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직업] [엑시트]의 흥행으로 본 한국영화 제3막 | 지큐 코리아 (GQ Korea)

[극한직업] [엑시트]의 흥행으로 본 한국영화 제3막

2019-10-14T14:05:52+00:00 |movie|

성수기에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간 한국영화들 사이, <극한직업>과 <엑시트>만이 살아남았다. 다변화된 플랫폼에서 이제 관객들이 선택하는 건 스타 캐스팅도 블록버스터도 아닌 오로지 ‘재미’다. 어쩌면 이것은 위기보다 기회다.

예년 같으면 성수기 시장에 명함도 못 내밀 체급이었다. 드라마 장르(<나랏말싸미>), 스펙터클이 전시되지 않는 한국형 재난 장르(<엑시트>), 전작에 비해 개성도 완성도도 후퇴한 판타지물(<사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항일 영화(<봉오동 전투>) 등 올해 여름 극장가에서 개봉한 한국영화 네 편은, 스타 배우들이 즐비하고 어마어마한 물량을 앞세운 블록버스터와 거리가 멀었다. 저마다 경쟁작의 면면을 보고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해 이 시장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 극장가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승자가 독식하는 이 시장은 대박 아니면 쪽박이다. 간혹 ‘쌍끌이’ 같은 미담도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1년 중 가장 시장이 크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7월 중순(32주 차)부터 8월 중순까지 극장이 불러들인 총 관객 수는 2천5백만여 명에 그쳤다. 매년 3천만여 명을 쓸어 담는 최대 성수기임을 감안하면 저조했다고 볼 수 있다. 올해 여름 극장가를 찾은 2천5백만여 명은 2012년의 2천4백23만여 명 이후 최저 관객 수고, ‘천만 영화’가 단 한 편도 나오지 않은 여름 시장은 2013년 이후 처음이다.

살아남는 자가 강하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여름 시장에서 올해는 <엑시트>만이 9백만여 명을 불러 모으며 활짝 웃었다. 나머지는 각기 다른 이유로 손익분기점조차 넘기지 못했다. <엑시트>의 흥행 비결이 몇 가지 있다. 한국형 ‘벽’을 타고 올라가는 두 청춘을 그려낸 시나리오가 현실적으로 공감을 샀고, 재난을 눈물과 감동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하지 않고 유머와 결합시키는 새로운 콘셉트를 시도했다. 7월 31일 개봉한 <엑시트>는 <나랏말싸미>, <사자>, <봉오동 전투> 등 개봉일 앞뒤로 호랑이들이 득실거리는 굴에 과감하게 들어가 버틴 뒤 호랑이들을 잡은 ‘데이팅’(개봉 날짜 결정이라는 뜻의 배급 용어로, 적절한 개봉 타이밍을 잡기 위해 자사와 타사 영화를 객관화해 개봉 날짜를 정한다는 뜻이다)도 한 수였다. 이러한 배급 전략은 상반기에 개봉해 1천6백만여 명을 동원한 <극한직업>의 그것과 유사하다. 개봉 당시 <극한직업>은 경쟁작인 <뺑반>과의 경쟁에서 버티기 위해 <뺑반>보다 한 주 앞선 1월 23일에 뛰어들어 잘 버틴 덕분에 어마어마한 흥행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신인 감독(이상근)이 연출하고, 티켓 파워가 강하지 않은 배우들(조정석, 임윤아)이 출연한 이 영화가 무려 9백만여 명을 불러 모을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신인 감독이라고 해서 흥행 가능성이 낮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모 창투사가 집계한 데이터에 따르면 최근 신인 감독이 손익분기점을 넘긴 확률은 기성 감독의 그것보다 높다.) 기획부터 개봉까지 무려 7년이나 걸린 프로젝트이기에 최근 영화 기획 트렌드로 묶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극한직업>, <기생충> 등 상반기 흥행작들과 살펴보면 몇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일단, 겉(스타)만 번쩍거리고, 허우대(제작비)가 큰 영화들은 관객에게 통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관객은 새로운 콘셉트를 시도하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영화에 지갑을 연다. <극한직업>, <엑시트>는 코미디 장르가 완성도가 높으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충무로의 흥행 법칙을 다시 증명해냈다. 물론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이름값과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이라는 특수 현상이 맞물려 흥행으로까지 이어진 경우이긴 하다.

