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프림은 어떻게 세상을 뒤흔들었나 | 지큐 코리아 (GQ Korea)

슈프림은 어떻게 세상을 뒤흔들었나

2019-09-03T11:19:08+00:00 |trend|

손에 넣기 힘든 희소성과 무심한 듯한 태도. 뉴욕의 불친절한 스케이트 브랜드는 어떻게 세상을 뒤흔들었나.

2017 F/W 슈프림 × 벤슨 레더 재킷.

2013 F/W 슈프림 × 브루스 리 셔츠.

블록 저편에서부터 공기 중에 나그 참파(Nag Champa) 향이 가득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맨해튼 빌딩이 이루는 협곡 사이로 음악이 울려 퍼진다. 건물 앞에 모인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인도에 올라서지 못한 사람들은 ‘라파예트가’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한 의류 매장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슈프림이 처음 문을 연 1994년만 해도 의류 판매는 최우선순위가 아닌 듯했다. 원래는 뉴욕 스케이트 보더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만남의 광장으로서의 역할이 더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당시 라파예트가는 지금과 같은 상업 중심지가 아니었다. 퀸스, 브루클린 등 5개 자치구와 뉴저지, 롱아일랜드, 그리고 뉴욕주 내의 인근 도시에서 놀러 온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제임스 제비아는 이 모든 걸 이룩해낸 슈프림의 창립자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보단 늘 사무실이나 매장 안쪽 방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거래처에 티셔츠, 후디, 모자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매장 안의 비어 있는 선반을 상품으로 채워야 하는 사명을 띤 사람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영화감독 하모니 코린은 당시 슈프림 매장에 모여든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슈프림 매장이 생기기 몇 달 전 두세 블록 건너편으로 이사했다. “초창기 슈프림은 딱히 사업체 같진 않았어요. 애들이 모여서 어울리는 장소에 가까웠죠. 가는 사람만 가는 그런 곳 말이에요.” 슈프림이 문을 연 시기는 코린이 각본을 쓴 <키즈>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래리 클락이 연출한 <키즈>는 슈프림에 드나들던 크루의 스타일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코린에게 당시 슈프림이 ‘애들’을 끌어들인 에너지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슈프림 특유의 거친 태도 때문이죠. 아직도 브랜드 속에 남아 있어요.”

젠 브릴은 오늘날 뉴욕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슈프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4년 처음으로 라파예트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브릴은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의 고등학생이었다. 새로 생긴 스케이트 숍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서 가봤다는 그녀가 말했다. “잘생긴 남자들이 멋있게 입고 있었지만 태도는 최악이었어요. 매장 안팎으로 정신 나간 에너지가 감돌았죠. 아무것도 팔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어쩌면 사람들이 매장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했을 수도 있고요.”

슈프림은 단순한 스케이트 숍 이상이다. 1994년에 문을 연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문화와 패션의 중심을 향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화와 패션이 슈프림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슈프림의 의류와 액세서리는 나오자마자 품절된다. 이제 패션계 모두가 탐내는 최정상의 컬래버레이션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현재 하이 패션 쪽에서는 언더커버가, 그리고 로우 패션 쪽에서는 헤인즈와 챔피온이 각각 슈프림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슈프림은 실적을 발표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2017년 다국적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은 슈프림의 지분 절반을 5억 달러에 매입했다. 회사의 가치를 10억 달러로 간접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95년의 라파예트가에 위치한 슈프림 매장.

1996년에 찍은 슈프림의 오리지널 크루. 왼쪽부터 큄 카르도나, 채피, 키넌 밀턴, 지노 이아누치, 해롤드 헌터, 키스 허프네이글, 존 부셰미.

하지만 여전히 쿵쾅거리는 음악과 나그 참파 향이 가득한 슈프림 매장은 경제적 가치 같은 사안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미디어에 광고나 창립자의 인터뷰도 실리지 않는다. 또한 슈프림은 도매로 상품을 넘기지 않기 때문에 백화점 같은 곳에서는 판매할 수 없다. 붉은색 모피 코트와 레오퍼드 무늬 바지, ‘FUCK’이 새겨진 데님 등 슈프림의 옷은 대범하고 화려한 반면, 슈프림이라는 브랜드는 너무 조용하다. 슈프림은 제품과 소비자들의 입을 통해서만 소통하려고 한다.

