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름휴가 이야기 | 지큐 코리아 (GQ Korea)

나의 여름휴가 이야기

2019-07-19T16:49:22+00:00 |travel|

나의 벗과 머무르는 이 계절의 휴가.

호두나무 무늬목의 턴테이블은 오디오테크니카.

집은 쉬는 곳이다. 모처럼 여유가 생기면 온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너 나 할 것 없이 복잡한 일상의 압력에 지쳐 사니까. 이런 마음은 날씨가 좋지 않으면 더욱 풍성해진다. 지난겨울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은 반려견 ‘두유’와 LP를 들으며 침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만고땡’. 무더위와 지루한 장마에 번갈아 쫓기게 될 이번 여름도 비슷한 그림이 예상된다. 뭔가 특별한 이벤트? 얼마 전에 영화를 보면서 무척 공감이 되는 대사를 만났다.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야.” 여느 때처럼 에어컨을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은 음악을 혼자 들을 테다. 애장품 1호인 턴테이블과 LP를 옆에 끼고. 음악가가 아니더라도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음반을 골라 듣는다는 건 무척 아름다운 경험이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더더욱. 집에만 딱 붙어 있고 싶은 여름날, 1961년 발매된 빌 에반스의 명반 <Waltz for Debby>를 하루 종일 듣고 싶다. 크러쉬(뮤지션)

온더록 잔, 에머랄드 컬러 컵, 네이비 컬러 볼, 에머랄드 컬러 다용도 단지, 투명 유리병, 목재 서빙 트레이, 모두 이딸라.

헬싱키 여행 때였다. 항구 인근의 노천 시장에서 한 상인이 숲에서 땄다는 블루베리를 팔고 있었다. 소복하게 쌓은 블루베리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가 내 손에 몇 알을 쥐어줬다. 여름의 맛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블루베리는 북유럽의 여름을 추억하게 하는, 작지만 확실한 단서다. 다가오는 휴가도 여름의 활력이 농밀하게 함유된 블루베리로 기념하려 한다. 집을 호텔방처럼 깔끔하게 정리한 후, 진토닉에 블루베리 몇 알을 띄운 ‘웰컴 드링크’를 시원하게 들이킨다. 이때 반드시 빙하를 닮은 이딸라의 잔을 사용한다. 집이라는 익숙했던 공간이 북유럽의 정취에 휩싸이는 환상에 젖어든다. 이후부터는 폭식하듯 책을 읽는다. 미리 정리해둔 ‘휴가 독서 목록’ 가운데 한 권을 집어 들고, 다른 손으로는 블루베리 진토닉이 담긴 잔을 탐닉한다. 소파에 누워서 읽다가 한 잔, 욕조에 들어가서 읽다가 또 한 잔. 볼빨간 사춘기의 ‘여행’이 나지막이 들려오면 은밀한 기쁨으로 충만한, 아주 사적인 휴가가 완성된다. 우지경(여행 작가)

캔들, 조 말론 런던. 골드 트레이, 헤이. 타일, 윤현상재.

‘홀리데이’의 어원인 ‘Holy’는 성스럽다는 뜻이다. 귀하고 성스러운 날이면 잊지 않고 행하는 의식은 에너지 축적이다. 더 큰일을 위해 몸과 마음을 지체 없이 이완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렇다고 벽을 보고 명상을 하는 건 아니다. 대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낮잠을 자는 등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는 시간이어야 한다. 휴가를 마친 뒤 씨름해야 할 업무에 힘을 쏟아 부으려면 꼭 선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장소는 낯설지 않은 곳이 좋다. ‘거주지’와 ‘집’을 다른 개념으로 가정한다면, 내 집은 강원도 강릉이다. 남들은 바캉스 때문에 떠나는 곳을 홈캉스를 목적으로 향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조 말론의 블랙베리 베이 향초를 챙긴다. 출장과 여행에도 동행하는 아이템으로, 낯선 공간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향을 품었다. 익숙한 장소에 익숙한 향이 차분하게 내려앉으면, 마침내 소박하지만 ‘성스러운 휴가’가 시작된다. 성명수(분더숍 케이스 스터디 바이어)

