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스포츠의 불공정 계약

2020.03.12GQ

프로 e스포츠 선수는 20세 전후로 전성기를 맞는다. 가상 세계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사이 현실에선 불공정 계약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

2019년 말, 리그오브레전드(LoL) e스포츠 미성년 선수 이적 과정에서 발생한 불공정 논란이 국내외 e스포츠 업계를 뜨겁게 달궜다. 수많은 기자와 관계 기관, 국회의원이 달려들어 이 사건을 조사했다. 그리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구단은 이익을 위해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선수를 협박해 중국으로 팔아 넘기려 했다. 협박 내용은 언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조악했다. 공개된 계약서에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독소 조항이 가득했다. 선수가 30일 이상 입원으로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우면, 구단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연락 두절 시 구단이 마음대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그동안 받은 돈에 5천만원을 더한 금액을 구단에 지급해야 한다. 에이전시는 독점 권한을 행사하며 선수의 이름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독점 에이전트 권한을 제3자에게 다시 부여할 수 있다. 부당하게 해임된 감독의 폭로가 e스포츠판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계약서를 작성한 구단과 모회사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말하며 사과문을 작성했다. 다른 구단에서는 즉각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며 입장을 발표했다. 저런 내용이 담기는 계약은 관행이 아니고, 대부분의 구단은 선수의 권익을 충분히 보호하고 있다는 반박이다. 당연한 말을 왜 이렇게 힘주어 해야 할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옛날 일이지만, 사실 프로게이머 불공정 계약과 사기는 꽤나 역사가 깊다. 한때 큰 이슈를 겪으며 침체됐던 한국 e스포츠는 오랜 노력 끝에 이제야 다시 인정받게 됐다. 당연한 일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은 과거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은 절박함 때문이다.

e스포츠 시장이 커지고 선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프로 데뷔 연령이 점차 낮아졌다. 당연한 일이다. 어린 선수일수록 ‘피지컬’이 좋다. 흔히 조작 능력이라 말하는, 게임 실력에 중요한 반응 속도와 인지 능력, 판단력, 멀티태스킹 능력을 종합해 이르는 용어다. 쉽게 말해 어릴수록 잘 쏘고 잘 보고 잘 피한다. 총알이 날아오면 10대는 보고 피하고, 20대는 예상해서 피하고, 30대는 맞아도 모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꾸준한 단련으로 감각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피지컬은 일반적으로 10대 후반에 정점을 찍고 20대부터 떨어지기 시작한다. 때문에 e스포츠 선수의 연령대는 어리고, 전성기도 다른 스포츠에 비해 짧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 e스포츠 선수의 평균 연령은 20.2세, 연습생은 17.4세다. 보통 중학교 때 발탁되어 육성군 활동에 들어가고, 고등학교 때부터 프로 생활을 한다. 가장 많은 나이대는 17세에서 19세다. 전체 프로 선수 중 33퍼센트에 해당한다. 경력은 5년 차까지가 90퍼센트로 절대적으로 많다.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e스포츠 선수 경력은 고등학생 때 데뷔해 5년 정도다. 어린 나이에 활동을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프로 데뷔를 앞둔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와 자신의 플레이에 환호하는 팬만 꿈꿀 뿐, 계약서가 가지는 무게와 각 조항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프로 스포츠 선수가 그렇겠지만 안정적인 직장과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여기에 선망의 직업인 e스포츠 선수가 사실은 이리 떼 사이의 양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선수는 물론 그 부모까지도 이 직업을 꺼리게 된다. 구단만이 아니라 시장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구단과 업계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하고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이번 사태를 되짚어보자. 프로 게이머 A는 한국 B구단 소속이다. 중국 C구단은 한국 B구단의 모회사에 A의 이적을 제안하면서 A에게 B구단과의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리고는 4~5년의 장기 계약 의사를 물어본다. 이후 B구단 대표는 A에게 C구단과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협상 기간 전에 구단이 선수와 접촉하는 ‘템퍼링’이기에 선수 제명이 가능하다고 협박했다. 결국 A는 C구단과 5년 계약을 맺는다. 불공정 계약서는 A와 B구단 사이에 있었다. 스포츠 이적 시장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A의 행위가 템퍼링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A는 템퍼링이 뭔지 몰랐다. 그저 대표가 윽박지르니 영구 제명이 두려워 계약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계약을 대신하고 선수를 보호해야 할 에이전시는 방관했다. 에이전시가 B구단의 법률 자문 로펌과 사실상 같은 회사였기 때문이다. 쌍방대리금지법 위반이다.

