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호아킨 피닉스가 살아온 삶 | 지큐 코리아 (GQ Korea)

[조커] 호아킨 피닉스가 살아온 삶

2019-12-16T14:15:52+00:00 |interview|

탱고처럼 우아하고 기이한 춤. 영화 <조커>에서 살인을 저지른 후 춤을 추는 장면은 호아킨 피닉스의 즉흥 연기다. 남미를 오가며 히피로 살아온 어린 시절, 친형 리버 피닉스의 죽음, 어두운 캐릭터를 소화하는 능력은 거기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태아기 때부터 깃든 우주적 불안감”에 대해 말하는 호아킨 피닉스는 삶에서 영화를 뺀 다른 부분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전 제 인생을 사랑해요. 정말로요.”

Clowning Glory
호아킨 피닉스, 베벌리힐스에서 촬영.
수트, 와코 마리아. 셔츠, 타이, 모두 생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스니커즈, 컨버스.

호아킨 피닉스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식당에 가기 위해 차에 오르기 전, 피닉스는 자신이 어떻게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 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1977년 10월 28일은 그의 세 번째 생일이었고, 피닉스 일가는 베네수엘라를 출발한 화물선에 올라 마이애미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의 부모는 교주 데이비드 버그가 스스로를 모세라 칭하며 이끄는 ‘신의 자녀들’이라는 악명 높은 컬트 종교를 따르던 삶을 버린 직후였다. 피닉스의 부모는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를 몰고 미국 서부를 떠돌며 1960년대 후반의 대부분을 보냈다. ‘신의 자녀들’에 귀의한 후에는 미국 남부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푸에르토리코를 돌며 선교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레인과 호아킨, 그리고 리버티가 태어났다. 장남 리버와 딸 레인은 신을 찬양하기 위해 거리에서 버스킹을 했고, 피닉스의 부모는 베네수엘라와 트리니다드를 관장하는 대주교의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신의 자녀들’은 알려진 대로 어둠과 변태성에 잠식당해 신도 모집을 위해 성을 이용했고, 나아가 어린아이들에게 성행위를 독려했다. 피닉스 일가는 교주 버그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실상을 파악하고 나서는 환멸감을 안고 무일푼으로 종교를 떠났다. 당시의 성은 피닉스가 아니라 보텀이었으며 다섯째이자 막내인 서머를 임신한 상태였다.

화물선에 실린 컨테이너 중 하나는 미국의 완구회사 통카에서 만든 장난감을 나르는 중이었고, 선원들은 피닉스에게 장난감 트럭과 생일 케이크를 선물했다. “그때 그 케이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케이크였을 거예요. 제대로 된 진짜 케이크 말이에요. 장난감도 기억나죠. 그전까지는 새 장난감을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굉장히 불쾌하고 강렬한 경험이 우리 가족이 채식을 하게 만들었어요.” 호아킨은 형 리버와 누나 레인과 함께 수면 위로 펄쩍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을 구경하던 중, 어부 몇 명이 낚싯대로 잡은 물고기를 떼어내 못이 튀어나온 벽에 난폭하게 집어 던지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피닉스는 그간 베네수엘라의 비치 하우스에 살며 거리에서 신을 찬양하는 동안 부모님이 요리해주신 생선이 실은 눈앞에서 갑판 위에 던져져 무력하게 펄떡이며 고문 끝에 죽어가는 생명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너무나 잔인했고 강렬했어요. 형제들이 ‘왜 우리가 먹는 생선이 바로 저렇게 죽어간 물고기였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어요?’라고 소리를 치며 따지자 어머니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할 말을 완전히 잃은 표정이었죠. 어머니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해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셨던 거죠.”

그로부터 두 달 후, 플로리다 윈터파크에 자리를 잡은 피닉스 가족 전부가 채식주의를 받아들였다. 1979년에는 온 가족이 스테이션 웨건을 몰고 할리우드로 떠났고, 뜻밖에도 피닉스가의 자녀들은 연기와 노래를 하며 <패밀리 타이즈>와 <힐 스트리트 블루스> 같은 TV 드라마에 출연하고 채식주의와 동물권을 옹호했다. 이때는 성을 보텀에서 피닉스로 바꾼 후였으며, 피닉스가의 장남이자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아름다운 리버 피닉스도 그러한 가족 극단의 일원이었다.