<극한직업>과 <엑시트>의 흥행이 이후 충무로에 어떤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사실 두 영화가 흥행하기 훨씬 전부터 많은 영화인들은 이미 스타 감독, 배우들을 앞세운 ‘패키징 전략’이 더 이상 관객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학습을 치르고 있었다. 지난해 추석 시장부터 겨울 성수기 시장까지 송강호(<마약왕>), 하정우(<PMC: 더 벙커>) 등 편당 7억 원 이상 받은, 충무로에서 몸값이 가장 비싼 배우들이 추풍낙엽 신세가 되면서 한국영화 위기설도 덩달아 피어오르던 차였다. 주 52시간 근무제와 표준 근로 계약서가 현장에 안착되면서 인건비가 곱절 이상으로 상승하고, 배우 개런티는 갈수록 치솟는 등 여러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제작비가 상승했다. 반면,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관객의 취향도 급변하고 있다. 넷플릭스, 아마존, IPTV 같은 스트리밍 플랫폼이 성장한 덕분에 1020 젊은 관객들은 영화를 극장에서만 봐야 하는 매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 배우들이 떼로 나오는 이야기보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여성 서사에 더욱 목말라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메리크리스마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KTH 등 신생 투자배급사들이 영화 배급업에 뛰어들면서 배급사들 간의 라인업 확보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영화 산업 안팎으로 급변하고, 복잡한 가운데, 뻔한 이야기지만 많은 영화인들은 새롭고 재미있는 영화를 내놔야 관객을 TV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최근 중·저예산(순제작비 기준으로 50억원 이하를 중예산, 10억원 이하를 저예산으로 규정한다) 한국영화에 투자하는 쏠레어 스케일업 영화 투자조합1호가 결성된 것도 이런 고민과 배경에서다. 쏠레어파트너스유한책임회사가 위탁 운용(GP)하고, 한국 모태펀드, 메가박스 중앙,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메리크리스마스, 스튜디오썸머, 리틀빅픽쳐스, KTH, TCO가 출자자로 참여하는 이 펀드는, 조합 결성금액이 총 1백93억 원에 이른다. 투자 기간은 4년, 존속 기간은 5년이다. 개성 강하고 신선한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장기적으로 금융 자본을 포함한 신규 자본을 영화 산업에 유도하려면 결국은 중·저예산 영화에 전문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결성된 펀드로 보인다.

“산업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로서 큰 규모의 콘텐츠도 필요하지만,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춘 신선한 기획의 콘텐츠도 산업의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며, “수년째 정체기에 머무르는 영화 관객 수의 스케일업을 기대한다”는 문영우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이사의 말도 그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산업이 건강하려면 2백~4백만 관객을 동원한 중급 규모 영화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최근 중급 규모의 영화가 줄어 드는 게 현실이다. 창투사의 실적은 수익률로 평가되기 때문에 중·저예산 영화에 투자하는 투자조합이 결성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신뢰할 만한 출자자가 여럿 모였다는 점에서 이번 투자조합 결성은 의미가 큰 것이다.

늘 그래왔듯 <극한직업>과 <엑시트>의 흥행으로 인해, 이 두 편과 비슷한 기획들이 유행처럼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얼마 전까지 철 지난 스릴러 영화 붐이 일었고, 남자 스타들이 떼로 출연한 멀티 캐스팅이 다시 반짝했듯이 말이다. 한 대형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따라쟁이’들이 (<극한직업>이나 <엑시트> 같은 기획을) 따라 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휩쓸고 간 장르인데 지금 그걸 참고삼아 기획하면 유행 지난 뒤 개봉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CJ엔터테인먼트, 롯데컬처웍스, 쇼박스, NEW 4대 대형 투자배급사들의 ‘그린라이트’를 켜는 기준이 과거에 비해 보수적으로 변한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극한직업>, <알라딘>, <기생충> 등 천만 영화가 무려 세 편이나 나온 상반기를 두고 한국영화 위기설을 일축하는 영화인이나 언론들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아직까지는 성급한 판단은 이르다. <엑시트>를 제외한 나머지 한국영화들이 죽을 쑨 까닭에 지난해 추석 극장가와 겨울 시장에서 이어진 한국영화 부진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본다. “총량(관객 수)불변의 법칙이 입증됐다”(이러나저러나 1년에 극장을 찾는 총 관객 수는 큰 변화가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영화계 안팎에서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곧 시작되는 추석 시장과 겨울 성수기 극장가까지 지켜봐야 한국영화 산업이 진짜 위기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위기라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될 수 있다. 시대를 읽어낼 줄 알고,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콘셉트를 보여주는 기획만이 이 무시무시한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게 장기적으로 새로운 자본들이 충무로로 들어올 수 있는 동력이다. <극한직업>, <기생충>, <엑시트>가 그랬듯이 말이다. 글 / 김성훈(<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