이 그리 강하지 않고, 위험성도 과장되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까치살모사도 사는 우리나라에서 붉은불개미의 독성이 얼마나 강한가는 그 다음 문제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자료에 따르면, 붉은불개미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지정한 100대 외래침입종 중 하나다. 뉴트리아와 황소개구리, 배스 등 역시 순위권에 속한 외래종처럼 붉은불개미도 우리나라에 눌러앉아 생태계 교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어 문제다. 황 개구리가 작은 뱀까지 마구잡이로 삼키는 생태계 피라미드 ‘하극상’을 일으킬 때 우리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리고 부산에 잠입한 여왕 붉은 불개미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올해의 호텔 | 웨스틴 조선호텔 서울 개관 103주년을 맞은 웨스틴 조선호텔은 올해 작정하고 새로워졌다. 봄에는 1층 라운지를 대대적으로 리뉴얼해 환구단을 파노라마처럼 즐길 수 있는 단정한 ‘라운지 앤 바’를 열었다. 가을엔 공들인 시간만큼이나 작정한 기운이 가득한 레스토랑 ‘나인스게이트그릴’도 다시 문을 열었다. 100년이 넘은 호텔이 이토록 가볍게 움직인다는 것도 놀라운데, 움직인 자리마다 우아한 결과물이 완성됐다는 점에서 주저 없이 올해의 호텔로 꼽는다.

올해의 아재 | 홍준표 ‘아재’가 무례하고 무식해도 귀엽다는 관점을 제공할까봐 홍준표를 올해의 아재로 선정한다.

올해의 수난 | 뉴트리아 올해 ‘아재’들이 한 일 중 하나. 정부가 2023년까지 퇴치를 목표로 하던 뉴트리아의 개체수를 순식간에 반토막 낸 일. 곰 담즙보다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돌면서, 생태계 교란 생물에서 순식간에 ‘금트리아’가 되었다. 정부는 세균 및 기생충 감염을 우려하며 제재에 나섰지만 아재들은 마리당 2만원을 지급하는 수매제 신고도 마다하고 뉴트리아의 쓸개를 찾아 나섰다.

올해의 짤 | 노룩패스 연두색 캐리어를 밀어젖히며 어깆어깆 입국하던 김무성 의원의 모습으로 만든 GIF를 올해의 ‘짤’로 명명한다. 갑질을 목도하는 충격은 잠시, 전 세계와 온 동네 네티즌들의 놀잇감(이자 놀림거리)이 되기에 잠재력이 충분했다. 수도 없이 생성된 수학여행 간 학생들의 패러디 영상과 G마켓의 재빠른 태그 공격을 모두 헤치고, 굴러오는 캐리어를 받아내야 하는 게임 어플 ‘무성의한 스웩’에게 최고의 패러디상을 수여하고 싶다. 참, 대한씨름협회장의 꽤 ‘스무성’한 유머를 조롱으로 인식하고 꽥 받아친 일화로 2014년 GQ AWARDS에도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올해의 멘트 | MBC 라디오 방송 중단 안내 한동안 FM 91.9 MBC 라디오를 틀어도 하루종일 음악만 흘러나왔다. “방송사 사정으로 정규 프로그램 대신 음악 프로그램을 보내드리오니 청취자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9월 4일에 시작한 MBC 총파업은 작게는 김장겸 사장의 해임, 크게는 외압 중단을 요구했다. ‘말 안 듣는’ PD와 제작진에 내린 부당 징계도 총파업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지난 정부의 실체가 드러나며 시끄러웠던 동안에도 평화로웠던 MBC였다.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이. 버티고 버티던 김장겸 사장이 해임되자 MBC는 11월 15일부로 총파업 중단을 선언했다. MBC 라디오는 11월 20일부터 정규 프로그램을 다시 송출했고, 파업 이야기는 쏙 빼고 ‘방송사 사정’이라고 말하던 그 멘트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올해의 직업 | 소셜 인플루언서 요즘 들어 웬만한 기획서, 제안서, 초대장에 빠지지 않는다. 가수면 가수고, 배우면 배우지 소셜 인플루언서? 무직자에 대한 배려인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새로운 직업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명성이 그 직업의 초석이요, 진리요, 빛이라면 선뜻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 내리기 어렵다. 더 스미스는 노래했다. “명성, 명성, 치명적인 명성. 명성은 사람들의 정신을 홀릴 수 있죠.(‘Frankly, Mr. shankly’)”

올해의 텔레포트 | 인제 양양 터널 6월 30일, 서울 양양 고속 도로를 개통하면서 10.96킬로미터의 인제 양양 터널도 열렸다. 국내 최장 터널은 50.3킬로미터의 율현 터널이지만, 기차가 아닌 차가 달리는 터널 중에서는 가장 길고, 세계에서는 11번째에 해당한다. 직선으로 측정하면 광화문에서 사당역까지의 거리에 가깝다. 인제군 기린면에서 시작되는 터널은 태백산맥을 관통한다. 터널에서 나오면 어느새 바다를 등진 양양군이 등장한다. 인제 양양 터널에는 졸음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해 ‘경관조명’을 도입했다. 상행선과 하행선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터널 안에 파란 하늘이 나왔다가 무지개가 나오고, 별이 수놓인 밤하늘과 물고기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덕분에 동해 가는 길이 전생 가는 길처럼 몽롱하기만 하다. 한번 밀려온 졸음은 알록달록한 조명으로도 해결하기 어렵다. 졸음운전은 차 내 산소 부족이 원인일 때가 많다. 차라리 터널 중간중간에 차를 잠깐 대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으면 어땠을지.

