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고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2020.07.13GQ

고독은 시작이다. 고립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무중력의 사람들

글을 쓰는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그들이 죽은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 속하기 위해, 동시대에 존재하기 위해 글을 쓴다. 블로그에 쓰고 트위터에 쓰고 인스타그램에 쓰고. 메일도 쓰고 가끔 일기도 쓴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 않은 종류의 사람들이 향하는 수신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이다. 수신자의 물리적 부재가 글을 쓰는 사람을 작가로 만든다. 그러므로 작가는 필연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은 형체가 없고 발자국 소리도 없으며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뿐, 분명히 존재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까. 하지만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하기엔 과거와 미래의 유령들은 작가에게 너무나 실제적이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작가들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교류하며 그들에게 영향받은 글을 쓰니까.

발레리아 루이셀리의 <무중력의 사람들>은 고독과 글쓰기에 대한 텍스트이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해지는 소설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텍스트라고 부를 작정이다. <무중력의 사람들>의 화자는 여성으로 두 아이와 남편이 있다. 화자는 텍스트 속에서 소설을 쓰는데 그녀가 쓰는 소설은 <무중력의 사람들>인 동시에 이 텍스트에 들어가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소설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쓰는 소설의 화자인 또 다른 여성 또한 소설을 쓰고 그 소설 역시 <무중력의 사람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조금 혼란스럽겠지만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정상이니까. 작가인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혼란을 잠재울 생각이 없고, 텍스트 속의 화자는 고독한 유령들의 대화로 가득한 혼란 속으로 그러나 갈수록 고요해지는 모순적인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즐긴다. 소설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화자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점점 보이지 않는 존재들로 변해간다. 뉴욕의 지하철에서, 멕시코 시티의 중산층 가정에 놓인 화분을 가꾸며, 필라델피아의 멕시코 대사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시와 소설을 쓰며 각각의 고독한 존재들은 점점 자신의 존재가 시간 밖으로 물러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영원 또는 무와 교류하며 고요하고 텅 빈 공간 속으로 침잠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일까 또는 이 사람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글은 동시대를 반영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들은 혼자만의 세계(라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일까. 가끔 이런 글쓰기에 빠진 작가들을 보면 정말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대화를 나누지만 시선과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말이다. 이 작가들이 보는 건 눈앞의 현실이 아니다. 과거 또는 미래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람들의 현실이다.

역설적이지만 작가들이 고독 속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존재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현재라는 시제가 어떤 이들에겐 억압이기에, 그곳이 폭력과 위선, 무력함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창조한 과거와 미래의 유령들은 특정 시기에 존재했거나 존재할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만들어진 세계의 (가정된)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픽션적 존재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역설 아닌가. 고독은 우리의 잠재력을 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 밖의 시간이다. <무중력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멕시코의 시인 힐베르트 오웬의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은 아무도 우리를 모른다. ⁄ 시간은 우리를 움직이지 않는다.
⁄ 우리는 그저 존재하고 사랑하면서, ⁄ 우리를 가리는 모든 가식으로부터 벗어나, 기억을
새길 뿐. ⁄ 사람들은 영원불멸한 존재가 된 우리를 불러낸다.

글 / 정지돈(소설가)

Nummer acht,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 HD 비디오, 10분10초, 보트니아만, 핀란드, 2007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and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극한의 아티스트