스튜디오 시티에 위치한 일식당 아사네보. 채식주의를 선택하게 된 배경을 듣고 나니, 해초 샐러드를 향해 젓가락을 뻗는 호아킨 피닉스를 보며 문득 내가 주문한 고등어회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든다. “괜찮으니 드시던 거 드세요”라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검은색 티셔츠와 롤업 팬츠를 걸치고 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를 쓸어 넘긴 모습으로 덧붙인다. “진화가 덜된 사람도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는 농담을 던진 것이다. 아마도 농담이 맞을 것이다.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여운을 즐기더니 “당신의 결정에 달린 거죠”라는 한마디와 함께 광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피닉스의 엄격한 윤리적 기준과 코미디 감각, 그리고 특유의 웃음은 배우로서의 재능을 이루는 근간이다. 여기에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면이 더해진다. 피닉스는 영화 <조커>에서 아서 플렉을 맡아 번번이 벽에 부딪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인간을 향한 극도로 잔인한 폭력성이 들끓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외톨이를 선보였다.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그의 낄낄거리는 히스테릭한 웃음소리와 멋쩍은 미소, 그리고 느리게 꿈벅이는 두 눈은 DC 코믹스의 <배트맨>의 빌런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비통함과 인간성을 드러낸다. 코믹북 원작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낸 자리를 정신 질환과 소외, 나르시시즘, 잠재된 분노로 고통받는 극단적 자경단원의 모습으로 채운다. 1970년대의 암울한 고전 영화, 특히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가 함께 만든 작품들에 대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오마주이기도 한 <조커>는 소외된 백인 남성이 드러내는 공허한 흉폭성을 솜씨 좋게 묘사함으로써, 작년 여름 텍사스 엘파소와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일어난 현실 세계의 냉혹함과 할리우드에서 묘사하는 잔혹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조커>의 베니스 영화제 초연 후, 최근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소위 인셀, 즉 ‘비자발적 독신주의자’와 다름없는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불거졌다. 기억력이 좋은 이들은 <조커>와 <택시 드라이버>의 유사성을 보며 1981년 로널드 레이건에게 총격을 가한 존 힝클리 주니어에게 스콜세지 감독의 1976년 작 <택시 드라이버>가 부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했다. <버라이어티>는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반영된 보기 드문 코믹북 원작 영화”라는 평을 내놨지만, <베니티 페어>의 리처드 로슨은 <조커>가 “영화가 병적으로 묘사하는 바로 그 캐릭터를 무책임하게 선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쓰며 또 다른 입장을 대변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조커>의 황금사자상 수상은 더 큰 논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관객이 편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갖지 않았어요. 불편하고 어려운 영화죠. 어떤 의미론 사람들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게 나은 것이기도 해요”라고 피닉스는 언론의 반응에 대해 얘기한다. 피닉스는 설명하는 대신 <조커>가 그 자체로 보이기를 원하는 편이다. 그가 연기한 조커에 대해서도 “굉장히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요. 누구나 그렇듯 남에게 존중받고 이해받고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캐릭터로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이가 비정상적으로 자기에게 집착해주기를 원하는 인물로 볼 여지도 있거든요. 광기의 중심에 서 있어야 만족할 수 있는 자예요.”
피닉스는 인간의 마음이 지닌 어두운 면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데 언제나 능했다. 린 램지 감독의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서 그가 맡은 역은 미성년자를 성폭행하는 부유한 남자들을 볼핀 해머로 때려죽이는, 정신적으로 망가진 암살자였다.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그녀>에는 우울함과 외로움 속에서 컴퓨터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역으로 등장했다. 2010년에는 힙합 래퍼로 성공하려는 자기파괴적 배우를 그린 모큐멘터리 <아임 스틸 히어>에 본인으로 등장해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인 모습을 보이며 모두를 당황시켰다. 게다가 <아임 스틸 히어>는 감독 케이시 애플렉이 후일 두 명의 여성 제작진으로부터 성추행으로 고소당하면서 픽션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기도 했다. 피닉스는 차기작 <마스터>를 통해 사이언톨로지 창시자 L. 론 허버드와 닮은 유사 종교 지도자를 열성적으로 따르는 불안정한 캐릭터를 맡아, 예술적인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그 후로 일련의 잘 만들어진 독립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시하고 무의미하고 유치한 것들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었어요.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말이에요.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어요. 프로이트식 정신 분석 결과라도 듣고 싶으실 테죠. 뭔가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피닉스의 연기에 깃든 어둠을 보고 있자면 그의 개인사에서 그러한 어둠의 뿌리를 찾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호아킨 피닉스가 “두 번째로 유명한 피닉스”로 불렸던 시절은 그리 멀지 않다. 1993년에 세상을 떠나 이제는 컬트적 전설이 되어버린 그의 친형 리버 피닉스의 동생으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누나 레인과 함께 친형의 죽음을 목격했다. 당시 조니 뎁이 공동 소유주로 있던 선셋 블러바드의 클럽 바이퍼 룸 앞에서였다. 이제는 호아킨이 가장 유명한 피닉스가 되었을 정도로 리버 피닉스에 대한 세간의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호아킨 자신은 그날의 비극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리포터들이 줄기차게 그의 형에 관한 질문을 해댄 탓이기도 하다. 침울하고 피폐하며 폭력적인, 불안감 가득한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능력이 자신의 흔치 않은 성장 배경과 비극적 개인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명확하게 얘기하지는 않지만, 호아킨이 그의 형과 형의 죽음에 막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에 대해선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대체 지금 이 인터뷰를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당신 때문에 앞으로 제 연기가 망가져버릴 거예요.” 반쯤은 농담 섞인 모호한 대답이다. 인터뷰 중간 피닉스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다. 할리우드 힐스의 가파른 골짜기에 세워진 그의 미션식 방갈로에 들어서니 그는 마침 주방에서 냄비에 고구마를 삶는 중이다. 주인과 마찬가지로 채식 반려견인 오스카와 소다에게 주기 위함이다. 소다는 커다란 흰색 핏불 믹스견인데 13년 전 안락사 직전에 구출해냈다고 한다. 직사광선 알레르기가 있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햇빛 아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피닉스는 소다를 데리고 해변에 나가기 위해 특수 옷을 제작했다고 한다. “엄청 멋있지만 정작 소다는 그 옷을 싫어해요.”

