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 세정의 진심

구구단 세정의 진심

2018-09-27T11:00:41+00:00 |interview|

김세정은 거짓말을 못한다. 매순간 진짜가 되기 위해 맹렬히 달리던 그가 잠시 멈춰 섰다.

수트, 김서룡 옴므. 이너 톱, 알렉산더 왕. 슈즈와 액세서리, 모두 미우미우.

 

흰색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이너 톱, 알렉산더 왕. 데님, 코스.

 

티셔츠, 마크 제이콥스.

곧 생일이죠? 축하해요. 스물셋이 된 기분은 어때요? 어려워요. 이도 저도 아닌 나이잖아요. 심지어 저도 제가 누군지 모르겠는 나이 같아요. 뭘 해야 할지 구분이 안 가서 혼란이 막 오고.

어떤 게 혼란스러워요?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중 뭐부터 해야 하나. 그런데 얼마 전에 결심했어요. 일단 하고 싶은 일 먼저. 이러다간 영영 미룰 것 같아서요.

도저히 미룰 수 없는 그 일은 뭔가요? 작사작곡. 기다리기엔 제가 조급해서 안 되겠어요.

조급할 만큼 음악을 쓰고 싶은 욕심은 어떻게 생겼어요? 예전엔 저는 감독, 작곡가 같은 예술가들을 거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도화지처럼 감독님이 원하는 걸 흡수하는. 그런데 얼마 전 디렉팅 없는 녹음을 했는데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막상 내가 내 걸 하려고 보니 없네, 싶어 생각에 잠겼죠. 실은, 아직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곡을 하진 못했거든요. 나 사실 이런 음악하고 싶어요, 하고 보여드리고 싶어졌어요.

정말 하고 싶은 음악은 어떤 거예요? 약간 부끄러운데, 하하. 보라색 같은 음악이요. 비 온 다음날, 어두운 새벽녘에 나가면 잔디에 이슬이 맺혀 있잖아요. 그 꽉 찬 공기 같은 음악이 하고 싶어요. 빵빵 울리는 센 소리 없이 그 자체로 충만한 음악이요. 호흡이 다 들릴 정도로 노이즈가 들리는 언플러그드 사운드를 좋아해요. 그리고 그 노래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건 어떤 위로가 될까요? “괜찮아, 잘 될 거야” 같은 위로는 아녜요. 사실 전 힘들 때 누구한테 위로를 안 받아요. <수고했어, 오늘도> 같은 책도 못 읽고요. 대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죠. 굳이 가사가 ‘널 안아줄게’ 이런 게 아니어도, 내 이야기를 보고 누군가 공감해서 마음이 풀어진다면 그걸로 좋은 거거든요.

동의해요. 그럼 어떤 책을 읽어요? 최근에 읽은 책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저도 그럴 뻔해서요. 하하하.

지금도 열심히 살지 않아요? <프로듀스101>때부터 김세정은 서바이벌에 최적화된 인재고 성실함의 아이콘이었는데. 너무 그랬죠.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전 뭐든 성에 안 찰 정도로 욕심이 많은데, 그걸 다 채우려고 너무 애써왔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어요.

승부욕과 근성 강한 모습이 많이 비춰졌죠. 별명이 ‘인덕원고 적토마’였다면서요? 50m를 7초대에 뛰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지고는 못 살아서 남자애들도 전부 힘으로 이겨야 하는 애였어요. 팔씨름 한번 벌어지면, “야 붙어붙어” 이렇게. 물론 다 이겼죠.

김세정의 욕심과 승부욕은 어디서 나와요? 무엇보다 지기 싫었던 건 돈이었어요. 정말 가난했을 때, 돈한테 지는 순간이 너무 쪽팔린 거예요. 그러다보니 내가 돈보다 가치 있어지는 수밖에 없겠구나, 느꼈죠. 그러려면 전부 다 잘해야 했어요.

어머니에게 한 ‘꽃길만 걷자’는 말이 희대의 유행어가 됐죠. 그 시절엔 어떻게 자신을 지켰어요? 어두운 시절이었지만 그 상황을 꽃처럼 보려고 노력하면서 컸죠. 엄마는 제게 언제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라고 했고, 전 늘 그 말을 지키려 했어요.