일이 커지자 B구단의 모회사는 C구단으로의 이적은 협박이 아니라 A의 자발적 의사였다며 맞섰다. 게임사의 조사 결과 발표는 석연찮은 면만 남겼다. 추가로 드러난 A에 대한 고소고발 협박은 슬쩍 묻혔다. 사회의 벽은 어린 선수에게 너무나도 높았다. 선수가 믿고 의지해야 할 코칭스태프도 평균 연령 28세로 사태를 감당하기에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개인방송에서의 폭로라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A의 부모는 일이 커지고 난 다음에야 방송에서 아들의 중국 이적 소식을 들었다. 5년을 외국에서 살아야 하는데. ‘구출 작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각계의 지원과 목소리가 없었다면 다른 결과로 마무리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사태 관련 청원은 11월 말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20만을 돌파했다. 2020년 1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답을 주었다. 요약하면 e스포츠 선수 관련 표준 계약서 제작 및 보급, e스포츠 선수 등록제 확대와 정착, e스포츠 선수 보호 시스템 체계화와 e스포츠 협회 내 분쟁조정위원회 설치 등이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일단은 문제의 핵심을 잘 짚었다는 평가다.

프로로 데뷔하는 어린 선수들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복잡하게 얽힌 조항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따지기보다는 대범한 결정을 내리기 일쑤다. 선수를 비하하려는 말이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미성년자고, 사회는 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다행히 대부분의 구단이 선수에게 충분한 설명과 충분한 대우를 해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구단의 양심과 배려일 뿐, 마음만 먹으면 선수들의 부족한 사회 경험과 지식을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 불공정 계약 사태로 밝혀졌다. 구단의 양심에만 기대기에는 선수가 짊어져야 할 위험 요소가 아직 크다.

문체부 장관의 답변도 이 점을 강조했다. 제도 개선으로 양심이 아니라 시스템을 통한 선수 보호 의지를 밝혔다. 아시안게임의 시범 종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e스포츠의 위상은 높아졌다. 이제야 이야기가 나오는 게 이상할 정도다. 하나 모든 제도와 기구가 그렇듯 운영진 측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 엄격한 관리감독 체계도 필요하다. e스포츠 선수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발표된 표준 계약서 사용과 꾸준한 실태 조사에 더해 e스포츠 선수와 지망생에 대한 의무 교육 제도의 정착과 홍보도 필요하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참지 말라는 말보다 무엇이 부당한 대우인지부터 말해줘야 한다. e스포츠 선수가 은퇴 이후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도 필요하다. 은퇴라고 해도 아직 사회에서는 취업 준비생이거나 사회 초년생 정도의 나이다. 게임에만 집중했기에 다른 일에 적응이 힘들다. 감독이나 코치 등 업계에 남으면 다행이다. 게임의 수명이 다하거나 리그 폐지로 은퇴한 경우에는 그런 희망도 없다. 은퇴한 이후 안정적으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이번 불공정 계약 사건은 과거 커다란 이슈가 됐던 아이돌 불공정 계약 사태가 떠오르게 한다. 둘 다 미성년자나 20대 초반 청년 대상이고, 둘 다 아이들의 꿈을 이용했다. 물론 두 영역 모두 현시점에서 불공정 계약을 강요하는 회사는 드물다. 인식이 바뀌었고, 사회도 바뀌었다. 그럼에도 피해자가 없지는 않다. 대다수는 본인이 불공정한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몰랐고, 인지해도 으레 그런 줄 알았다. 꿈의 실현에 불합리의 인정과 수용이 필수가 아님에도 아이는 꿈을 인질로 잡혔다. 이번 사태가 프로 e스포츠 선수들의 꿈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성장통이자 굳건한 발걸음이 되기를. 글 / 김강욱(게임 칼럼니스트)

    에디터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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