하늘과 바다가 희미한 경계로 새하얗다. 눈과 얼음이 덮인 망망대해를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홀로 걷고 있다. 그 뒤로 쇄빙선이 얼음을 부수며 남자 뒤를 바짝 따라온다. 이 고독한 남자는 네덜란드 현대 미술가 휘도 판 데어 베르베 Guido van der Werve.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이 7월 11일까지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그는 핀란드 연안의 바다에서 스노 스쿠터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쇄빙선의 뱃머리보다 겨우 몇 걸음 앞서 걷는 퍼포먼스를 촬영해 10분 10초 길이의 영상 작품 <Nummer acht>(2007)로 완성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베르베는 장시간의 퍼포먼스 작업을 지속적으로 시도하며 숫자를 의미하는 네덜란드 어를 제목으로 붙여 발표하고 있다. 자신의 집 주변을 빙빙 돌면서 12시간 만에 마라톤의 2.5배에 달하는 거리를 완주하고 그 과정을 편집 없이 기록하기도 하고(2011), 북극점에 선 채 타임 랩스를 활용해 24시간 동안 지구의 자전을 부정하는 퍼포먼스를 정확히 24시간 동안 6초 간격으로 촬영하기도 했다<Nummer negen>(2007). 얼마 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7월 8일까지 열리는 아시아 기획전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에서 일본 작가 아츠시 와타나베의 작품을 보면서는 설원 속의 베르베를 떠올렸다. 두 작가는 반복적이고 수행적인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작업이라는 골조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한때 히키코모리였던 와타나베는 자신의 절박한 경험을 퍼포먼스로 재현해 영상 작업으로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 소개한 작품 ‘7 Days of Death’(2017)에서 작가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일주일간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전시를 다니다 보면 종종 타임 랩스, 다채널 등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육체적 고행의 요소를 지닌 퍼포먼스의 시간성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게 담아낸 영상 작품을 종종 만난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웠다. 보고 있으면 작가가 불쌍하기도 하고(도대체 왜 2평도 안 될 콘크리트 박스 안에 자신을 가둬야 한단 말인가!), 5분 정도 지나면 왜 이 쓸데없는 도전을 응시하고 있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런데 고비를 넘기고 이미지와 소리의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몰두’에 성공하면 고양감이, 영적 각성이 찾아온다. 아주 잠깐일지라도, 매우 미약할지라도. 일본의 불교 승려 일부가 행했던 종교적 의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나이칸 명상법으로 자기 성찰을 해온 와타나베는 자신의 작품을 ‘기시사이세이 Kishi Kaisei’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죽음에서 깨어나 삶으로 돌아가라’는 뜻을 가진 일본의 옛 관용구에 빗대어 콘크리트 박스 속에서 금욕적인 수행을 하며 순간적으로 죽었다가 7일째에 그 벽을 육중한 망치로 부수고 탈출하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두 작가 베르베와 와타나베의 정신적, 육체적 몸부림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 삶의 비의, 아무튼 초월적인 무언가를 그들과 진심으로 공유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식이나 의례 같은 행위를 미술에 도입한 작품을 볼 때면 미술가에게 샤먼의 아우라가 어른거린다.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대표적인 작가일 것이다. 2010년 뉴욕 모마에서 열린 40주년 기념 회고전에서 아브라모비치는 새 작업 ‘The Artist is Present’를 선보였다. 그녀의 작업은 물질적인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비물질적인 작업일 것이다. 흰 벽도 필요 없고 그저 의자 몇 개, 장미, 양초, 칼 등의 일상적인 물건이 필요할 뿐이다. 아브라모비치는 3개월, 총 700시간 동안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마 아트리움에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강조하건대 매일 7시간씩 무표정으로 그곳에 앉아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를 응시하는 게 이 작품의 전부였다. 너무나 비물질적이고 무자극적인 이 퍼포먼스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기록 영상을 보면 그곳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극적인 반응을 일으켰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모비치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핵심에 대해 밝힌 바대로 관객들은 그 의자에 앉아서야 비로소 일상에서는 한 번도 대면한 적 없는 자기 자신을 깊게 만났다.

이런 작품들을 만나면 오늘날 사람들은 주말에 교회 가듯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정화의 시간을 갖는다는 어느 아티스트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미술관에서 순도 높은 고독의 시간을 보장받는다. 반복적인 행위로 철저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어쩌면) 무용한 일에 투신해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아티스트들의 몸부림을 응시하면서 우리의 고독은 고양감으로, 영적 각성으로 번져간다.

글 / 안동선(프리랜스 에디터)

고립과 집념의 음악

인체는 시각에 ‘올-인’하도록 진화했다. 세상 밖을 인지하는 오감 가운데 생존에 필요한 감각의 70퍼센트를 시각에 의존하도록. 부차적 감각 기관인 청각에 골몰하는 음악은 그래서 생래적으로 변태적인 예술 장르다. 허무맹랑한 시간의 가상 공간 위에 만져지지 않는 소리로 집을 짓는 정신 나간 자들, 그들이 바로 음악인인 것이다. 이 건축은, 따라서 감각의 창문을 매몰차게 닫아 거는 철저한 고립에서 애당초 출발한다.

5월 초, 제주에서 음악가 조동익을 만났다. 최근, 26년 만에 신작을 낸 그는 두문불출로 정평이 났다. 아내 장필순의 귀띔에 따르면 그는 자기 집 마당에도 잘 안 나간다. “한번 음악 작업을 시작하면 며칠 간 컴퓨터 앞에 돌처럼 굳어 밥이라도 먹이려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소리치면 그제야 헤드폰을 벗는데, 머리에서 ‘쩍’ 소리가 나며 헤드폰이 분리된다”고 했다. 새 앨범 <푸른 베개> 크레딧을 보면 “by Jo Dongik at Studio Rainbow”라고 돼 있는데 이 ‘무지개 스튜디오’는 다름 아닌 조동익의 방이다. 올해 60세인 그는 ‘베드룸 팝’의 조용한 대부인지 모른다. 고립으로 그가 빚어낸 집념의 소리 건축은 회한이 흩날리는 신기루 같은 소리의 성으로 청자를 초대한다.