자신에게 부끄러운 건 어떤 거예요? 타협하는 것.

이름 같은 사람이네요. 세상 세에 바를 정. 전 제 이름 정말 좋아해요. 이 이름을 따라 살게 된 것 같아서.

고등학생 때 어머니께 쓴 편지를 봤는데,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어요. “저희가 가난한 건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이겨낼 수 있는 거잖아요. 절제하는 법도 배웠고 성숙해진 것 같아서 전 되려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걸 나에게 준 이유가 있겠거니. 그걸 벗어날 즈음 이렇게 생각하죠. 아, 이번 시련은 이걸 배우게 하려고 온 거구나.

신을 믿어요? 종교는 없는데 신은 믿어요. 오늘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하는 순간들이 생기잖아요? 그런 시간의 흐름이 신이라고 믿어요. 조급해지려고 할 때면 그 신을 떠올리죠. 뭘 억지로 해내거나 알려 하면 분명한 모순이 생기더라고요. 그럼 그 신을 믿으며 기다리는 거예요.

 

빨간 슬리브리스 톱, 앤아더 스토리즈. 검은 팬츠, 김서룡 옴므. 뱅글, 미우미우.

 

블랙 니트 톱은 스타일리스트의 것.

 

아까 생일 케이크 초 불기 전에, 뭔가를 빌었잖아요. 어떤 소원이었어요? 그만 힘들게 해주세요.

어떤 게 제일 힘든가요? 기준을 내려놓고 자신을 마주하는 것.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데뷔해서 사람들이 1등처럼 보이던 나를 좋아해준 줄 알았어요. 1등이 아니어도 괜찮은 나를 인정하면, 발전을 안 할 것 같은 느낌인 거예요.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못 예뻐하고…. 날 어느 정도까지 예뻐해 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예쁘다, 예쁘다 해줘야죠. 얼마나 예쁘고 잘해요. 정말요? 하하. 그렇게 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런 감정에 파묻힐 때 도피처가 있어요? 글을 써요. 최근엔 그렇게 글을 쓰면서 한결 정리가 됐어요.

보여줄 수 있나요? 으아, 부끄럽다. 읽어드릴게요. “힘들게 살지 않아도 하루는 살아진다. 어차피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꿈꾸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눈도 찾아다니는 것보다 가만히 있다 맞을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계획에 얽매여 살지 말자. 이미 배는 바다에 잘 띄워놓지 않았는가.” 선장님들 보면, 적당히 뒀다가 필요할 때만 키를 잡잖아요. 날 매 순간 채찍질할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좀 내려놨나요? 조금은요. 얼마 전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해방촌에 있는 책방에 가보고 싶은 거예요. 무작정 갔어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델 놀러 가본 적이 없는데. 혼자 처음 보는 골목을 걷다가 예쁜 카페에 앉아서 글을 쓰는데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그간 강박에 갇혀 있었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하루를 갑갑하고 무섭게만 살 필요는 없어, 라고.

남을 대할 땐 어때요? 출연한 예능을 볼 때마다 나이에 비해 사람을 대하는 게 능숙해보였거든요. 그건 사실 사람들 대하는 걸 어려워해서 그런 거예요. 전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주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어려워하는 걸 티내면 불편할 테니, 엄청 노력하죠.

원래는 내성적이고 낯도 가리는 사람이 엄청 파이팅을 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단 느낌도 들었는데, 맞았군요. 진짜 그래요. 이걸 제발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람하고 친해지는 선이 두 개 있어요. 포괄적인 선이 하나 있고, 되게 안쪽에 하나 더 있어요. 바깥 선을 넘는 건 진짜 쉬워요. 제가 훈련이 되어가지고 금방금방 다 친해지거든요.

굉장히 애쓰고 있는 거네요. 진짜 진짜 진짜요. 사실 정말 노력하는 거예요. 어떤 예능 패널의 고정을 하잖아요, 2주에 한 번씩 녹화를 하면, 갈 때마다 다시 친해져야 해요.

그 안엔 누가 있어요? 몇 없어요. 엄마랑 오빠, 학교 친구 두 명이랑 도연이. 도연이랑은 정말 많이 얘기해요.

