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배명훈의 <저녁의 마법> | 지큐 코리아 (GQ Korea)

소설가 배명훈의 <저녁의 마법>

2019-06-21T14:23:08+00:00 |culture|

여름이 오기 전, 네 명의 사진가와 네 명의 소설가가 이야기를 보내왔다.

저녁의 마법

그곳에는 옛 왕족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덤이 있다는 건 도성 밖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동네라는 의미였다. 그 시절 도성 근처 그린벨트에는 무덤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은 거기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누구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죽은 왕자의 무덤은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인 기묘한 무덤 타운이 되어 있었다. 왜 무덤 타운인가. 묏자리 근처에는 후손들의 무덤이 수백 년에 걸쳐 늘어나 있었고, 산은 온통 봉분으로 덮여 있었다. 언뜻 보면 음산한 광경이었으나, 양지바른 곳에서 시작된 무덤 타운이다 보니 산 사람이 살기에도 꽤 아늑해 보였다.

“지관(地官)이 잡아준 터겠지?”

우매희에게 물었다. 물었다기보다는 한참 동안 우매희의 수다를 들어주다가 겨우 한마디 끼어든 것에 가까웠다.

“그렇다더라. 여기 문화센터에서 풍수 인테리어인가 뭔가 하는 아저씨가 강연하는 거 들었는데 그 이야기하더라고.”

우매희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바리스타에게 공짜 커피를 얻어 마시려면 한 시간은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법. 카페를 그만두고 공인중개사가 된 다음에도 우매희의 사무실에는 커피 향이 가득했다. 그리고 지금은 수다를 듣는 편이 나았다. 내부 고발을 하고, 처리가 됐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휴가를 낸 채 불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죽이는 오후에는, 할 말 많은 친구의 무심한 수다만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었다. 시간만 죽을지 결국 내가 죽을지 알 수 없는 싸움.

“청일전쟁 무렵에 지관이 다녀가면서 그런 말을 남겼대. 이 계절에 여기에 좋은 바람이 분다고. 그런데 요즘 지관들은 땅만 보고 다녀서 풍수(風水)의 ‘바람 풍’ 자를 이해를 못 한다고.”
“‘바람 풍’ 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데?”
“나도 모르지. 나야말로 땅만 보고 다니는 요즘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지관 할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대. 사람들이 바람 읽는 걸 어려워하는 건 바람이 스스로 모양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라며, 알고 보면 간단한 건데 날개 없는 짐승은 그 간단한 걸 절대 못 깨닫는다고. 좋은 바람이란 좋은 기운들이 담겨 있는 바람이라나. 돌풍처럼 너무 세서 좋은 기운을 흩어버리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한 바람처럼 알레르기만 잔뜩 품고 있지도 않고, 딱 좋은 기운만 경쾌하게 실어 나르는 바람. 나도 풍수지리는 안 믿기는 해. 양지바른 데를 알아보는 지혜 같은 건 있었겠지만 그 단계 넘어 무슨 이론 같은 거 튀어나오면 좀. 아무튼 그 지관 영감이 처방을 하나 하고 갔는데, 저기 중턱에 묘목을 심었다나.”
“왜?”
“아무리 좋은 바람이 지나 다녀도 잡아채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지나가고 마니까.”
“사기 같기는 한데. 나쁘지 않잖아. 뒷길에 스토리가 생겼으니까. 전설이 없으면 뒷길에 서 있는 나무 따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거 아냐.”

우매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누가 들이닥칠지 몰라 내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저녁 내내 얻어먹은 커피 때문에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퀭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해가 뜬 다음에야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주방으로 나가 보니 식탁 위에 점심이 차려져 있었다. 고등어자반 옆에 펼쳐져 있던 구청 소식지를 들여다보며 밥을 먹었다. 전날 들은 무덤의 주인에 관한 소개글이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글도 잘 쓰고 음악도 잘하고 수학까지 잘해서 왕의 총애를 듬뿍 받던 왕자는 생선 가시에 찔려 요절하고 말았다. 스무 살, 활짝 핀 모습을 이제 막 세상에 선보인 참이었다. 우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선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보란듯이 펼쳐놨네. 점심 차려준 건 고맙지만. 먹지 말라는 거냐?”
“그랬나? 자세히 안 읽어봐서 몰랐지. 여기서 죽은 것도 아닌데 뭐.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어디 산책이라도 가.”

전화를 끊고 왕자의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정말로 사고사였을까. 내부 고발을 하려다 들킨 왕자를 누군가 쓱싹 해치우고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꾸며놓은 건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횡단보도를 걷다가 느닷없이 달려든 차에 목이 부러져 죽는 건 아닐까. ‘그렇게까지야. 그래도 절대 밖에 안 나가야지.’

