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의 레트로-유토피아 비전 | 지큐 코리아 (GQ Korea)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의 레트로-유토피아 비전

2019-09-03T11:19:26+00:00 |travel|

수수께끼처럼 자유로운 리카르도 보필은 20세기 가장 대담하고 뚜렷한 건물들을 세상에 선보인 건축가다. 새로운 시대, 그가 품었던 선명하고 생생한 레트로-유토피아적 비전이 다시 한번 빛난다.

Salva López/Courtesy of gestalten,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저는 항상 아웃사이더였어요.” 리카르도 보필은 말한다. 카탈루냐 출신의 이 건축가는 폐허가 된 미래의 원시 문명을 기념하는 듯한, 시간성을 뛰어넘는 기묘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데 일생을 바쳤다. “세계 최고의 인기 건축가일 때조차도 건축계의 문화는 늘 저와 잘 맞지 않았죠.”

보필은 자칭 낭만적 예지자로서 특정 범주에 속하기를 끊임없이 거부해 왔다. 1960년대 중반에 활동을 시작한 그는 스페인 코스타 블랑카의 성부터 파리 시외지구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까지 모든 걸 지어봤다. 최근 그가 바르셀로나 공항 및 W호텔을 통해 선보인 동시대적 유리-콘크리트 조합은 기대 밖의 일이기도 했다.

건축계의 규칙과 질서 안에서 보필의 위치는 그의 작품만큼이나 쉬지 않고 큰 폭으로 변해왔다. 1970년대에 보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화려한 상징 같은 존재였으며, 시멘트 공장으로 사용되던 시설에 제임스 본드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저택 같은 주거 공간 겸 사무실을 꾸렸다. 그의 집은 그와 그의 부인 세레나 베르가노(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영향을 받은 1960년대 카탈루냐 영화감독들의 뮤즈)를 중심으로 한 예술계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바흐28 아파트처럼 보필이 설계한 급진적인 집합주거 건물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모델을 제시했다. 하지만 유행이 바뀌면서 인기가 시들해졌다가 근래 들어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이 주목받는 것과 별개로, 보필은 은둔자로 지내며 아주 드물게 인터뷰에 응했는데, 인터뷰를 할 때조차도 대부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선언과 같은 말들을 하곤 했다. 주제와 무관한 얘기들로 두서 없이 흘러가버린 강연이 끝난 후, 런던에서 그를 만났다. 올해 일흔아홉 살인 그는 늙어가는 마티네 아이돌(matinée idol)의 분위기를 풍긴다. 은색 머리칼이 사자 갈기처럼 흰색 실크 스카프를 덮으며 흘러내린다. 세상이 다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한 듯하다. “명성은 돈 같은 거예요.” 담배 때문에 걸걸해진, 다소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통역사를 통해 말을 전한다. “손에 넣는 순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필의 건축물은 색과 모양, 그리고 그림자를 통해 인스타그램과 함께 자라온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새로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그에게 세상이 열광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건물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라 무라야 로하(La Muralla Roja)다. 1973년, 관광 붐이 일어나며 지역 정체성이 희미해진 스페인 칼페에 빨간색과 분홍색, 그리고 파란색으로 세워진 라 무라야 로하는 멀고 먼 어느 이국땅의 성처럼 보인다. 비밀스러운 루프톱의 풀과 교차하는 계단들은 북아프리카의 높은 지대에 세워진 성인 카스바와 유사하면서도 에셔풍으로 어지럽게 펼쳐진 것이 마치 모바일 게임 <모뉴먼트 밸리>에 등장하는 스테이지를 보는 듯하다. 패션 화보 촬영과 파스텔 빛 셀피를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꿈만 같은 장소인 것이다.

라 무라야 로하는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이유로 제명당한 이력을 가진 보필이 당시 무엇에 심취해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안달루시아의 주택 양식, 어린 시절 휴가를 보낸 이비자의 테라스가 빼곡히 들어찬 마을에서 영감을 찾았다.

1963년 자신의 사무소를 시작한 뒤로 보필은 사회학자, 철학자, 작가, 영화감독 등으로 구성된 아방가르드 사상가 무리를 데리고 알제리의 사막지대를 견학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모래언덕을 바라보고 투아레그족의 진흙 움막 짓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의 어떤 궁전에서도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서보다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어요.” 그는 말한다. 이와 같은 현장 학습의 영향은 라 무라야 로하는 물론이고 미로처럼 설계된 적갈색의 월든7(Walden 7) 같은 건축 프로젝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보필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사람이 아니었다. “같은 아이디어를 재사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우디는 똑같은 창문을 절대로 만들지 않았죠.” 1980년대가 되자 보필이 설계한 위용이 넘치는 아파트 단지들이 프랑스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아브락사스 공공주택도 포함된다. 신고전주의 양식에 따라 한껏 과장된 곡선으로 지은 이 건물은 영화 <헝거 게임> 시리즈의 디스토피아적 배경으로 사용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누렸던 인기를 되찾았다. 보필은 “건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건축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목적의식이야말로 일생의 작업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필은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새로운 영감, 새로운 방향의 중요성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정작 그의 건축물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고리타분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아찔한 모습으로 굳게 선 채 건축이 얼마나 경이롭고 극적일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제나두(Xanadu) 불규칙한 정면은 인근 지역인 페뇬 데 이파치의 노두를 본떠 디자인했다. 아치형 창문과 지붕이 바다 전망을 극대화한다.
Salva López / Courtesy of gestalten,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제나두 칼페
1971년, 이끼로 뒤덮인 수직 구조의 마을 부지에 완공된 제나두는 중심이 되는 단일 뼈대에 주거 유닛을 설계한 건축물로서, 런던 아방가르드 건축가 집단인 아키그램의 피터 쿡이 주창한 개념인 플러그인 시티(plug-in city)의 본보기다. 제나두는 18개의 주거 유닛이 각각 3개의 연결용 큐브로 이어진다. Airbnb.co.uk에서 숙박 예약이 가능하다.

