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다섯 지역의 로드 트립

2020.07.19GQ

때로는 낯선 풍광이 자유와 상상을 담보하기도 한다. 다섯 명의 작가, 다섯 지역의 로드 트립.

동부 개척 여행
샌프란시스코 → 라스베이거스 → 켄자스시티 → 디트로이트 → 클리블랜드 → 뉴욕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은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1년 내내, 미국 전역을 가로질러 돌아다니면서 돈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차만 몰았다.” 스무 살 무렵 이 책을 읽었는데, 미국을 횡단하는 상상을 하면 늘 이 문장과 함께 소설의 주인공인 나쉬가 여행한 애리조나와 유타의 황야가 떠오른다. 1년간 자동차 여행을 한 나쉬는 길 끝에서 만난 한 청년과 전 재산을 걸고 포커 시합을 벌이다 모든 걸 잃게 되어 (역시 도박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과 함께)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게 되는데…. 강제 노동을 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지만 미국 여행을 하다 보면 그처럼 이상한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든달까. 우리 세대의 많은 이가 그러하듯이 어린 시절부터 미국 문화의 지대한 영향하에 있던 나는 미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동시에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간접 체험이 아닌 실제로 미국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한두 도시만 여행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을 것만 같고, 역시 횡단 여행 정도는 해줘야 할 것만 같다. 미국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늘 서부의 풍경이다. 자동차 여행을 하며 서부에서 동부로 끝 없이 향하고 싶다. 이왕이면 지프 랭글러를 타고, 항구 도시인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해 개척 시대에 미국인들이 향했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여정을 시작한다. 라스베이거스, 캔자스시티,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를 거쳐 현대 미국의 중심인 뉴욕으로 향하는 장거리 횡단 여행.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넘어 간단히 뉴욕에 도착했을 때와 자동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그곳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은 아무래도 다르지 않을까?
글 / 정영수(소설가)

블루스 투어
뉴올리언스 → 델타 시티 → 멤피스 → 시카고 → 뉴욕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영화들을 만들기도 했다. 2003년 그는 블루스 음악의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더 블루스> 7편의 총 제작을 맡았고, 직접 <고향에 가고 싶다> 편을 감독하기도 했다. 어떤 음악 형식도 자연에서처럼 그냥 생겨나 스스로 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려 그 음악의 형식을 처음 빚어내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 새로운 형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디선가 연주를 이어나가야 한다. 공연장이나 스튜디오 같은. 그리고 새로운 음악의 탄생을 반겨줄 청중이 있어야 한다. <더 블루스>는 흑인 음악인 블루스가 탄생한 시점부터 세계적인 음악으로 발돋움한 시기까지를, 블루스가 생겨나고 연주된 장소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보여준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미국 미시시피 델타 지역에서 시작해 흑인 음악의 영원한 고향 아프리카의 말리까지 가고, 빔 벤더스는 블루스 음반들이 녹음되었던 가구 공장의 스튜디오를 찾아다니고, 리처드 피어스는 미시시피에 이어 멤피스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블루스 이야기를 들려준다. 찰스 베넷은 뉴올리언스의 블루스 음악에 대해, 마크 레빈은 마침내 대도시 시카고까지 유행이 번진 시기의 블루스를 이야기한다. 마이크 피기스는 바다를 건너 영국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친 일을 필름에 담았다. 음악을 테마로 삼아 미국을 남에서 북으로, 서에서 동으로 관통할 계획을 세운다.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블루스의 자취를 따라 뉴올리언스와 미시시피 델타, 테네시주 멤피스를 거쳐 시카고와 뉴욕의 클럽들을 돌아보는 여정도 즐거울 것이다.
글 / 백민석(소설가)

