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2011년, 이효리 | 지큐 코리아 (GQ Korea)

EDITOR’S LETTER – 2011년, 이효리

2020-12-26T14:17:02+00:00 |book|

그날은 한여름이었는데도 덥지 않았다. 하늘색 면 수트에 흰색 고무 샌들을 신고 알이 작은 시계를 차고 이효리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사이즈가 큰 데님 셔츠, 거의 회색으로 바랜 블랙 진, 끈을 헐겁게 맨 검정 운동화 차림으로 아주 조용히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쯤 일찍, 매니저도 없이 표표히. 아, 어딘지 멜로해 보이는 강아지 순심이가 함께였지. 스튜디오엔 둘뿐이었고 준비는 덜 된 상황이어서 어색하게 기웃거리다가 남의 집 부엌 살림을 뒤져 차 한잔을 권했다. 두꺼운 머그잔을 쥔 손이 생각보다 투박하고 컸다. 그녀는 착한 고양이처럼 초연하고도 작게 앉아서 시시한 얘기에도 쫑긋하게 반응했다. 화장기 없이 말간 얼굴, 부드럽게 낡은 면 셔츠, 낮은 톤의 목소리 때문인지 시간은 고운 모래처럼 천천히 흘렀다. 나는 정작 고요한 시간 이후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사진가는 이효리를 촬영하고 와선 기진맥진 한 기색으로, 그녀를 이렇게 표현했다. “타고난 수퍼스타야. 추리닝을 입어도 자기 자세가 있어. 그래서 도무지 카메라를 놓을 수가 없어.” 그날 우리는 얘기만 했어서 카메라 앞에서의 이효리 데카당스는 못 봤다. 그러나 가까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녀를 먼저 만난 사람들에게서 들은 목격담, 그중에서도 이효리의 자세와 태도란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를 동경하는 무수한 후배들 중에 포스트 이효리가 없는 이유도. 그녀에게는 말이나 행동 어떤 쪽 이든, 빈틈이나 잠깐의 퍼즈, 아무것도 아닌 순간까지 되짚게 만드는, 송두리째 집중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즉각적으로 마음을 흔들었다. 그날 그녀에게 완전히 반했고 헤어질 무렵엔 서운하기까지 했다. 이달에 실린 사진과 인터뷰에는 이효리만의 드물고 고유한 애티튜드가 넘칠 듯 가득하다. 이효리는 많이 변한 것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같은데, 시간은 그사이 2021년. 10년 전 인터뷰 중 지금도 기억하는 말들이 있다.

주저하는 마음이야말로 이기적인 거죠. 후회하진 않아요. 다만 서툴렀단 생각은 들어요. 처음이어서 방법을 몰랐어요. 지금은 내가 한 얘기 때문에 욕을 먹어도 괜히 그랬단 생각보다는, 앞으로는 현명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면 안 돼요. 사람마다 가치관이 전부 다르니까. 타인에게 진심을 전하려면 준비가 충분해야 해요.

분명 포기해야 하는 건 있어요. 하지만 포기할 만큼 가치가 있으니까 용기도 가질 만한 것 같아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내가 아직 돈도 못 벌었고 하고 싶은 것도 별로 못 해봤고,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으면 행동할 수 있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넌 잃을 게 많은 데 두렵지 않냐고도 물어요. 글쎄요, 잃어봤자 대부분 물질적인 거잖아요? 사람은 안 변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내 안의 하나가 바뀌니까 다 변하더라고요. 사물이나 이슈를 보는 눈,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 옛날에는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느낀 사람들도 생각의 맑은 면을 보면, 다시 보게 돼요.

연예계 활동하면서 내가 힘이 없구나,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달라요. 방송에 뭘 입고 나오면 그게 다음 날 다 팔리고 그런 게 만약 이효리의 파급력이라면 동물이나 환경 얘기는 그만큼의 파워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옛날에, 지금보다 인기 많을 때, 텐미닛 부를 때, 더 빨리 생각했으면 더 알려 지지 않았을까 후회도 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러잖아요. 남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니 갈길 가라고. 그럼 마음도 편하고 좋을 거라고. 근데 전 그게 해답은 아닌 것 같아요. 불편하고 욕먹고, 손해를 보더라도 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안 하려고요.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마냥 화려하고 섹시할 수는 없잖아요. 그것만 방법도 아닐 테고. 그런 외적인 치장을 안 하고도 더 멋있을 수 있으면 그거야말로 진짜 아닐까?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서 보편적이고 단순한 기준 외에 다른 차원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사람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동물 타령이냐고도 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게 단순히 동물 문제가 아니고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생태계 파괴라든지 기아 문제라든지… 커다랗게 하나로 이어져 있어요. 결론은 우리가 조금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후대에는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고. 그런 마음이에요. 그냥. 거창할 것도 없어요.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거예요. 포기할 건 포기하고 한 발씩 조심스럽게 가고 있죠. 그런 정도가 제 직업을 버리지 않고 일을 하면서 신념도 지키는 방법이에요. 맨날 면 운동화만 신고 어디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대에선 하이힐도 신어야겠죠. 그런 제 모습을 좋아하는 분도 많으니까 저도 그분들께 실망을 드리긴 싫어요. 인기가 있어야 제 말에도 힘이 생기는 거잖아요. 계속 인기 있고 영향력 있고, 그래서 생각을 더 많이 말하고 싶어요.

Ps. 동물 복지와 환경 보호에 관한 매거진 <오보이><오보이>의 2011년 인터뷰, 특정 주제에 대한 얘기들이지만 결국 사는 데 다 통하는 말이어서, 그 때의 대화를 간혹 생각했다. 2021년 1월호 <지큐><지큐>인터뷰에서 이효리는 이 시절의 자신에 대해, 그때는 철이 덜 들어 뭐든 강경하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고, 어렸고 지나치게 몰두했다고 말했다. 이제 어떤 생각이든 좀 더 조용하고 깊게 전하고 싶고, 말보다는 스스로의 삶과 모 습으로 보여주고 싶다고도.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효리는 후회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으며, 즉흥과 통찰을 오가며 한결같이 뜨겁다. 두 인터뷰를 동시에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시간이 별로 없다고 늘 불평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