피닉스는 루니 마라와 함께 산다. 마라는 <그녀>에서 그의 전처를 연기했으며, 피닉스가 예수 그리스도로 등장한 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막달라 마리아>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맡기도 했다. (“누가 봐도 딱 저를 위한 배역이었죠”라고 그는 건조하게 말한다.) <그녀>를 촬영하는 동안 피닉스는 마라가 자신을 경멸한다고 믿었는데, 나중에 가서야 실은 그녀가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었으며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제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본 유일한 여성이에요. 처음엔 그저 친구 사이였죠. 메일을 주고받는 친구였어요. 하지만 제겐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얼마 전 피닉스는 십 대부터 시작한 담배를 끊어보고자 최면요법을 받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 듯하다. 손톱은 거의 끝까지 물어 뜯겨 있고 아메리칸 스피릿 두 갑과 라이터 몇 개를 항상 가까이 둔다고 한다. “전 정말 건강하게 먹거든요? 불량식품과 가공 음식을 싫어하죠. 그런데도 가끔은 감자칩을 한 봉지 다 먹어치우거나 서브웨이 샌드위치 같은 걸 먹어버리곤 해요.” <조커>를 위해 그는 의사의 지도에 따라 극단적으로 제한된 식생활을 한 결과, 몸무게를 23킬로그램이나 줄였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 11킬로그램 정도 붙기는 했지만, 영화 트레일러에 충격적으로 등장한 앙상하고 유령 같은 몸은 피닉스가 배역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서 플렉이 되기 위해 피닉스는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윗입술의 흉터와 사자 같은 시선부터 멍청해 보이는 미소, 부풀어 오른 어깨까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활용했다. 어깨 또한 입술처럼 타고난 특징이다. 필립스 감독은 피닉스가 “몸에 엉겨 붙은 타르를 떼어내는 멕시코만의 새” 같다고 말하며, 그의 몸이 최고로 흥미로운 형태를 지녔다고 한다. “그는 너무 아름다워요.”

<올드 스쿨>과 <행오버> 시리즈를 연출한 필립스는 일종의 안티 슈퍼히어로 영화를 염두에 두고 워너브라더스에 <조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CGI 효과나 만화 같은 설정을 사실상 완전히 배제하는 대신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쏙 빠진 어두운 리얼리즘으로 채운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이다. 필립스는 지금의 “깨인” 할리우드에서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음을 감지했고, 자기 특유의 불경스러운 남자식 유머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깨인 세상에서 웃기기란 쉽지 않아요. 코미디가 더 이상 안 통하는 이유에 대한 기사들도 있었죠. 그 이유가 뭔지 알려드릴게요. 왜냐하면 이제는 진짜 웃긴 사람들이 ‘빌어먹을. 사람들의 기분을 해치긴 싫으니까 이젠 안 할래’라는 식이거든요. 트위터에서 3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과 언쟁을 벌이는 건 힘든 일이에요. 그러니 ‘난 손 뗄래’가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모든 코미디의 공통점이 바로 불경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제 저는 코미디를 할 수 없게 됐잖아요. 그래서 저는 ‘불경하면서도 코미디를 엿 먹일 방법이 없을까? 그래, 코믹북 영화를 뒤집어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게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죠.”

그 결과 탄생한 <조커>는 한편으로는 할리우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남을 웃기는 데 실패한 소외된 백인 남성이 복수심 섞인 분노에 잡아먹히는 과정을 그렸다.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집필한 스콧 실버와 함께 필립스는 조커라는 인물이 탄생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의 고담시를 배경으로 출장 광대이자 정신 질환이 있는 외톨이가 만들어졌다.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같은 고전 영화의 느낌과 분위기를 참고했다. 필립스는 피닉스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만들었으며, 2017년 말 그에게 시나리오를 건넸다. 피닉스는 영화에 합류하기 전 네 달 동안 끝없는 질문공세를 펼쳤다. 그 과정에서 필립스는 피닉스에게 <조커>를 일종의 은행 강도 영화로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피닉스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액션도 거의 없잖아요.” 그러자 필립스는 웃으며 답했다. “워너브라더스에서 5천5백만 달러를 챙긴 후 우리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 작정이거든요.”

필립스와 달리 피닉스는 좀 더 개인적인 이유로 영화 출연을 결심했다. “70년대의 위대한 영화 작품들을 보면, 딱히 어떤 장르로 구분되지 않았던 그런 시기가 있었어요. 굳이 어떤 영화를 두고 드라마라고 부르지 않았던 거죠. 그저 영화였어요.

River Runs Through It
피닉스의 연기는 형과 형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다. 명확히 얘기하지는 않아도 말이다.

A Fleck Of His Former Self
피닉스는 탱고와 비슷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감독은 촬영감독에게 핸드 헬드로 찍기를 주문했고, 스태프들이 밖ㅌ 계속했다. 모두를 놀라게 한 그 장면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뜨거운 오후> 같은 영화도 그래요. 강렬하고 가슴 저리며 말도 못하게 웃기죠. 제가 사랑하는 건 그런 영화들이에요.” 아서 플렉이라는 캐릭터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나르시시즘과 범죄학을 공부했고, <오즈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 역을 맡은 레이 볼거와 버스터 키튼의 움직임을 연구하기도 했다. 플렉이라는 한 인간의 광기를 정확하게 표현해낸 기이하고도 섬뜩한 춤은 이렇게 탄생했다.

각본대로라면 플렉이 수차례 살인을 저지른 후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총을 숨길 곳을 찾는 신이 있었다. 하지만 피닉스와 필립스가 보기엔 영화와 맞지 않는 어색한 장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던 중, 필립스는 영화를 위해 새롭게 작곡한 음악을 피닉스에게 몇 곡 들려주었고, 피닉스는 탱고와 비슷한 우아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필립스는 촬영감독에게 핸드 헬드로 피닉스를 찍기를 주문했고, 스태프 250명이 바깥에서 기다리는 동안 셋은 방 안에서 촬영을 계속했다. 모두를 놀라게 한 그 장면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트레일러에서 배경에 깔린 곡은 지미 듀랜트의 ‘스마일’이었다.