고요한 침잠
바릴로체 → 페리토 모레노 빙하
어떤 삶의 형태가 뿌리내리고 있는지 상상이 잘 안 되는 장소가 있는데, 나한테는 남미가 그렇다. 커피는 어떻게 마시고, 빵엔 뭘 발라 먹고, 무슨 식물들이 길가에 자라고, 어떤 동물들이 밤에 서럽게 우는지, 짐작이 안 된다. 사람 사는 동네 다 비슷비슷하지 않나? 아니다. 다르다. 마음의 풍경은 길의 풍경을 닮고, 그렇게 달라진 마음의 풍경은 삶의 풍경을 바꾼다. 구글 어스로 아르헨티나 바릴로체에서 페리토 모레노 빙하 사이 어디쯤의 길을 클릭한 다음 바닥까지 내려가본 적이 있다. 적막한 도로 옆으로 강이 있고, 산이 있고, 얼음이 있고,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길을 달리는 일은 국경을 가로지르고(칠레와 아르헨티나), 기후대를 변경하고(열대, 온대, 냉대), 역사를 오르내리고(체 게바라), 화려했던 지난 예술을 복기하며(영화 <해피투게더>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자아의 밖에서 저 깊은 안쪽으로 꾸역꾸역 다가가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랜 시간 걷거나 운전을 하다 보면 오로지 나아가는 것 자체가 목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라는 해묵은 깨달음도 지나간 후, 위에는 별, 옆에는 강과 산, 바닥에는 흙, 사방에는 정체 모를 생명체들의 숨소리만 남아서, 나는 차를 멈춰 세우고 한동안 펑펑 울기만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인 삶을 견딜 수 있을까? 달리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계속 충만해질 수 있을까? 답을 찾진 못하겠지만, 나는 삶의 자오선 하나를 바꾸거나 없애버린 채 저 여행을 끝마치게 될 것이다.
글 / 김기창(소설가)

설국 일주
레이카비크 → 달비크 → 회픈
한 영화의 엔딩 신을 볼 때였다. 범죄물로 전개되던 영화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자 눈가를 적실 만큼 서정적인 영화로 둔갑했다. 배우도 같고, 감독도 같았다. 한때 경연 프로그램에서 청중의 눈시울을 적시던 음악이 깔린 것도 아니었다. 스크린 속 배우는 지프를 몰고, 숨 막힐 만큼 하얀 세상을 달리고 있었다. 그곳은 한겨울의 아이슬란드였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대지는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릿해 보였다. 게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아득하게 솟아오른 언덕과 그 위에 덮인 눈이 있었으니, 온 세상이 희게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 한가운데에 모세의 기적처럼 아스팔트 길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이곳이 현실 세계라고 깨우치듯…. 그 길마저 없었다면, 나는 그곳을 지구가 아닌 어떤 미지의 공간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은 이런 것이다. 흰 눈이 적당히 쌓였다고 판단되는 겨울날, 레이카비크의 한 렌터카 사무실로 간다. 그곳에서 한 달은 내 발이 되어줄 튼튼한 사륜구동 지프 하나를 빌린다. 그리고 본 이베어와 시규어로스의 음악을 들으며, 해안선을 따라서 거대한 섬 아이슬란드를 한 바퀴 쭉 도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추억을 땔감 삼아 추운 세상을 몇 해쯤은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
글 / 최민석(소설가)

하얀 나라들과 빨간 자동차
하바롭스크 → 이르쿠츠크 → 옴스크 → 누르술탄 → 타슈켄트 → 아슈하바트
작년에 파리에 다녀왔다. 모스크바 환승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비행기를 놓쳤다. 공항에 갇혀 지옥 같은 20시간을 보냈다. 다시는 모스크바에 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나의 대륙 횡단은 옴스크와 카자흐스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을 따라 투르크메니스탄을 종착지로 한다. 혹자는 그럴 거면 러시아가 아니라 올란바토르를 거치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 세피아2는 몽골의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수 없다. 내 첫 자동차는 빨간 세피아2였고, 그 차는 이미 5년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나는 항상 그 차와 함께 대륙을 횡단하고 싶었으니까. 이번 망상에 데리고 간다. 세피아2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겨울에 간다. 이유가 다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유라시아 대륙은 놀라웠다. 도시를 제외하고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빨간 자동차는 언제나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이 여행은 오로지 세피아2를 위한 깔맞춤 여행이다. 나는 세피아2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길 바랄 것이다. 하바롭스크의 숲은 한국의 숲과 비슷한 온대림 지역이니까, 어서 이르쿠츠크를 달렸으면, 더 광활한 지역이 나왔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이르쿠츠크에서는 한국에서 팔아넘긴 중고 버스들을 제외하면, 빨간 자동차가 별로 없대. 가자 세피아2. 조금만 더 힘을 내라. 그리하여 옴스크에 도착하면 차가 퍼져버리겠지. 바퀴가 눈에 빠져버리거나. 주위에 빨간 것은 내 자동차밖에 없을 것이다.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가야 하는데. 국가 정책상 하얀 자동차밖에 없다는 그 나라.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너는 거기서 가장 빨간 자동차가 될 수 있을 텐데. 우린 아직 옴스크다. 유배지로 유명했던 요새의 도시.
글 / 김승일(시인)

    피쳐에디터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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