사실상 슈프림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끌어가는 창립자 제임스 제비아는 이 기사를 위한 대면 인터뷰를 거절하는 대신 내부 담당자를 통해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자신의 비전과 디자인 철학을 보냈다. 공식적으로 처음 세상에 꺼내는 이야기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삶과 사업은 대중에게 신비롭게 비춰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움직이며,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격렬하게 거부한다는 것이다. 제비아가 말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는 건 소비자를 존중하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닳고 닳은 홍보성 문구가 아니다. 오히려 경영 지침에 가깝다. 그는 슈프림을 시작할 때부터 거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해왔다. 다른 디자이너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거리에서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브랜드의 창의성을 발전시켜 나갔다. “제게 영향을 미친 건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었어요. 스케이터들 말이에요. 그들은 ‘쿨’하게 입어요. 스케이트 브랜드를 걸치지 않아요. 폴로나 구찌 벨트, 챔피온을 입는다는 거죠. 우린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을 만들었어요. 점진적인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죠. 티셔츠 몇 개와 스웨트 셔츠 몇 개, 카고 팬츠 한 장, 배낭 하나, 뭐 이런 식으로요. 뉴욕의 젊은 스케이터들에게 영향을 받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런던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본 사람들의 스타일에서도 영향을 받았고요. 그 모든 것의 조합으로 슈프림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한 번도 ‘스케이트 브랜드라면 이런 걸 만들어야 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붉은 사각형 안에 흰색 텍스트가 들어앉은 슈프림의 로고는 사진과 텍스트를 활용한 바바라 크루거의 콜라주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고는 매 시즌 나오는 티셔츠와 후디, 그리고 모자에 부착된다. 하지만 슈프림은 지난 수년간 옥스퍼드 셔츠, 치노, 셀비지 데님, M-65 재킷, 포켓 티셔츠 등도 만들어왔다. 스케이터를 제외한 도심의 여러 다른 집단, 그러니까 몸에 잘 맞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차분하고 캐주얼한 옷을 찾아 A.P.C.나 아그네스 B.에 갈 법한 예술가와 건축가,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겨냥한 의류다. 슈프림의 플란넬 셔츠나 캐시미어 스웨터를 다루는 블로그는 적은 편이지만, 이런 실용적인 제품들도 브랜드 안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스케이트 브랜드에 대한 편견이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평가에 대해 제비아가 말했다. “‘왜 우리는 일상에서 입을 만한 양질의 제품을 만들면 안 되는 거야?’라고 항상 생각했어요.”

슈프림 매장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기로 유명하다. 칼같이 접힌 티셔츠는 차곡차곡 깔끔하게 포개져 있고, 선반에 놓인 옷 사이의 간격도 정확하게 맞춰져 있다. 제비아가 의류 매장 운영에 이토록 숙달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80년대에 패러슈트(Parachute)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당시 미래지향적인 패션을 선보인 패러슈트는 마돈나, 마이클 잭슨, 데이비드 보위, 그리고 립(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소설 <회색도시(Less than Zero)>에 등장하는 끔찍한 마약상) 등 당시 패션 선도자들이 선호하는 브랜드였다. 패러슈트는 1983년 뉴욕에 문을 열었다. 그해는 마침 열아홉 살 제비아가 영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해였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1989년, 제비아는 스트리트 웨어 부티크 ‘유니온’을 스프링가에 설립했고, 숀 스투시를 만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비아는 스투시의 첫 뉴욕 매장을 열었다. 이번에도 장소는 우스터가였다. 유니온과 스투시, 트리플 파이브 소울과 엑스라지는 뉴욕 소호 지역에서 디자이너가 아닌 서브컬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패션 신을 형성한다. 딱 하나 빠진 게 있다면 스케이트 숍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진 않았어요. 그저 스케이터들을 위한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렴풋하게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죠.”