여러 의미로 <조커>의 뮤즈가 되어준 건 함께 출연한 로버트 드 니로다. 드 니로는 조니 카슨을 모델로 한 심야 토크쇼의 호스트 캐릭터를 연기했다. “드 니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 배우예요.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있건 말건, 그리고 촬영이 되고 있건 말건 상관없이 주어진 신 속에서 특정 행동과 몸짓, 그리고 움직임을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피닉스는 계속해서 얘기한다. “저는 연기란 다큐멘터리와 같아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자신이 느끼는 게 무엇이든 그걸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해요. 캐릭터의 생각과 감정이라고 짐작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그러나 의외로 피닉스와 드 니로는 촬영 현장에서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둘의 연기 방식이 비슷한 게 한 원인이고, 작품을 찍을 때 갖는 일종의 미신 때문이기도 했다. “촬영장에서 드 니로와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어요. 첫날 아침 인사는 했지만 그 후로는 거의 말이 없었죠.” 드 니로가 부연한다. “각자 맡은 캐릭터의 특성상 대화가 전혀 필요 없었어요. 그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자, 극중 인물처럼 서로를 대하자’ 정도였죠. 그렇게 하면 훨씬 간단해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연기 방식으로 인한 이견이 발생하기도 했다. 드 니로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출연자들과 모여 진행하는 대본 리딩을 당연한 절차로 여겼고 그렇게 하길 원했다. 반면 피닉스는 과거에도 종종 대본 리딩을 기피하곤 했는데, 자기만의 예측 불가능한 “되는 대로”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필립스는 회상한다. “로버트가 제게 전화를 걸어 ‘피닉스에게 전해요. 배우면 배우답게 리딩에 참석하라고. 난 원래 영화의 대사 전체를 들어봐야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 다 같이 모여 대본을 읽자고’라고 했어요. 전 진퇴양난에 빠졌죠. 왜냐하면 호아킨의 입장은 ‘내가 리딩에 참석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야’였거든요. 한편 로버트는 ‘나는 촬영 전에 무조건 리딩을 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돼’라는 식이었으니까요.”

결국 맨해튼에 위치한 드 니로의 제작사 사무실에서 열린 대본 리딩에 참석한 피닉스는 시종 중얼거리는 말투로 대사를 읊었고 리딩을 마친 후에는 구석으로 가 담배를 피웠다. 드 니로가 다른 층에 있는 자기 개인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하자며 피닉스에게 제안했지만 피닉스는 거절했다. “로버트 앞에서 ‘안 돼요. 집에 가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리딩을 마친 후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에요. 리딩이 싫었던 거죠”라고 필립스는 기억한다. 필립스는 떠나려는 피닉스를 강하게 만류했다. 어쨌든 로버트 드 니로 아닌가. 마지못해 승낙한 피닉스는 드 니로의 사무실로 올라갔고 둘은 몇 가지 사소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대화를 마친 후 드 니로는 몸을 돌려 두 손으로 피닉스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뺨에 입맞춤을 했다. “다 잘될 거야, 부블레(이디시어로 가까운 이를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라는 말과 함께. “정말이지 아름다운 순간이었어요”라고 필립스는 말한다.

지난 7월 워너 브라더스는 웨스트 할리우드 호텔의 시사회실을 빌려 기자들을 상대로 시사회를 진행했다. 피닉스가 연기한 아서 플렉의 광적이고 소름 끼치는 모습을 본 후 밖으로 나와 보니, 내가 끌고 온 렌터카가 견인된 상태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외지인이라면 흔히 겪는 사고다. 저녁 8시 30분이었고, 마침 호아킨 피닉스와 전화 통화를 하기로 예정된 시각 직전이었다. “지금 어디죠?”라고 피닉스가 물었다. 나를 구해주러 오겠다는 것이다. 위치를 알려주자 일순간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있던 곳은 바이퍼 룸 바로 뒤였기 때문이다. 이상하고 불운한 우연이었다. 피닉스는 잠시 멈춘 후 “선셋 블러바드에 있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느 도로예요?”라고 말을 잇는다.
아서 플렉의 끔찍하고 참혹한 모습을 보고 나온 직후라서일까, 1993년 10월 31일 밤의 가슴 아픈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호아킨 피닉스의 19세 생일로부터 3일이 지난 날이었다. 그는 리버와 레인과 함께 클럽을 찾았다고 한다. 바이퍼 룸은 당시 할리우드의 온갖 악동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으며, 거기에는 키아누 리브스와 크리스티나 애플게이트도 있었다. 사건의 전말에 관한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유명한 기타리스트로부터 헤로인과 코카인이 든 액체가 담긴 종이컵을 건네받은 리버가 그걸 들이켰다는 것이다. 부검 결과 치사량을 한참 넘긴 양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클럽 앞 보도에서 리버가 경련을 일으키는 동안 레인은 어찌할 줄 모르고 발만 굴렀다. 호아킨은 911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극심한 공포에 빠진 호아킨의 가슴 아픈 통화 기록은 미국 전역의 신문에 실리게 된다. “제발 우리 형을 구해주세요. 제발요! 제발!”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 낡고 오래된 검은색 렉서스를 타고 등장한 피닉스는 흰색 가라데 도복 바지에 곱게 해진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은 채 담배를 물고 있다. 뒤로 넘긴 머리는 빗어 넘겼다기보다는 억지로 잡아당겨 고정시킨 것 같다. 가라데 연습을 막 끝내고 온 참이라며 근처의 호텔 로비로 들어간 그는 내 차의 행방을 찾기 위해 지배인을 불러 도움을 청한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할리우드 견인센터로 차를 몰며 레이 볼거와 피닉스가 최근 체험한 한냉요법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영하의 온도에 신체를 노출시키는 치료법으로, 굉장한 경험이었으며 꼭 해보라고 권한다. 텅 빈 거리에 자리한 차고지는 형광등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부모님은 우리를 방치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호아킨과 그의 형제들이 어렸을 때 피닉스 일가는 미국에 있는 ‘신의 자녀들’ 공동체에서 떨어져 베네수엘라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 1977년 “플러팅으로 낚시하기”라는 새로운 교단 지침이 담긴 교주의 서신을 받게 되었는데, 결국 성을 미끼로 신도를 모집하라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런 지침이 내려왔고, 부모님은 ‘웃기지 말라고 해. 우리는 관두련다’라고 하셨죠. 부모님은 이상주의자였어요. 당신들과 같은 신념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거라 믿으셨죠. 그리고 불과 몇 년 사이에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민권운동 지도자들을 암살한 나라를 떠났죠. 저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심정이었을 거예요.”