올해의 1분 | 심상정 19대 대통령 선거는 대선 후보들의 생방송 TV 토론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진 선거다. 가장 긴 토론이었던 JTBC 토론회 1부 후반부에선 동성애에 대한 공방이 오갔다. 홍준표 후보의 “동성애에 반대하냐”는 돌발 질문에 당시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저는 좋아하지 않는다. 합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이슈는 이렇게 참담하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언이 끝난 후 심상정 후보는 1분 찬스를 요청, “동성애는 찬성과 반대를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성 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이다. 저는 이성애자지만 성소수자의 인권과 자유는 존중돼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 국가”라는 상식적인 말을 했다. 이 기본적인 상식이 저 무지의 테이블에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말이었나. 그 순간은 올해 가장 값지게 쓰인 1분으로 기억될 것이다.

올해의 이름 | 김지영 19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에서 꽤나 평균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나쁘지 않은 수준의 가정에서 자라 적당한 대학을 졸업했다. 작은 홍보대행사에서 일했고, 남편을 만나 딸하나를 낳으면서 퇴사해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별 다른 불행도 고난도 없이 살아온 김지영은 왜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걸까?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한 보통의 여성, 김지영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얼마나 의식하지 못한 폭력과 편견, 차별에 노출되어있었는지 낱낱이 파헤친다. 수많은 김지영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여자애라는 원죄를 안고 자랐다. 성희롱을 당하면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는 훈계를 들으며 피해자가 아닌 원인 제공자가 된다. 회사에서는 출산과 육아에 눈칫밥을 먹고 승진에 제한까지 당하는데, 집안에선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밖으로 나가면 심지어 ‘맘충’이 된다. 김지영은 말한다.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982년에 가장 많이 등록되었고 지금 가장 활발하게 사회에서 활동할 나이의 여자 이름, 김지영을 올해의 이름으로 부른다.

올해의 사진집 | < Les Françaises > 소니아 씨에 그저 ‘누드 사진집’이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이 책은 ‘리그’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딱히 기상천외한 접근을 취하지는 않는다. 단지 화면의 여러 요소 중 하나로서 여자의 몸을 보는 시선, 전문 모델이 아닌 저마다 다른 직업의 여자라는 모델 선택, 대부분 그들의 집에서 촬영하는 장소 선정이 있다. 그러니까 누드라기보다 여자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 먼저랄까. 시종일관 어떤 기품이 흐르고, 여느 누드 사진집처럼 자유롭기보다 정교하고 구조적이다. 소니아 씨에는 역시나 인상적인 누드 사진가로 유명했던 장루 씨에의 딸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 수식은 그저 거추장스러울 뿐이지 않을까. 단지 젊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하기에 새로운 세대의 작가가 만든 올해의 사진집이다.

올해의 우후죽순 | 식품회사 협업 치토스 맛 멕시카나 치킨, 수박바 젤리, 바나나 킥 우유, 동원참치 라면, 츄파춥스 맛 스파클링 음료, 죠리퐁 맛 카페라떼, 콜라 맛 감자칩, 메로나 모양 칫솔, 하루야채 마스크팩, 바나나 맛 우유 화장품, 칠성사이다 패키지 손목시계, 펩시 운동화, 새우깡 티셔츠, 초코파이 에코 백, 빠다코코넛 후드 티셔츠, 오징어집 노트, 볶음너구리, 막걸리카노…

올해의 메뉴 | 잔치국수 2017년 3월 10일, 국회 의원회관의 점심 메뉴는 잔치국수였다. 2016년 12월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약 3개월간 이어진 기나긴 탄핵심판의 종지부를 마침내 찍은 날이었다. 뜨끈한 육수에 막 삶은 면발을 도르르 감아 올린 그날.

올해의 길 | 광화문부터 청운동까지 광화문 광장부터 자하문로를 거쳐 청운동까지 이어진 길. 산책 삼아 걷기엔 꽤 먼 이 길을 1천 6백80만 명이 매주 토요일마다 걸었다. 긴 겨울 끝에 봄이 올 때까지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법원이 청와대 2백미터 앞에 자리한 청운동 주민센터까지 행진을 허가하면서 길은 열렸다. 자하문로의 카페들은 기꺼이 문을 열어 화장실을 제공하고 수백 잔의 커피를 저렴한 값에 팔았으며, 사람들은 주말마다 어김없이 이 길을 찾았다. 2016년 10월 29일에 시작된 촛불집회는 2017년 4월 29일까지 총 23회 진행되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며 높게 든 촛불들이 불러온 서울의 봄. 다시 저무는 겨울, 그곳에 가보지 않을 수 있을까.

올해의 힘 | 투표 두 번의 투표를 앞두고 한국 사람들은 유권자 아니면 국민 프로듀서로 호명되었다. 뜨거운 겨울을 지나며 한국 사람들은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고, <프로듀스 101> 시즌 2에서는 투표의 힘을 낱낱이 확인했다. 그래서 투표는 권리가 아닌 의무에, 주장이 아닌 상식에 좀 더 가까워졌을까?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엄청난 국난을 겪은 후, 투표를 통해 각자의 삶이 대단히 바뀌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들은 지금 적잖이 실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투표는 간접 민주제의 의사 결정 방식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해서 스스로의 삶을 바꿔줄 수는 없다는 확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