고립의 미학으로 치면 ‘우리집 건넌방’보다 혹독한 데가 있다. 감옥이다. 얼마 전 만난 이센스는 감옥에서 책을 100권쯤 읽었다고 했다. “왠지 이건 꼭 감옥에서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도 정독. 그 안에서 쓴 가사만은 왠지 오글거려 폐기했다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곧장 명작 앨범으로 승화한 이는 따로 있다. 고 신해철이다. 대마초 흡연 혐의로 1993년 1월 구속돼 출소한 그에게 남은 건 철학과 깡뿐이었다. 그가 이끄는 밴드 넥스트의 복귀작, 2집을 헤비메탈로 중무장했다. 대중음악사의 명장면으로 남은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1 : The Being>이다. 9분 53초짜리 프로그레시브 메탈 서사시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 껍질의 파괴’부터 ‘The Ocean : 불멸에 대하여’까지, 고립은 존재(‘The Being’)와 존재 밖(넥스트 3집 )을 고찰하게 하는 차가운 죽비가 된 셈이다.

작년에 테헤란로의 한 호텔에서 만난 나이절 고드리치는 프로듀서로서 라디오헤드의 3집 를 제작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영국 서머셋 교외의 호젓한 ‘성 캐서린 저택’을 몇 달간 통째로 빌려 먹고 자던 1996년의 날들. “제가 엔지니어로 참여한 라디오헤드 2집 <The Bends>의 첫 곡 ‘Planet Telex’는 바람이 몰려오는 듯한 노이즈로 시작하죠. 제가 만든 그 소리 하나 믿고 톰 요크와 네 명의 젊은이가 불현듯 찾아왔어요. 피 끓는 젊은이들끼리 제대로 파고들어 보기로 했죠. 저까지 6명이 그 저택에 틀어박혀 장비 연결 하나하나부터 모두 DIY로 해냈으니까요.” 돌계단에서 ‘Exit Music’의 보컬을 녹음하고, 어스름한 새벽 무도회장에서 ‘Let Down’을 녹음하다 잠이 드는 식으로 6명의 젊은이는 철저히 고립돼 동고동락했고, 1990년대 대중음악사에 기념비적 괴물을 탄생시켰다.

저택 하면 또 나인 인치 네일스요, 그 리더 트렌트 레즈너다. 배우 뺨치게 생긴 미모의 록 스타임에도 여성 편력에 탐닉하는 대신 ‘장미의 이름’ 속 수도사처럼 스스로를 고립시켜 자기 파괴의 사운드트랙을 뽑아내는 문제적 인물. 더욱이 2집 <The Downward Spiral>은 흉가에서 제작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도 잠시 등장한 ‘테이트 하우스’다. 찰스 맨슨 패거리가 배우 샤론 테이트를 참살한 집. 이 기구한 주택에 다시 스스로를 감금시킨 레즈너는 물건을 만들어냈다.

레즈너식 ‘인더스트리얼 고립’을 넘어 고립의 끝, 인간성 해체에까지 다다르면 드럼앤베이스/IDM 음악가 스퀘어푸셔가 버티고 있으리라. 그는 EP <Music for Robots>를 만들며 인간으로부터 자신과 음악 그 자체를 분리시켜버렸다. 일본 로봇 공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세 대의 특수 로봇을 제작한 뒤, 그들 손에 악기를 들려줘 녹음을 시켰다. 5년 전 서울에서 만난 스퀘어푸셔는 “느낌, 헌신, 열정 같은 영적 측면이 거세된 음악, 역학적 공정에 불과한 예술을 실행함으로써 인류가 구축한 예술의 신성 神聖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말이 있었다. 이제는 “침실에서 유명해졌다”가 가능한 시대다. 2020년 현재, 세상의 빛, 잠재적 스포트라이트는 광케이블과 5세대 이동통신을 타고 수억 개의 침실 창문까지 365일, 24시간 당도한다. 이제 우리는 1년 내내 태양 주위를 돌며 광활한 ‘베드룸 팝’의 멋진 신세계 위를 둥둥 떠다닌다. 고립은 곧 구도 求道의 퍼포먼스다. 마리아나 해구보다 더 깊은 자신의 우물 속으로 끝없이 침잠하는, 변태 變態의 시간이다.