이름을 하트로 바꾼 피닉스의 어머니의 후술에 따르면 당시 교단을 떠난 후, 상처와 외로움을 이겨내기까지 수년이 걸렸다고 한다. 일가족이 플로리다에 도착한 후에도 노래와 춤은 계속되었다. 리버와 레인은 한 팀을 이뤄 여러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지역 미디어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오래전에 입은 허리 부상 때문에 피닉스의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며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어머니는 자녀들에 관한 기사를 오려 오래된 지인이자 ABC 방송국의 시트콤 <래번 앤드 셜리>에 출연 중인 페니 마샬에게 보냈다. 마샬은 답장을 보내 피닉스 가족이 로스앤젤레스에 올 계획이 있으면 사무실로 한번 찾아오라고 하면서도, 예정에 없는데 일부러 오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럼에도 새로이 피닉스라는 성을 갖게 된 호아킨의 가족 모두 스테이션 웨건에 짐을 싣고 로스 앤젤레스로 향했다. “그때 우리는 ‘마샬이 그 정도로 얘기하는 거라면 가도 되겠지’라는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결국 만나지는 못했죠”라고 하트 피닉스는 당시의 상황을 얘기한다. NBC의 고위 임원 비서 자리를 구해 일을 시작한 하트는 아이리스 버튼이라는 아역배우 에이전트를 알게 됐고, 그를 통해 아이들은 광고와 TV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아이들은 리버의 자작곡 ‘Gonna Make It’을 부르거나 노란 티셔츠와 반바지를 맞춰 입고 길에서 버스킹을 했다. 호아킨은 브레이크 댄스에 빠졌다. 그들의 부모는 아이들을 절대로 탄산음료나 패스트푸드 광고에 내보내지 않을 정도로 윤리적으로 엄격한 동시에 완전히 자유분방한 면도 있었다. 호아킨이 자신의 이름을 바꿔도 되냐고 묻자 어머니는 된다고 했고, 마당에 떨어진 나뭇잎을 갈퀴로 모으고 있던 아버지에게까지 허락을 받은 후 리프(Leaf)가 그의 새 이름이 된 일화가 있다.

어떤 의미론 리프 피닉스 시절 맡았던 배역들이 향후 그의 연기 커리어를 확립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 프리젠츠>의 한 에피소드에서 피닉스는 살인사건을 목격한 후 살인범을 협박할 계획을 세우는, 청각 장애가 있는 부잣집 도련님을 연기했다. 또한 의 ‘거꾸로 읽기: 난독증의 수수께끼’ 편에 리버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롭 라이너 감독의 1986년 작인 청소년 드라마 <스탠드 바이 미>로 성공을 거둔 리버는 순식간에 청춘 스타로 부상했고, 덩달아 피닉스 가족도 약간의 유명세를 누리게 되었다. 1987년 그들에 대한 기사가 “대단한 히피 가족”이라는 표제어를 달고 <라이프>지에 등장했는데, 그 잡지에 실린 사진 속에서 리버는 호아킨의 코를 부러뜨리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Throughout
헤어 제품, 케빈 머피. 그루밍 제품, 뷰티 카운터.

80년대 후반 피닉스는 <스페이스 캠프>와 <루스키스>와 같은 고만고만한 아동용 영화에 출연하고 있었고, 나름의 인지도를 얻어가는 중이었다. 당시 그는 괴짜에다 과잉 활동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올랜도 센티넬>지의 프로필 기사는 당시 리프로 통했던 열네 살의 피닉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으며, 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때로는 반쯤 일어나기도 했다. 모터가 달린 스케이트보드를 잠깐 타고 돌아다니더니, 한 번은 바닥에 엎드려 조그마한 검은색 벌레를 관찰하기도 했다. 리프는 동물권을 옹호하며 튀긴 두부를 좋아한다. 더 많은 사람이 세계 평화에 관심을 갖기를 원한다.”

피닉스는 자신이 연기의 힘을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1984년 <힐 스트리 블루스>를 촬영하면서부터 라고 말한다. 경찰서에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부친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장면이었는데, 피닉스는 변호인의 얼굴을 후려친 후, 제지당하면서 발길질하고 소리치는 연기를 했다. “감독이 ‘컷’을 외친 후 촬영장에 있던 스태프와 다른 배우들의 표정을 봤죠. ‘우와’라며 감탄하고 있었죠. 절정에 도달한 듯한 순간이었고, 저도 똑같이 느꼈어요. 몸이 저릴 정도였으니까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감각이에요. 태어나 처음으로 술을 마시거나 대마초를 피웠을 때랑 비슷한 감각이에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에 온몸이 반응했던 거죠.”