하지만 저녁이 가까워오자 자연스레 눈이 밖으로 향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결국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다. 큰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뒷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 소리에서 멀어지자 마음이 금방 편안해졌다. 아무리 느긋하게 달리는 차도 심장보다는 빠른 엔진을 갖고 있었다.

언덕길에는 인적이 없었다. 등산로가 개방되지 않은 사유지인 탓이었다. 나는 우매희가 알려준 숨겨진 입구를 통해 산길로 들어갔다. 잡념이 금방 내 뒤를 밟았다. 잘한 일일까?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왜 이제 와서 일을 벌였을까? 하나마나한 고민이었다. 너무 많이 해서 한마디도 더 보탤 게 없는 주제였다.

경사가 급해지는 지점에 다다라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길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보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무서워 보일 것 같은 키 큰 나무들이었다. 우매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청일전쟁 끝나고 명당 공부하러 들렀다는 지관이 남긴 이야기가 생각났지만 그 지관이 심은 게 어느 나무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면 되지만 전화기를 켤 용기가 안 났다.
다시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예순 걸음쯤 오르막을 올라가자 오르막이 평지로 변했다. 그러자 선선한 바람이 마중 나오듯 언덕을 내려왔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살랑바람보다는 잰 바람이었지만 비탈길에 넘어질 만큼 다급하게 내달리는 바람은 아니었다. 딱 좋은 기운만 가볍게 싣고 달려가는 바람.

앉을 데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것치고는 눈에 익은 의자였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의자가 놓여 있던 곳을 알고 있었다. 우매희네 사무실 문 옆이었다. 아무 소문도 못 들은 척 라디오처럼 끊임없이 자기 말만 늘어놓던 무신경한 친구. 그것은 물으려 다 만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게 바로 그 지관이 심었다는 나무야.” 우매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와서 묻기도 전에, 심지어 궁금증이 생기기도 전에,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그 자리에 갖다놓은 정답지였다.

나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의자 뒤쪽에는 커다란 나무가 담벼락처럼 펼쳐져 있었다. 줄기가 보이지 않도록 이파리가 빽빽하게 붙어 있는 나무였다. 의자는 그 나무 바로 아래에 나무를 등지고 놓여 있었다. 나무의 위용이 세월의 흐름을 가늠케 했다. 백이십 년 전에는 묘목이었을 나무. 벌써 십오 년 전, 은퇴를 앞둔 대학교 은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내 나이쯤 돼야 나무 좋은 줄을 알게 되는데, 지금 심어봐야 나는 못 봐. 조상 잘 만나는 수밖에 없지.”

그러니 그 나무 또한 누군가 미리 마련해놓은 정답지가 분명했다. 심지어 질문 던질 사람 자체가 생겨나기도 전부터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해답이었다.

하늘에는 점점 짙은 색이 더해갔다.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또 한 번 좋은 바람이 지나갔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딱 내 자리였다. 전설이 전해지지 않고 우매희가 그 동네에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나만의 지정석.

누군가의 마법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창조주일지도 모르고 산신령일지도 모르는 존재의 마법이었다. 누구는 도술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누구는 기적이라고 칭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일이 허공에 머물렀다. 기분 좋은 바람이 그 자리를 쓸고 지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마법을 훔치고는 붙들리지 않을 곳까지 훌훌 내달렸다. 그런데 그 바람이 달려가는 길에 누군가가 쳐놓은 그물이 걸려 있었다.

그물눈이 작고 촘촘해서 체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내 뒤에 선 나무였다.

등 뒤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작고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시험장을 가득 채운 작은 마법사들이 곧 시작될 면허시험을 앞두고 각자 공부하던 마법 책을 재빨리 훑어보는 소리.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등 뒤를 가득 채웠다. 머리 위 훨씬 높은 곳까지 책상이 가득 들어차 있는 시험장이 분명했다. 몇이나 시험을 통과할까. 나뭇잎들이 덤덤하게 사각거리는 것을 보면 합격률이 꽤 높은 시험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갔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고, 날개 없는 짐승은 이해할 수 없다던 바람의 마법이 말 그대로 피부에 와 닿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해서도 안 되는 논리 이전의 감각, 혹은 직관.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준비가 돼 있는 짐승이라면 하늘을 날게도 만들 수 있는 기적을 품은 바람.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영혼이 정수리에 충만했다. 무언가 저릿한 것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언덕이었다. 작은 마법사들이 펼쳐 든 천 개의 마법서가 오래전부터 준비한 마법을 마침내 발동시키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말했다.

“당신이 옳아. 용기를 잃지 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탈길을 달리던 기분 좋은 바람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정신없이 소나기를 퍼붓고는 갑자기 현실 세계로 툭 밀어내버리는 자동세차장처럼 나무가 나를 툭 밀어냈다. 등이 떠밀린 나는 튀어나가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전화기를 들어 전원을 켰다. 초여름, 아직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저녁의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