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장 멋진 사람들 – 배수아 | 지큐 코리아 (GQ Korea)

지금 가장 멋진 사람들 – 배수아

2019-09-03T14:05:13+00:00 |culture|

빤한 감탄사로는 부족하다. 지금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멋지고, 가장 남다른 사람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언제나 이질적이고 낯선 것으로서 문학의 새로움을 안겨주는 이 작가는 그의 낯선 점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배수아

누군가 내게 왜 작가가 되었느냐 물으면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한다. 배수아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고교 시절, 작가 같은 것은 될 생각도 없었던 때, 우연히 배수아의 소설을 읽었다. 그 당시는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를 비롯한 일본 작가들이 한창 인기를 끌던 때였고, 나 역시 그들의 소설을 즐겁게 읽었다. 그들의 소설은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쉽게 읽혔기에 쉽게 좋았다. 한국 소설들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뿐이었고, 굳이 내가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배수아의 소설을 접하게 됐다. <철수>라는 중편소설이었는데, 제목이 심심하게 느껴져서 내키는 소설은 아니었다. 자율 학습이 강제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읽어보니 정말로 이상한 소설이었다.

‘이토록 이상한 것이 문학이라면 나도 문학을 하고 싶다.’ <철수>를 읽으며 든 생각이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감동도 없었다. 익숙한 슬픔이나 아름다움도 거기에는 없었다. 문학에 익숙지 않던 십 대로서는 그 내용마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이상함에 끌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무엇인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소설을 읽으며 알았다. 사춘기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듯이, 나도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토록 이상한 감각을 선사하는 것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분명 특별한 사람일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이 그저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기만 했다면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이 내게 알려준 그 문학의 이상함이, 독특함이 나를 문학으로 이끌어버리고야 만 것이다.

배수아가 한국 소설에서 가장 유니크한 개성과 스타일을 지닌 작가라는 데 이견을 갖는 이는 없을 거다. 1993년,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그는 전례가 없는 독창적인 소설로 큰 주목을 받았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따르면 그는 타자 연습을 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때 쓴 소설이 데뷔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개성적인 작가의 데뷔에 매우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를 독특한 작가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보다 문체다. 그의 소설은 데뷔한 1993년부터 꾸준히 변화하고 있으며, 배수아 소설의 변화는 문체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변화는 매우 다양해서, 때로는 이질적이고 과장된 이미지의 연속이었다가, 때로는 절제된 감정 속에서 감각은 최대한으로 발휘되는 기묘한 어긋남이었다가, 때로는 한국어의 일상적 맥락과 문법을 벗어나는 낯선 것이었다가, 정련된 정신주의를 구현하는 문장이었다가, 때로는 그 모든 것이 산발적으로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한국어 문장에서도 본 적 없는 강렬하고 놀라운 문장이 그려내는 세계를 따라가며 나는 언제나 행복했다.

“고개를 들고 있으면 세계는 익숙하고, 사방의 사물과 얼굴들은 형체를 그토록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일 없이 지루하게 지속되는 듯하나, 그러나 시간의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이처럼 어지러운 빠른 굉음과 시커먼 기름덩이, 육중한 쇠절굿공이들이 만들어내는 기계의 거친 물살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죽음으로 돌진하는 미친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인데, 단지 그 위압적인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그래서 구름이 저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으며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 하루는 다른 하루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뿐. 그러한 어느 몽상의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우리의 기차가 우리의 몸 위로 지나가리라. 휙, 하는 순간의 속도로. 그때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선로 바닥에서 보게 되리라.” 그의 소설 <북쪽 거실>의 한 장면이다. 기차와 선로의 모습을 묘사하다 갑자기 등장하는 저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을 보라. 매우 사변적이고, 한국어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복문은 읽다 보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약간의 인용 정도로는 도무지 그의 문체의 유려함과 뛰어남을 전할 수 없을 테니 부디 그의 소설을 읽어보라는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겠다.

문체 자체가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가 되는 작가는 흔치 않다. 그것을 의식하며 수행하는 이는 더욱 흔치 않다. 때로 그의 소설은 비문을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 비문과 번역투의 복문들조차 그의 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그 나름의 스타일일 뿐이다. 소설의 문장에서 정확성이 세계의 모습을 재현해내는 것을 가리킨다면, 오히려 배수아는 가장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라 할 수 있겠다.

배수아는 한국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인 동시에 언제나 한국 문학에 대해서는 이방인의 자리에 있었다.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언제나 이질적인 것으로서 문학의 새로움을 안겨주는 이 작가는 그 낯선 점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어쩌면 그의 삶 자체가 이방인의 삶을 향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는 <데미안>, <산책자> 등 좋은 문학작품을 다수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한데, 전해지기로 그는 한국에서는 번역을 하고, 외국에서는 소설을 쓴다고 한다. 이것은 끝없이 자발적으로 고립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낯선 것에 대한 감각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삶이 그에게는 글쓰기를 지속하게 하는 힘일 터다. 어느 지면에서 그는 아직 자신은 한국어 문학에서 외국 문학에서 종종 보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카덴차’와 같은 눈부신 기교의 문장들을 본 적이 없노라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 눈부신 기교의 문장을 구사하는 한국 작가로 배수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문장은 유래 없는 ‘카덴차’와 같은 것이니 말이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내가 배수아를 읽음으로써 문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직 배수아를 읽지 않았다면 당신에게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릴 기회가 남아 있는 셈이다. 글 / 황인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