피닉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이 하는 얘기를 다시 생각해본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정말로? 왜냐하면 누군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저는 ‘그래봤자 일곱 살이었잖아. 진짜 그 나이에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고?’라고 할 것 같거든요.” 당시 피닉스는 열 살이었다. 그 후 로스앤젤레스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피닉스 가족은 플로리다로 되돌아가 게인스빌에 터를 잡았고, 리버는 코스타리카에 가족 목장을 마련했다.

<허공에의 질주>와 <인디아나 존스> 출연으로 리버의 명성은 계속 커져 갔지만, 매력적인 배역을 따내지 못한 호아킨은 연기를 쉬기로 하고 아버지와 함께 멕시코 해변가에 머무르며 스페인어를 배우고 모터사이클을 즐겼다. 호아킨이 미국으로 돌아와 보니 리버는 구스 반 산트 감독과 함께 독립영화의 고전이 된 <아이다호>를 찍고 있었고, 그는 동생에게 영화 예술에 대해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집에서 형이 ‘우리 같이 <성난 황소> 보자’라는 얘기들을 했어요. 그러면 저는 ‘그게 뭔데?’라고 대답하기 일쑤였죠. 그전까지 저는 <캐디쉑>이나 <스페이스볼> 같은 영화를 보는 애였거든요. 아니면 우디 앨런 감독의 코미디를 보거나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리버가 묘한 예언을 했다고 한다. “저한테 이름을 다시 호아킨으로 바꾸라고 권했어요. 그리고 6개월인가 후에, 우리가 플로리다 집 주방에서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그러더라고요. ‘너는 배우가 될 거고 나보다 더 유명해질 거야’라고요. 저와 어머니는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서로를 쳐다봤죠. 형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당시 저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연기를 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형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어요. 그때의 저는 도저히 이해 못할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물론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그걸 어떻게 알았지?’라고 생각하지만요.”

피닉스는 열여섯 살일 때 우편으로 죽은 개구리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생물학 수업에 사용할 해부용 개구리였는데, 그 때문에 그는 학업을 중단했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자 그는 “그럼 경찰을 불러 저를 체포하시던지요”라고 응수했다. 그즈음 그는 론 하워드 감독의 <우리 아빠 야호>에 성적인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는 음울하고 어눌한 청소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호아킨이 배역에 정서적으로 굉장히 몰입해 있었다고 하트는 말한다. 특히 호아킨이 연기한 인물이 극중 아버지의 치과의원을 때려 부순 후 감정을 주체 못해 울기 시작한 장면에서 그러한 몰입이 정점에 달했는데, 촬영을 마친 후 “촬영 세트에 올라가 아들을 안아줘야 했어요. 극중 인물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였거든요”라고 하트는 당시의 상황을 얘기한다.

피닉스의 말에 따르면 그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바이퍼 룸 같은 클럽을 자주 찾는 단골이 아니었다. 1993년 형 리버가 바이퍼 룸에 갔던 것도 음악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형에게 그런 곳은 일상과 거리가 멀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그건 형의 삶이 아니었어요. 그날 밤 형이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전까지만 해도 형은 그저 자기가 만든 신곡을 저에게 들려주며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리버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은 미디어의 관심을 피해 코스타리카에 몸을 숨겼다. 아들이 겪은 비극적인 사건이 할리우드의 젊은 배우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화로 탈바꿈해 끝없는 신화와 음모론으로 번져나가는 와중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죠. 끔찍했어요. 신문도 전혀 안 봤고, 모든 걸 두고 떠나버렸어요”라고 하트는 말한다. 피닉스 가족은 수개월간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리버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족 중 처음 코스타리카에서 나온 것은 호아킨과 어머니였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신작 <투 다이 포>의 배역 오디션을 보기 위해 둘은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도착한 피닉스는 삼 년간 연기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피닉스를 보자마자 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슬픔이 꽤 컸어요”라고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말한다.

성인이 된 피닉스는 첫 신에서 머리를 밀고 죄수복을 입었다. 중얼거리는 말투의 범죄자로 출연한 그는 한없이 어두운 눈빛을 가졌고, 윗입술의 흉터는 그런 어두운 면을 부각시켰다. 그가 지닌 원시적 힘은 상처받기 쉬운 여린 면과 함께 일종의 비극적 존재감을 내뿜었다. 혹은 그가 리버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그렇게 보았던 것일까?

몇 년 후 피닉스는 그의 연기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배역, 조니 캐시(캐시의 친형 또한 캐시가 열두 살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를 위한 완벽한 변신에 성공했는데, 그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친형의 죽음이 연기에 끼친 영향에 관한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질문이 너무나도 싫었던 피닉스는 자신을 “애도하는 동생”으로 보는 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자택 뒤편의 그늘진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피닉스는 지난 수년간 그런 유의 질문에 자신이 보인 반응을 돌이켜본다.
“배우로서 대중 앞에 섰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일에 대해 입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 찾아왔어요. 5분짜리 인터뷰든 뭐든, 5분마다 그런 질문을 받았죠. 빌어먹을 영화 시사회 기자회견에서도 상황은 똑같았어요. 그때의 제 심정은 ‘자, 그런 얘기를 하기 적절한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불순한 의도가 있어 보이며 진심으로 걱정하고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꾸며내려는 게 훤히 보이지만, 다 집어치우고 솔직해져보자’였죠. 하지만 그냥 ‘됐고 저리 꺼져’라고 해버리는 게 훨씬 나았어요.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편하고 쉬운 일이었죠.”