새로운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전개하는 성공 방정식은 간단하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좋은 품질의 옷을 만들어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한다. 동시에 소비자의 구매욕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는 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슈프림은 구체적인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을 찾아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패션 산업 자체의 질서를 뒤바꿨다. 슈프림의 오랜 팬이자 디자이너 출신, 현재는 <i-D>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알라스테어 맥킴은 슈프림이 “패션을 선도”한다고 말한다. “슈프림이 이토록 성공적인 브랜드가 되고 영향력을 키운 건 시작부터 브랜드 이미지를 잘 관리했기 때문이죠.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성장했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슈프림은 새로운 형태의 소비문화 정착을 이끈 브랜드다. “컬렉션의 규모를 줄이고 제품 생산 물량도 제한하죠. 소비자는 희소성 있는 물건을 살 때마다 흥분할 수밖에 없어요.”

한정 생산은 슈프림의 전매 특허나 다름없는 판매 방식이자 패션계를 뒤흔든 혁신이 되었다. 팬을 거느리는 이유 중 하나이며, 동시에 수많은 고객에게 좌절감과 씁쓸함을 안겨준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매장이 텅텅 비었던 초기에 어쩔 수 없이 택한 결과였다. 당시 제비아에겐 재고를 넉넉히 유지할 여력이 없었다. “티셔츠 몇 장, 스웨트 셔츠 몇 장만 만들었어요. 안 팔리면 재고를 우리가 다 떠안아야 했거든요.” 해결책은 소량 생산이었다. 어떤 제품이 잘 팔린다면, 같은 것을 추가로 제작하는 대신 다른 제품을 새로 만들었다. “언제든 살 수 있는 기본 아이템으로 채운 숍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만드는 것들이 어느 정도는 흥분을 유발하길 원했어요.”

당시는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도 없는 시절이었다. 제품의 성패 예측이 어려운 게 당연했다. 어떤 아이템이 어떻게 팔릴지는 제비아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여름 상품이 3월 말경에 품절되기도 했어요. 아무것도 팔 게 없는 상태에서 4월부터 7월까지 보냈죠. 사람들이 매장에 와서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여기 진짜 별로네. 대체 왜 인기가 많은 거지?’ 근데 거기에 대고 우리가 뭐라 말하겠어요. ‘2주 전에 왔더라면 훨씬 좋아 보였을 거예요’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재고 관리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매주 제품을 입고하기 위해 제비아가 내놓은 해법은 단순하지만 혁신적이었다. 긴박감 조성이다. 매주 목요일, 슈프림 팬들이 “드롭 데이”라고 표현하는 이벤트를 슈프림의 상징으로 발전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이 콘셉트는 현재 많은 브랜드가 차용하고 있다. 슈프림 덕에 ‘드롭’은 ‘스트리트웨어’나 ‘컬래버레이션’처럼 패션계의 유행어가 되었다.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 슬리먼이 “유동적 상품 출시 사이클”을 구축하기 위한 대대적인 계획을 발표했다는 뉴스가 최근 돌았다. 이는 결국 드롭 시스템을 채택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발렌시아가, 버버리, 몽클레어 등도 자사의 컬래버레이션 제품과 한정 생산 모델에 쏟아지는 관심을 더하기 위해 드롭 방식을 사용한다. 구찌의 드롭 상품은 자주 등장하고 빠르게 품절된다. 이 중에는 뉴욕 양키스 및 스페인 출신 아티스트 코코 카피탄과 협업한 ‘슈프림풍’의 캡슐 컬렉션도 있다. 거대 패션 브랜드는 이 같은 전략을 젊은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기회로 여기고 있다.