Drink styling by Jeon Dae Hyun at Bar Robins Square.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집을 취향대로 꾸미고 식물을 키우는 재미에 빠졌다. 집을 쓸고 닦고 다듬어 애착이 생기니 좋아하는 술도 집에서 홀짝홀짝 마신다. 가벼운 술보단 독주파라 위스키나 일본 보리소주를 즐기는데, 날이 더워지니 청량감 있는 술이 자꾸 당긴다. 홀로 보내는 여름휴가라면 진토닉, 그중에서도 헨드릭스 진토닉이다. 헨드릭스 진토닉을 제대로 서빙하는 바에선 얇게 포를 뜬 오이를 넣고, 종종 장미 꽃잎도 장식으로 곁들인다. 집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마트에서 사온 돌 얼음과 토닉 워터에 오이를 썰어 넣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으니까. 처음엔 톡 쏘는 오이의 싸한 여름 냄새를 즐기고, 입 안에 감도는 엷은 장미 향에 취하면 그만한 여름휴가가 없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OST로 알려진 수프얀 스티븐스의 노래를 틀어놓으면 여름 공기와 멜랑콜리한 음색이 어우러져 더없이 근사한 순간이 된다. 좀 더 펑키한 곡이 필요하다면, 유튜브 커버 아티스트 스탠 테일러의 ‘레드본’을 들어볼 것. 여름 향기에 푹 젖은 휴가가 될 것이다. 최희서(배우)

요가 매트, 룰루레몬. 튜빙 밴드, 나이키.

웬만하면 한 해에 서너 번씩 먼 여행을 가려고 노력하지만 마음과 현실이 맞지 않을 때도 있다. 뜨겁디뜨거운 여름, 집을 떠나지 못할 바에는 더 화끈하게 보낸다. 자전거를 타고 행당동에서 출발해 응봉교 밑으로 내려가 그 길로 쭈욱 달리면 반포대교에 다다른다. 거기서 왔던 길로 돌아오면 1시간 코스. 집에서는 더위가 들어오거나 말거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등줄기에 땀이 배도록 몸을 쓴다.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어주고, 밴드를 쭉쭉 당기며 오그라져 있던 목과 어깨, 등 주변을 하나하나 편다. 가구와 공예 작품을 만들면서 힘을 많이 쓰다 보니 이렇게 몸 관리를 해둬야 한다. 땀을 흘리고 나면 개운하게 샤워를 한 뒤 망설임 없이 바싹 말린 면 티를 입는다. 열기를 식히는 데는 서늘하고 찬 것보다 뽀송뽀송함이 제격이다. 이제부터는 후반전. 소파에 털썩 앉거나 벌렁 누워서 고요히 시간을 보낸다. 산 정상에 올라 바람에 땀을 식히며 멍하니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그럴 때일수록 생각을 정리하고 뭔가를 상상한다. 숨가쁜 일상에서 사유와 상상의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으니까. 함도하(아티스트)

PK22 라운지 체어 by 폴 케홀름, 플래너 매거진 랙 by 폴 맥콥, 모두 프리츠 한센. 셔츠, 리바이스.

내게 휴가는 낮잠, 음악 감상, 이따금 피아노 연주, 그리고 스케치, 또다시 스케치…로 이루어진 어떤 시간이다. 이때 꼭 곁에 두는 것이라면, 프리츠 한센의 의자 PK22다. 편안하고 부드러우며 낭만적인 기분에 푹 빠지기 좋다. 굳이 낭만까지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의자는 가구 디자인을 전공한 내게 첫사랑 같은 의자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처음 접해본 라운지 체어였다. 처음 본 순간 우아하고 간결한 디자인에 매혹됐고, 앉았을 때 등을 편안하게 감싸 안는 기분엔 마음까지 놓였다. 지금도 바쁘고 지칠 때면 이 의자에 잠깐이라도 앉아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매거진 랙에 꽂힌 잡지들을 들춰보기도 하며 골몰해 있던 고민에서 한발 빠져나온다. 여기에 일 디보의 ‘할렐루야’와 함께라면 꽉 막혀 있던 새로운 디자인의 영감까지 번뜩 떠오르고, 키안티 와인 한잔을 곁들이면 어린 시절을 보낸 필리핀의 휴양지 헌드레드 아일랜드 해변의 노을 속에 성큼 와 있는 기분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남국의 저녁이 여기 있는 것만 같다. 윤새롬(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