Courtesy of Ricardo Bofill Taller de Arquitectura,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의회 건물 마드리드
예나 지금이나 보필의 건축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93년에 지은 마드리드 의회 건물은 사방이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그림자로 이뤄져 있다.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실현한 가운데, 보필이 과거에 설계했던 파리 주택단지나 인더스트리얼한 디자인으로 꾸민 라 파브리카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Mark Rammers / Courtesy of Ricardo Bofill Taller de Arquitectura,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Salva López / Courtesy of gestalten,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라 무라야 로하 칼페
바다와 맞닿은 석회암 절벽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 성채에 영감을 준 건 보필이 사랑한 지중해의 색뿐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침략의 역사였다. 네오-무어 양식을 따라 벽과 해자가 미로처럼 얽혀 있고, 일체의 불필요한 부분이 배제된 50개의 주거지를 특이하게 생긴 여러 복도가 연결한다. 1973년에 완공됐다. Airbnb.co.uk에서 숙박 예약이 가능하다.

월든 7의 각 주거 유닛은 구조를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건물의 전체 가구수도 유동적이다.
Kristina Avdeeva/Courtesy of Ricardo Bofill Taller de Arquitectura,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월든 7은 보필이 컴퓨터로 설계한 첫 건축물로, 당시 스페인에서 최고로 성능이 좋은 컴퓨터가 사용됐다.
Hélène Binet/Courtesy of Ricardo Bofill Taller de Arquitectura,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Courtesy of Ricardo Bofill Taller de Arquitectura,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월든 7 산트 후스트 데스베른
보필은 이 주택단지를 바르셀로나 외곽의 자택 겸 사무실 근처에서 알제리 사막의 모래언덕을 바라보며 구상했다. 거대한 루빅스 큐브처럼 생긴 14층짜리 테라코타 건물로 1975년에 완공되었고 ‘카스바’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늘색 내벽과 옥상에 설치된 수영장에서는 지중해 마을들의 자유분방함이 엿보인다. Airbnb.co.uk에서 숙박 예약이 가능하다.

라 파브리카 위층 거실은 가우디가 디자인한 것과 같은 의자와 보필이 디자인한 대리석 탁자로 꾸몄다.
Salva López / Courtesy of gestalten,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Salva López for Monocle,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

Kristina Avdeeva / Courtesy of Ricardo Bofill Taller de Arquitectura, Ricardo Bofill, gestalten 201

라 파브리카 산트 후스트 데스베른
1973년 보필은 바르셀로나 외곽의 오래된 시멘트 공장을 발견했다. 공장에는 저장고와 굴뚝, 지하 터널과 막다른 계단들이 전부 남아 있었다. 보필의 주거지 겸 사무실로 다시 태어난 라 파브리카는 마치 탈공업화 시대의 대성당 같았다. 그는 이 공간을 예술품을 조각하듯 완성해 나갔으며, 건물과 부지를 식물로 가득 채우는 한편, 신나는 파티와 콘서트를 통해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했다.

Visions Of Architecture
리카르도 보필은 20세기의 가장 독특한 건축가 중 한 사람이다. 도시에서의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그의 비전은 공유 공간에 대한 선입견을 뛰어넘었고, 대안적인 거주 양식을 실험했다. 이 책은 ‘라 파브리카’, ‘월든 7’, ‘라 무라야 로하’ 또는 ‘아브락사스’ 등, 그의 위대한 프로젝트를 프로파일링함으로써 건축에 대한 혁명적인 해석을 탐구한다. 살바 로페스의 화려한 사진, 나초 알레그레와 더글러스 머피를 비롯해 리카르도 보필 자신이 쓴 글들, 스케치와 평면도도 수록됐다. 시적 공간, 초현실적인 구조, 극적인 환영, 그리고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이상…. <Visions of Architecture>는 건축과 삶에 대한 리카르도 보필의 거의 전부를 담고 있다. 풀 컬러, 하드커버, 3백 페이지. gestalten.com에서 구입 가능하다.

Salva López for Monocle, Ricardo Bofill, gestalten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