브랜드가 성장과 확장을 이어가면서 제비아는 후디나 티셔츠, 모자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슈프림이 윙스 앤 혼스와 레이닝 챔프 브랜드를 소유한 CYC 디자인의 CEO 크레이그 앳킨슨과 함께 일하기 시작한 건 바로 그맘때였다. 앳킨슨의 회사에서 만들던 스웨트 셔츠 몇 개를 본 제비아는 높은 품질에 좋은 인상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CYC는 슈프림의 스웨트 셔츠의 대부분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앳킨슨은 스웨트 셔츠에 대한 제비아의 개인적 집착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색상이든 핏이든, 또는 우리가 개발해주길 바라는 소재든 간에 제비아는 품질에 관해서라면 광적인 열정을 보였어요. 제비아의 기대치는 굉장히 높았죠.” 대화는 때때로 갈등으로 번지기도 했다. 네이비색을 약간 띠도록 하는 게 어째서 필요한지에 대해 길게 말다툼을 하는 건 예사였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기까지 제비아는 헬무트 랭을 눈여겨봤다.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움직임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죠. 당시에는 큰 패션 브랜드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어요. 그냥 상황이 그랬어요. 그래도 이 말은 해야겠네요. 그 시절 헬무트 랭은 저에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했어요.” 엣킨슨도 그의 말을 뒷받침했다. “같이 일하는 동안 제비아가 참고한 다른 브랜는 헬무트 랭이 유일했어요. 맨날 헬무트 랭 티셔츠만 입고 있었죠. 그는 목 부분의 핏에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었어요. 헬무트 랭의 티셔츠를 벤치마크로 삼았어요.” 제비아는 기존에 나와 있는 옷을 참고해 품질의 기준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 스케이트 브랜드들의 옷은 품질이 너무 떨어졌어요. 원단 질도 형편 없었고요. 그래서 폴로, 노티카, 칼하트, 리바이스 등 뉴욕의 아이들이 입는 브랜드만큼 좋은 제품을 만들자고 단기 목표를 세웠어요. 가격은 도매를 취급하지 않아 낮출 수 있었고요.”

제비아의 야심이 커져가면서 조직도 복잡해졌다. 2002년부터 디자인 총괄직을 맡은 루크 마이어는 계속해서 늘어가는 직원들과 그들에게 맡겨진 다양한 역할을 감독했다. 마이어의 설명에 따르면 디자인을 거쳐 제품을 생산해 매장에서 바로 판매하는 간단한 유통이 슈프림의 성장에 굉장히 이롭게 작용했다고 한다. “제품을 직접 만들어 바로 주변에 판매하는 그런 가게들 있잖아요? 양복점 같은 거요. 그런 숍은 아무래도 제품을 사가고, 그걸 입는 사람들과 가까워 질 수밖에 없어요. 어떤 제품을 ‘쿨’한 것으로 여기는지, 왜 그런지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고요. 지구 건너편의 어느 스튜디오에서 옷을 만들어 보내는 방식과 전혀 다르죠.” 마이어는 2009년 슈프림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난 후 OAMC라는 브랜드를 설립했다. 2017년에는 자신의 부인 루시 마이어와 함께 질 샌더의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았다. 슈프림에서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로 넘어가자 어떻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별로 다를 게 없어요”라고 답했다.

어웨이크 NY라는 브랜드를 설립한 안젤로 바크는 슈프림에서 2006년에 일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가족 사업 수준으로 작게 운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며 슈프림은 급속도로 확장을 거듭했다. 앞서 언급한 옥스퍼드 셔츠나 카디건 같은 새로운 아이템도 소개했다. “지금이야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2007년 당시 슈프림 같은 브랜드가 옥스퍼드 셔츠처럼 얌전한 아이템을 내놓은 건 혁명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슈프림이 급속도로 규모를 확장한 시기에 디자인을 담당한 건 브렌든 바벤진이었다. “진짜 재미있었어요. 젊은 층을 위한 아이템을 만드는 한편, 시작부터 슈프림과 함께해온 팬들의 요구도 충족시켜야 했거든요. 슈프림에서 목표를 달성했어요.”

이처럼 제품의 종류를 늘리는 데는 고객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제비아는 설명한다. “우리는 진화하려고 해요. 하지만 20년 전에 우리가 매장에서 모피 코트를 팔았더라면 스케이터들이 다 뛰쳐나갔을 거예요. 폐점 시간에 매장의 창문을 부쉈을지도 모르고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마음이 훨씬 열려 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젊은 층을 위한 제품을 만들려고 해요. 우리는 과거에 사로잡힌 브랜드가 아니에요.”