어쨌든 피닉스는 캐시를 연기함으로써 자신이 배역에 녹아들 수 있는 기묘한 힘을 가진 배우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제가 배우로서 겪는 경험들이 제 안에서 더욱 깊어지고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어떤 깨달음 같은 건데,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한 걸음 한 걸음 춤을 추듯 다가가는 느낌이었어요.” 조니 캐시를 연기한 경험에 대해 피닉스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형의 죽음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영화 <시민 케인> 속 케인의 내면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인 로즈버드 같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러 로즈버드 중 하나예요.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로즈버드는 아니에요. 전혀 달라요.” 피닉스는 오히려 아서 플렉이나 조니 캐시 같은 캐릭터와 자신과의 유사성이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에게 “태아기” 때부터 깃든 “우주적 불안감”에서 온다고 추측한다. “뻔한 얘기지만 선천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성향의 조합인 것 같아요.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받은 가정교육도 한몫했겠죠.”

하지만 여전히 리버의 죽음은 민감한 주제다. <조커>를 만들며 피닉스와 친해진 필립스조차 리버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건 어려웠다고 한다. 인터뷰 중 내가 바이퍼 룸 사건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돌아온 피닉스의 답변은 “당신은 정말이지 훌륭하고 진실된 인간이네요. 비꼬는 것처럼 들릴 텐데, 비꼬는 거 맞아요”다. 올해 리버의 기일에 맞춰 레인은 <리버>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다. 리버에 대한 기억과 그의 생전 모습과 활동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음반에는 마이클 스타이프와의 듀엣도 포함되는데, 녹음에 들어가기 전 레인은 이 비극적 사건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호아킨을 포함한 피닉스 가족 전원의 허락을 구했다. 하트의 말에 따르면 호아킨은 피닉스 가족의 “가장”이다. 그리고 피닉스는 레인에게 그녀의 경험을 털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일식당에서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분위기가 거북해졌다. 피닉스에게 아버지는 요즘 어디에 계시는지 물어본 것이다. “아버지는 천국에 계시죠.” 심드렁한 대답이다. 잠깐, 그건 어디지? 코스타리카에 있나?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에요”라고 피닉스는 다시 말한다. 살아계시겠지?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아버지도 불러서 얘기를 해보죠.” 비꼬는 말투다. 아닌 게 아니라, 뉴스가 되진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4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당신의 사전조사에 허점이 마구 보이기 시작하네요. 설마 제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두고 농담을 하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전 그런 농담을 하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그는 농담을 끌고 갔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지 생각은 해본다. “엉망진창이겠죠! ‘농담이에요’라고 계속할 걸 그랬나 봐요!” 피닉스는 웃음을 터뜨린다. 식사 후 주차요원이 렉서스를 가져오기를 기다리며 그는 또 한 번 농담을 시도한다. “아까는 장난이었어요. 아버지는 살아계세요.” 즉각 반응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가 진짜냐고 물어봤다. “아뇨. 돌아가셨어요. 미안해요.” (돌아가신 게 맞다.)

마치 2010년 개봉한 <아임 스틸 히어>의 한 장면이 지나간 것 같다. 이처럼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감쪽같이 흐리는 재주 덕에 피닉스는 대중이 보는 자신의 실제 모습과 아마추어 힙합 아티스트라는 가공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그는 할리우드 연예계를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 캐릭터를 통해 전라의 매춘부와 몸을 섞으며 마약을 흡입하는 ‘호아킨 피닉스’를 그렸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피닉스가 한때 바닥까지 갔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어제 영화 시사회 기자회견을 갔는데 브라질에서 온 어떤 사람이 ‘요즘도 음악을 만들거나 랩을 하나요?’라고 묻더라고요. 저는 ‘진심이세요?’라고 대답했죠.”

그러나 2010년 <아임 스틸 히어>의 허구와 현실의 선은 더욱 흐려졌다. 영화의 프로듀서와 촬영감독이 감독 케이시 애플렉을 성추행 및 성희롱, 그리고 정신적 고통 유발로 고소한 것이다. 둘은 코스타리카에서 촬영하던 중, 피닉스와 애플렉이 자신들의 방에서 두 명의 여성과 성적 행위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또한 소장에 따르면 라스베이거스의 팔라조 호텔 장면을 찍기 위해 저녁 촬영에 “몇 명의 매춘부를 끌어들였으며 거기에는 남성 복장 도착자도 포함”되었었다고 한다. 원고들에게는 “호텔 스위트룸에서 일어난 행위는 영화 상영본에 전혀 실리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되었으며, 모든 건 순전히 애플렉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애플렉은 피닉스의 매제(애플렉은 피닉스의 여동생 서머와 결혼한 사이였다)였고, 소송으로 인해 영화의 허구적 장치에 불편한 허점이 드러나는 듯했다. 피닉스가 겉보기와 다르게,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놈팽이에 가까운 인물인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피닉스와 애플렉은 1995년 <투 다이 포>의 촬영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애플렉과 피닉스의 누이동생이 결혼을 한 2006년 이전엔 둘은 뉴욕의 같은 건물에 살며 맨해튼의 밤 문화를 함께 즐겼다. 심지어 이탈리아에서 똑같이 오른팔 아래쪽에 검은 원 모양의 문신을 새긴 적도 있다.
피닉스는 변호사가 자기한테 애플렉의 혐의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애플렉은 2010년에 피해자들과 합의를 봤다. 작년에 피닉스는 <가디언>지의 잰 브룩스에게 권력 불균형으로 희생당한 피해자들에게 공감이 가며, 지난날 목격한 권력 남용 사례들에 더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얘기는 꺼내지 않았으나 애플렉 사건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자신이 성폭력 현장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다는 점은 분명히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후 애플렉과 여동생의 이혼이 피닉스와 애플렉 사이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그는 “수년간” 애플렉과 접촉이 없었다고 한다. “동생은 그와 이혼했어요. 그리고 저는 오랫동안 그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는 접촉하지 않았어요. 삼사 년 정도 됐을 거예요.”