글 / 임희윤(<동아일보> 기자)

고독, 침묵 그리고 건축가

“건축이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이 구축한 무질서 속에서도 고고히 자신을 지키고 있는 귀한 존재만을 건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건축이란 만에 하나 정도의 확률밖엔 없고 이를 갈아 맞추는 건축가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송두리째 불사르는 이들입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자서전인 <김중업,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에 나오는 이 구절은 안양에 자리 잡은 김중업 건축박물관 앞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정의를 이처럼 뜨겁게 담아낸 예가 있던가. 그 어떤 이라도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창작자로서의 건축가가 지닌 숙명을 격정적으로 전달하는 문구다.

창작을 외로움과 벌이는 개인의 사투라고 보는 건 18세기 서구 낭만주의 시대에 탄생한 클리셰이지만 실제로 고독의 산물인 것을 어찌하랴. 다만 건축가가 느끼는 고독은 여타 분야의 창작자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건축가는 인공 공간을 특정 대지에 구축하는 사람이다. 건축물의 외형, 프로그램 등 기본적인 사항은 물론이고 사용자의 동선과 연계되고 행동을 유도하는 여러 요소와 지역적, 도시적 맥락에서 앞으로 끼칠 영향까지 새로운 공간 하나를 구축할 때 고려할 사항은 수없이 많다.

길을 걷다가, 회의를 하다가, 밤에 홀로 스케치를 하다가 운명의 순간은 찾아오고야 만다. 다양한 감정과 기억을 쌓아갈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만들 공간의 방향과 디테일을 명확히 선택하는 시간 말이다. 그래서 건축이란 자기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자 결정할 때까지 정신의 설계방에 영혼이 고립되는 고독한 일이다. 프랑스의 탁월한 문필가인 에티엔 피에르 드 세낭쿠르는 1804년 소설 <오베르망>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존재를 관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열정의 침묵 속뿐이다.” 자신과의 독대를 업으로 삼는 건축가에게 침묵은 어떻게 다가갈까.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폴 발레리는 1923년 집필한 에세이 ‘외팔리노스 또는 건축가와 영혼과 무용’에서 건축물과 침묵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한다. 모든 건물은 사람과 소통하려는 욕망을 가지는데, 대부분의 경우 선천적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 건물은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정말 희귀하지만 어떤 건물의 경우 돌과 콘크리트의 몸을 지닌 채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18세기를 살아간 독일의 철학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건축이란 얼어붙은 음악”이라 비유한 대목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건축에서 침묵이란 말 그대로 아무 소리도 없는 무음의 상태일까. 행위예술가 이브 클라인은 기발한 관점을 선사한다. 1958년 그는 <텅 빔 Le Vide>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갤러리는 아무 작업도 존재하지 않고 ‘텅 비워진 상태’였다. 클라인은 전시에 대해 이렇게 발언한다. “내가 이곳에서 오늘 밤 보여주고 싶은 것은 갤러리의 흰 벽이 아니라 이곳의 회화적 분위기다.”
그럼 분위기는 어디에서 발현하는가. 태곳적 근원은 어디인가. 결국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공간일까. 아니면 다른 미지의 시각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명상적인 건축의 대가로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루이스 칸은 신비로운 영감을 준다. 그는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시 ‘침묵’이란 개념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침묵이란 매우, 매우 조용한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침묵은 빛이 없고, 어두움 또한 없는 상태다.”

빛과 어두움은 건축의 필수 요소다. 빛을 통해 우리는 건물을 명쾌하게 지각하며, 그런 빛은 어두움이 있기에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이런 빛과 어두움이 모두 없는 게 침묵이라면 그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루이스 칸은 말한다. “사람은 자연의 모든 법칙을 활용해 인공물을 만든다. 그렇다고 이를 자연이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우주의 영혼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침묵에서 나온다. 빛과 어두움조차 없는 침묵 말이다.”

문득 침묵에 대한 근사한 격언이 하나 떠오른다. “진정한 삶에 도달하고 싶다면 내면에 침묵의 수도원을 지어야 한다.” 건축가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침묵의 공간에서 태어나는 것들의 현신에 둘러싸여 우리는 매일을 살아나가고 있는 게 아닌지 자문해보는 밤이다.

글 / 전종현(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피쳐 에디터
    김아름
    사진
    김래영
    로케이션
    포포인츠 바이 쉐라톤 서울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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