성장을 거듭하며 슈프림은 엄청나게 대중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비록 당신은 슈프림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하더라도 조카나 나이 어린 사촌 중 슈프림의 열성 팬이 있을지도 모른다. 레너드 맥거처럼 초창기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팬으로 남은 사람도 있다. 푸투라(Futura)로 더 잘 알려진 아티스트 레너드 맥거는 1995년 라파예트의 매장에서 구입한 카무플라주 프린트 카고 팬츠를 아직도 입고 다닌다. 오랜 팬들은 42달러짜리 캠프 캡이나 1백10달러짜리 옥스퍼드 셔츠를 사고도 바가지를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앤드류 리스도 슈프림의 오랜 팬이다. 올해 44세인 그는 휴스턴에 사는 지구 물리학자이자 다섯 자녀를 둔 남자다. 슈프림을 처음 알게 된 건 2001년. 스케이트 잡지를 보다가 슈프림 모자를 쓴 스케이터의 사진을 보고 관심이 생겨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는 주문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는 그 당시 슈프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이베이다. 그때부터 이미 28달러짜리 캡이 75달러에 ‘리셀’되고 있었다. 그 후 뉴욕을 방문 중이던 그는 슈프림 매장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평범한 스케이트 숍을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매장에는 슈프림에서 만든 의류 라인이 완벽히 구비되어 있었어요. 엄청 두툼한 후디부터 미국산 셀비지 청바지, 그리고 밀리터리 숍 같은 곳에서는 꿈도 못 꿀 소재로 안감을 처리하고 지퍼까지 달린 나일론 M-65 재킷까지 말이에요. 청바지나 후디에 1백50달러를 쓴다거나 3백 달러짜리 재킷이 저한테는 너무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요.”

리스는 호피 무늬 모자 하나만 사서 나왔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의 슈프림 컬렉션은 늘어만 갔다. 아직 슈프림이 온라인 스토어를 개설하기 전이었다. “슈프림 제품을 구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임무 같았어요.” 그는 틈틈이 뉴욕을 다녀오거나 이베이에서 원하는 아이템을 찾았다. 온라인 포럼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교환하기도 했다. 슈프림 제품들의 품질과 디자인은 항상 안정적인 수준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슈프림이 대단한 건 항상 밀리터리, 스포츠웨어, 워크웨어, 빈티지 스타일을 고르게 선보였기 때문이에요. 그것도 아주 ‘쿨’한 방식으로요. 시간이 흐르고 컬렉션이 늘어나며 전반적으로 화려해졌지만, 고급스럽고 차분하면서 품질이 좋은 제품도 여전히 출시되고 있어요.”

2013년을 기점으로 슈프림은 F/W와 S/S로 나눠 매년 두 차례 정규 컬렉션을 출시하고 있다. 수트와 오버코트에서 바스켓볼 저지, 가죽 재킷, 실크 셔츠까지 온갖 아이템을 이때 선보인다. 여기에 더해 무작위로 고른 듯한 기능성 액세서리와 스포츠 용품도 공개된다. 올 S/S 컬렉션의 경우 슈프림 로고가 박힌 펄(Pearl)의 드럼 세트와 물총, 그리고 반창고를 공개했다. 정규 컬렉션은 출시에 앞서 전부 공개되며, 그 후 수개월에 걸쳐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드롭 데이를 통해 제품을 나눠 판매한다. 판매 관련 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이상 어떤 아이템이 등장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슈프림 팬들에겐 바로 이런 판매 시스템이 스릴의 원천이다. 출시 한참 전이라도 아이템의 인기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핫’한 아이템의 경우 해당 시즌의 컬렉션에서 놓칠 수 없는 필수 구매 제품이 된다. 예를 들어 이번 컬렉션에서 꼭 갖고 싶은 셔츠가 있다면 목요일마다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시즌 시작 후에도 몇 주나 지나서야 판매할 때도 있다. 원하는 제품이 드디어 매장에 입고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이제는 품절되기 전에 재빨리 움직일 차례다. 실제로 완판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슈프림의 단골들은 ‘품절의 고통’을 잘 안다. 알라스테어 맥킴이 말했다. “이해하실지 모르겠는데, 모두 어떤 비밀스런 지하세계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일걸요?” 슈프림을 손에 넣기 위한 절실한 작전이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슈프림의 제품은 특정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디자인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의 유산을 비틀어 슈프림의 스타일로 다시 소환한다. 빈티지 아카이브를 파고들어 오리지널을 찾는 일은 슈프림 마니아의 취미이기도 하다. 발굴된 레퍼런스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앨범의 커버일 수도 있고, 구하기 힘든 빈티지 밀리터리 파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스케이트와 힙합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제비아가 말했다. “그때가 패션, 음악, 미술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해요. 지금과는 또 달랐죠.”

