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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의 삶

2019.09.02GQ

한 소녀의 내밀한 이야기이자 웅장한 대서사시가 도착했다. 시대의 재난도 사랑의 기쁨도 고통과 상실도 거기에 있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벌새>는 1994년에 중학생이었던 은희의 성장담을 그려낸다. 남의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 같았다. 영화를 보며 마치 내가 체험한 어린 시절 같이 느껴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원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대학원 시절, 교수님이 “클리셰를 피하려면 구체적이면 된다”고 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그냥 꽃이 아니라 제라늄 꽃이라 부르라는 거다. 샹탈 애커만의 <쟌느 딜망>의 원제에는 그가 사는 주소까지 붙는다. 그럼으로써 쟌느 딜망은 단순히 한 여자가 아닌 그 시대에 거기에 사는 사람이라는,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구체성을 획득하는 거다. 그런 서사를보며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게 구체성의 힘이다. 평범한 이들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한 생애사와 구술사를 좋아한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정원이 있고, 존엄이 있다. 엄청난 구체성 속에 보편적인 서사가 있고, 구체적으로 쓸수록 공동의 서사에 가닿는다.

자전적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베를린 영화제를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관객들의 좋은 평을 들으면서 어떤 시절에 대한 어떤 긍정, 비로소 매듭을 짓는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벌새>는 결국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자전적 이야기에 기반했다는 것만으로 필요 이상의 개인적인 질문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삶을 꺼내놓는다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하나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영화도 내 끝까지 내려가서,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 단지 거기에 대한 응답을 받은 것 같아 기쁘다. 시사회에서 관객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받고 많이 울었다.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어릴 때 바랐던 게 이뤄진 것 같더라.

꿀을 찾아 수천 번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은희는 주변인들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사람들의 원형적인 욕망은 결국 같다. 아주 단순하게 세상을 나누면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랑 받는다는 말은 절반이다. 마지막에 은희는 사랑을 결국 찾아낸 것이 아니다. 남에게 사랑 받으려는 투쟁을 멈춘 것이다. 사랑은 결국 나 자신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받은 사랑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 그래서 은희를 혼자 남겨둬야 했다. 사랑을 받으려는 투쟁이 아니라, 사랑을 찾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영지 선생 같은 존재가 있었나? 있었다. 우리를 인간으로 대접하는데 친절하진 않은 사람이었다. 아이를 귀여워하면서 친절히 대해도 애정 없는 사람도 많다. 돌이켜보면 내 생애에서 유리였던 적도 있고, 유리 같은 사람을 경험해본 적도 있고, 지숙이였던 적도 있고, 누군가에겐 내가 영지 선생인 적도 있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래왔을 것이다.

<벌새>는 모든 게 느리게 온다. 성수대교 사고도 아주 후반부에야 나오더라. 그리고 그에 대한 리액션도 즉각적이지 않고, 이후의 궤적을 길게 좇는다. 그 호흡이 좋았다. 의도했던 걸 예리하게 봐주셨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성수대교가 언제 무너지나 하면서 봤다더라. 우리는 언제나 공동의 환영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일상엔 항상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십 대 때 그 불안을 마주했다. 사람들은 사회가 만든 거대하고 끔찍한 환영 속에서 남들이 말하는 기준을 쫓아가려고 허덕이면서, 뭘 안 가지면 안 될 것처럼 마음 졸이면서, 가졌더라도 어느 순간 추락할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이 영화에서 계속 그런 불안이 느껴지길 바랐다.

은희는 무심한 아빠와 폭력적인 오빠에게 고통 받는다. 가부장제에서 자라난 동세대 여자들이 마음에 어떤 억압을, 억눌린 상흔을 갖고 있는지를 그려냈다. 90년대에 아빠나 오빠한테 맞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니까. 해외 영화제 나가면 한국사회가 이렇게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냐고 묻곤 하는데, 백인 남성들은 아시아 국가를 타자화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대상화하려는 질문에 구미를 맞춰주진 않았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다. 내 안에도 그런 가부장적인 여성혐오가 체화된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내부자로서 부끄러워 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 당시엔 그게 정상 가정이었으니,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를 환기해야 한다.

반면 은희는 엄마에게는 사랑을 갈구한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엄마를 보는 꿈처럼. 나 역시 가부장제 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렸을 땐 엄마가 나만 사랑해줬으면 하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일하면서 세 명의 아이의 밥도 다 차려주신 분인데, 얼마나 슈퍼우먼이길 바란 건지. 모성본능은 신화이고 허상이다. 엄마에게 버려지는 원형적인 공포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국 엄마가 아닌 초월적인 존재로 귀결되는 근원적 분리불안인 것이다. 언젠가 작가로서 성장하면, 인간의 해갈되지 않는 근본적인 외로움, 홀로됨, 그런 게 초월적 존재와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주고 싶다.

편지 나레이션이 인상적이다. “다만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불가항력의 재난과 고통, 그럼에도 기쁨과 행복. 그 역설이 삶 같았다. 내가 투영한 인물은 은희지만, 어른이 돼서 말하고 싶었던 건 영지의 입으로 말했다. 어릴 땐 모든 것이 환영 같았고, 괴로웠다. 하지만 깨질까봐 두렵도록 아름답고 감사했던, 나를 변화시켰던 만남들이 있었다. 영지선생님 같았던 사람들이었다.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벌새처럼 날아다니면서 본질을,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에겐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삶이 비정한 동시에 아름답고, 불안과 공포만큼 사랑과 기쁨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구호 같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영화 속 빛과 어둠, 따듯함과 서늘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촬영도 그 구체성을 느끼게 했다. 따듯하면서 불안한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고, 그 안에 빛과 어둠이 같이 있었으면 했다. 밝기만 하면 여기가 밝은지 알 수 없으니까. 실내조명을 거의 안 쳤고, 거의 자연광과 가정집에 있는 백열등만을 썼다. 우리가 실제로 집에 있을 때 낮엔 불 안 켜놓고 있지 않나. 그 어둑한 느낌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늘함이 나왔다. 촬영 전부터 강국현 촬영감독과 각자의 유년시절을 이야기하며 <벌새>라는 이야기를 함께 체화한 상태에서 일어난 마법 같은 일들이 있었다. 은희가 거실에서 춤추는 장면은 오로지 롱샷인데, 촬영감독님이 부엌의 식탁 의자를 걸쳐서 찍었다. 텅 빈 거실에서 덩그러니 놓인 상황에서, 인접광도 없는 햇빛 아래서, 마치 식탁과 의자들까지도 그 아이를 지켜보고 있는 듯이. 그 디테일이 살렸다.

개봉 전 작가 앨리슨 벡델과 만남을 가졌다고 들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트라이베카 영화제에 갔을 때 버몬트에 있는 벡델의 집을 찾아가 이틀 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이자 너무나 멋진 페미니스트였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한 작가로서, 여성 창작자로서 많은 공감을 나눴다. 농담도 많이 했다. 곧 출간할 <벌새>의 시나리오집에 그와의 대담을 볼 수 있다. 벡델 뿐 아니다. 최은영 소설가님, 김원영 변호사님, 정희진 여성학자님, 남다은 영화평론가님 다섯 명과의 대담이 실릴 예정이다.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요즘 주변에 우울증을 안 겪는 사람이 없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울이 담긴 정서적인 SF를 구상하고 있고, 혹은 엄마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아주 생뚱맞은 게 될 수도 있고. 운명에 맡기려 한다.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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