이상형이 웃긴데 철 빨리 든 사람이에요. 자기 같은 사람을 좋아하네요? 하하. 멀었어요, 아직.

김세정에게 철이 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아재라는 별명도 있죠. 어린 나이에 비해 상당히 조숙한, 세상 다 살아본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신기했어요. 전 늘 뭔가를 배우려고 하니까, 지금 나이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이상을 넘보려는 건 있어요. 그럴 때면 아까 말한 신을 떠올려요. 이러면 모순이 있을 텐데, 하면서. 그런데 결국 보면, 전 애에요. 남들은 다 저를 애어른이라고, 아저씨 같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항상 제가 무너지는 건 딱 스물셋에 겪을 법한, 스물셋이 힘들어할 만한 일이더라고요. 내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내 진짜 친구는 누굴까? 그럴 때 나 진짜 어리구나 싶죠.

그렇게 어린 김세정을 판단하고 있는 어른스러운 김세정도 있는 거고요. 그렇네요? 하하하.

항상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때론 지쳐 보이기도 해요. 습관이 됐어요. 힘들 때도 지칠 때도 웃어요.

방어적이죠? 생각보다 여린 사람 같아요. 저 진짜 그래요. 자기 방어가 엄청 강해요. 관계에서도 마음을 이만큼밖에 못 주고, 나중에 후회하죠. 강해 보이지만 상처 받기 싫어서 단단하게 굳어있는 것뿐이에요.

어떨 때 상처 받아요? 부정당할 때. 모니터링 때문에 댓글을 항상 읽는데, 가끔 ‘악플’을 보면 난 진심인데 그걸 ‘척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럼 절 되돌아보는데, 반복되면 저도 헷갈려지기 시작해요. 정말 내가 ‘척’한 건가?

‘척’하는 것도 나쁜 뜻이 아니죠. 내성적인 사람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외향적으로 방송을 한다면 그건 거짓이 아니잖아요. 단지 최선을 다한 거죠. 맞아요. 전 거짓말을 못해요. 다 티 나요. 대신 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절 예뻐해 주는 것도 진심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게 느껴져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짜의 내가 진짜로 멋진 진심을 가져야 하는 구나, 생각하죠.

사람이 매번 진심이고 매번 멋질 순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힘든 거예요. 언제나 진짜일 순 없는데 저는 항상 그러려고 엄청 노력하니까, 인생이 너무 힘들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물어봅시다. 김세정한테는 뭐가 재미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는 거. 잘 해야 하는 거 말고. 저요? 재미있는 거…. 혼자 노래할 때가 재미있어요.

아무도 안 듣는 데 혼자 노래할 때? 네. 내가 하고 싶은 노래를 뜬금없이 부를 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요? 노래를 취미로 하는 거요. 지금 제가 하는 노래는 나만의 것이 아니잖아요. 수익 목적도 있고, 회사의 것이기도 하고. 나중엔 그걸 다 벗어나서 하고 싶은 노래를 그냥 하고 싶어요. 취미로 하는데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자꾸 듣게 되는 그런 노래요.

결국엔 자유로워지고 싶은 거네요. 언젠가는요.

매체나 대중이 여자 아이돌에게 기대하는 방식이 답답하거나 버겁다고 느껴질 땐 없어요? 그 틀에서 가장 벗어나있는 사람이 저라서. 무슨 걸그룹이 그러냐는 식으로 많이들 그러시지만, 솔직히 말해서 전 그런 거에 신경 안 써요. 그러지 않은 나여서 사랑 받았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전 다행인 케이스고, 다른 친구들도 그런 틀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방법이 뭘까요?

그건 대중의 시선부터 바뀌어야하는 문제니까요. 우리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고 최선을 다할 테니, 아티스트로 봐주시면 좋겠어요. 물론 그러기 위해선 책임감을 깊게 가져야겠지만요.

김세정은 그룹보다 솔로를 하는 게 더 좋겠다는 말, 무겁진 않나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어서 참 어려운 말이에요. 물론 솔로도 언젠가는 할 거예요. 해낼 거예요. 뭘 하고 싶은지도 다 생각해놓고 있으니까요. 단지, 앞으로 남은 저의 시간이 아주 많다는 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