바벤진이 떠난 2015년 이후로 슈프림은 후임 디자이너를 발표하지 않았다. 크리에이티브 팀의 구성 등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다. 다만 2018년에 제비아는 남성복 디자인 부문 수상자로서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DFA)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다.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장 스티븐 콜브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전통주의자가 슈프림이 남성복 부문에 후보로 오른 것을 두고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슈프림의 후보 지명과 수상이 마땅하고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우리 업계와 패션의 미래, 그리고 창의력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비아는 회색 수트에 흰 셔츠, 그리고 노타이 차임으로 시상대에 올랐다. 수상 연설은 간결했다. “슈프림이 패션 브랜드라거나 제 자신이 디자이너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신 데는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슈프림이 패션 브랜드든 아니든, 이 일을 계기로 제비아는 랄프 로렌이나 라프 시몬스와 같은 디자이너와 나란히 섰다. 제비아는 과연 슈프림이 패션 브랜드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을 해볼 수밖에 없게 됐다. 슈프림과 패션의 관계에 대해 바벤진에게 묻자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 생각에 슈프림은 오늘날 패션 산업이 살아가는 세계 자체를 창조했어요.” 트렌드세터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지만, 슈프림은 여전히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을 철저히 고수한다. 웹사이트를 2006년에야 개설했다. 인스타그램 계정도 일부러 뒤늦게 만들었다. 슈프림의 마케팅은 사실상 스케이트보드 세계 내에서만 이뤄진다. 패션계에 꼬리를 흔들지 않아서 슈프림의 매력은 더욱 커졌다.

고객군을 늘리기 위해 슈프림이 활용하는 비장의 마케팅 전략이 하나 있긴 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여전히 잘 통하는 그 전략은 ‘브랜드 × 브랜드’로 표시되는 컬래버래이션. 슈프림은 이제 빈야드 바인스에서부터 릭 오웬스와 버켄스탁과도 협업한다. 물론 슈프림이 브랜드 협업의 창시자는 아니다. 하지만 첫 컬래버레이션 제품인 ‘나이키 × 슈프림 스니커즈’를 2002년에 출시하면서 유명 브랜드와의 협업이 폭발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가장 최근 프로젝트는 루이 비통, 장 폴 고티에 등과 진행했다. 브랜드의 수용자 층을 넓히는 한편 보다 고급스러운 패션 아이템 창조도 시도해볼 수 있었다.

슈프림이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결정하는 시기나 방식에는 정해진 기준이나 규칙이 없다. 제비아가 설명했다. “25년 전에 루이 비통과 옷을 만드는 게 가능했더라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샤넬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뭔가를 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의 젊은 친구들에게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것들을 하죠. 또는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만들기도 하고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획하는 경우도 있어요. 루 리드와 진행했던 협업이 좋은 예시죠. 진짜 ‘쿨’했거든요. 사실 그게 기준의 전부예요. 그리고 이미 누군가 한 것은 절대 손대지 않아요. 간단하죠?”

슈프림은 컬래버레이션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첫째, 희귀하고 값비싼 패션 아이템을 저렴하게 구할 기회를 젊은 층에 제공하겠다는 제비아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둘째, 성공한 기성 패션 디자이너들이 슈프림 특유의 의류 판매 능력을 경험해보게 한다. 장 폴 고티에가 말했다. “젊은 세대가 제가 제시하는 패션을 주목하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죠. 게다가 컬렉션이 순식간에 품절되는 현상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고요.”