최근 들어 허구와 현실의 경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불분명해졌다. 지난여름 유니버설 픽처스는 엘파소와 데이턴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후 가공의 인간 사냥터를 다룬 “사회 풍자 스릴러 영화” <더 헌트>의 개봉을 취소한 바 있다. 코믹북 캐릭터가 기반이기는 하지만 <조커> 또한 자기 정당화 논리로 무장한 외톨이 총잡이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최근의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과 불편할 정도로 유사하다. 필립스 감독은 모방 폭력 문제를 민감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운명론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드는 영화는 결국 가공의 세계 안에 살아가는 가공의 캐릭터에 관한 것이고, 관객도 그렇게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죠. 사방천지 모든 게 범죄와 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마는 이 형편없는 세상을 두고, 영화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조커>가 전하고자 하는 말이에요. 다 같이 폭력을 행하자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사회를 돌아보고 반성하자는 거예요.”

피닉스는 조커 배역을 맡기로 결심하기 위해, 척 봐도 사악한 캐릭터에 자신이 복잡함과 인간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봐야 했다고 한다. “대본을 읽으며 문득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빌런을 동정하거나 공감하게 되는 영화를 만들려는 거지?’ 그건 왜냐하면 그게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이에요. 다들 단순한 해답을 원하고 악역을 그저 비난하고만 싶어 하죠. 그게 더 쉽기도 하고요. 어떤 대상이 사악한 것으로 확인되면 우리의 마음은 편해지거든요. 마치 ‘나는 남부 연합기도 갖고 있지 않고, 백인우월주의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으니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야’라고 생각해버리는 것과 같죠. 하지만 그건 건강한 사고방식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백인 안에 분명히 내재하는 인종차별주의든 뭐든 진정으로 점검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너무 간편한 방식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조커라는 빌런을, 이 사악한 인간을 제대로 파보자고 생각했죠.” 피닉스의 얘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영화가 그런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는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가치를 갖는 거예요. 관객들이 캐릭터의 양 측면을 함께 이해하고 경험하며 그 가치를 알아봐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현재로서 피닉스와 필립스는 주로 십 대를 겨냥한 대규모 액션 블록버스터 못지않은 흥행 실적을 올린 작품에 작가주의 비슷한 느낌을 슬며시 녹여낸 것이 만족스럽다고 한다. 결과적으론 은행털이에 성공한 셈이다. 필립스의 집에서 완성본을 처음 본 피닉스가 영화를 위해 모험하기를 잘했다며 흡족해했던 것을 설명하는 필립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 얘기를 다시 하는 지금 또 눈물이 나네요.”

피닉스는 불현듯 떠오른 듯 말했다. “어젯밤 루니가 저에게 ‘당신이 얼마나 많은 좋은 기회들을 누리며 살아왔는지 알고 있어요? 지금껏 찍은 영화들이 얼마나 대단한 기회들이었는지 알아요?’라고 묻더군요.” 그는 전날 루니 마라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줬다. “맞는 말이라고 대답해줬어요. 저는 정말로 행운아였어요. 이보다 더 크고 귀한 경험을 또 할 수 있을까 싶은 영화가 너무나 많았죠.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였어요. 또다시 이런 영화를 만나게 된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지난날의 피닉스는 아서 플렉처럼 모든 걸 바쳐야 하는 역할을 연기한 후에는 늘 공허함과 신경증과 씨름을 해야 했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홍보하면서도 늘 불안해했다. 자신의 연기에 종종 걱정이 들었고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보지 않는 건 흔한 일이었다.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컨트리 스타 조니 캐시에 관한 영화 <앙코르>를 찍은 후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실제로 재활센터에 입원하기도 했다. 마흔네 살이 된 지금의 그는 캐릭터와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데에 더 익숙해졌다고 한다. 피닉스의 집 안 탁자 위에는 가짜 콧수염과 턱수염이 부착된 흰색 스티로폼 두상이 놓여 있다. <아임 스틸 히어>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소품이다. 배우로서의 호아킨 피닉스가 있는가 하면 나와 만난 지 일주일 후 금연에 성공한, 그리고 곧 결혼할 호아킨 피닉스가 있다. “최면요법 덕분에 끊었죠”라고 한다. 그러고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결국 실패했어요” 라고 그는 고백한다.

“제게 영화는 늘 힘들었어요. 최근에야 괜찮아졌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어쩌면 안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지’라거나 ‘어쩌면 즐기지 못할 수도 있어. 어쩌면 작품과 내가 연결되는 느낌을 못 받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영화를 마친 후 공허할 수도 있어’라는 생각은 들지만 괜찮아요. 왜냐하면 이제는 제 삶의 다른 부분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게 저를 지탱하는 거예요. 즐거워요, 이제는. 저는 제 인생을 사랑해요. 정말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