슈프림이 컬래버레이션으로 거둔 또 한 가지 중요한 성과는 문화와 예술의 세련된 만남이다. 레이디 가가, 디디, 커밋 더 프로그 등 누구도 예상치 못한 셀러브리티를 활용한 마케팅 캠페인과 제프 쿤스, 마릴린 민터, 데미안 허스트 등 스타 아티스트의 작품이 실린 ‘스케이트 덱 시리즈’가 여기에 포함된다. 20년 전에는 문화계와의 협업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유명인을 앞세운 캠페인이나 스타 아티스트와의 협업 없이 컬렉션을 발표하는 패션 브랜드가 오히려 드문 실정이다.
슈프림은 스트리트웨어를 패션 최전선에 세웠기 때문에 유명세를 얻었다. 브랜드 간 협업의 개척자라는 점, 그리고 스타 아티스트에게 박스 로고 티셔츠를 입혔다는 점도 큰 몫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간단한 전제가 종종 간과되곤 한다. 옷의 품질이 좋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슈프림의 라파예트 매장은 현재 내부 공사로 인해 잠정적으로 문을 닫은 상태다. 대신 인근의 바워리가와 스프링가가 만나는 모퉁이에 임시 매장을 영업 중이다. 매장 앞에 줄을 선 이들은 25년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요즘은 세계 각지에서 대기자가 몰려들고, 철제 바리케이드를 따라 줄을 선 채 안전요원의 안내를 받아 한 명씩 입장한다. 스케이터가 아닌 사람도 있다. 일부는 부모님과 함께 입장을 기다리기도 한다.

대중성은 브랜드 이미지의 빠른 소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슈프림은 상업화로 눈을 돌리지 않아 위험을 잘 피했고,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매번 브랜드 이미지를 새롭게 단장한다. 하모니 코린이 말했다. “이제 누구든 문화를 갖다 쓸 수 있게 됐어요. 더 이상 규칙도 없고요. 그저 뭔가를 만들어내고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만 하면 돼요. 그제야 전에 없던 문화적 자유가 찾아왔죠. 햄버거를 만드는 화이트 캐슬과 컬래버레이션을 해도 괜찮은 시대예요.” 아웃사이더 아티스트인 다니엘 존스톤에서 버드와이저까지. 슈프림은 수많은 파트너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신용에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어떤 브랜드도 슈프림만큼 신선한 이미지와 대중성을 동시에 누리지 못했다. 안젤로 바크가 말했다. “슈프림 같은 브랜드는 앞으로 절대 나타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모두가 슈프림에 대해 궁금해하고, 기업들은 그 성공 비결을 캐내기 위해 앞다퉈 달려들죠. 제비아는 팀을 꾸리는 능력이 탁월해요.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에게 비전이 있었으며, 그게 돈이나 재능, 또는 어떤 개인만을 염두에 둔 게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알맞은 사람들을 모아 팀을 짜고, 적절하게 유지하는 균형이 그가 가졌던 비전의 핵심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킴은 과연 슈프림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지금은 슈프림이 너무 비대해졌어요.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물어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에요. 언더그라운드적이고 배타적인 방향으로 더 밀고 나가야 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내버려두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게 나을지 모르겠어요.” 이에 대한 답변을 제비아로부터 직접 듣기로 했다. “우리는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면 돼요. 열린 자세를 유지하면서 그때그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죠. 그리고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도 현 세대를 위해 최상의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한테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수정구슬이 없어요. 하지만 성공이나 인기와 상관없이 초심을 잃지 않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지금껏 해온 그대로 할 생각이에요. 다른 브랜드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죠. 일부는 잘 헤쳐나갔고, 일부는 그렇지 못했어요. 슈프림은 슈프림인 채로 남을 거에요. 변하는 건 없어요.”

2018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어워즈에서 남성복 부문 상을 받은 슈프림 창립자 제임스 제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