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부동산 대란 속 진정한 집의 의미

2021.01.20GQ

집이란 무엇인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둔갑해가는 현대의 집에 대해 생각해본다. 똘똘한 한 채에 대하여.

논 한가운데 폐가를 고쳐 산 지 어느새 5개월 차, 이 집을 산 날의 기억으로 돌아가려니 까마득하다. 시골에 살게 된 후로 초저녁 잠이 많아져 저녁 먹고 얼마 안 돼 잠에 들었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며 이 글을 쓴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집이란 무엇인가, 그 어려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한번 써보겠다고 원고 청탁에 덥석 응했으니 이제는 그 답을 찾을 때가 됐는데 도통 명쾌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내 앞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은 어지러운 듯 나름의 질서가 있는, 새벽녘 이 집의 부엌 풍경이 참 마음에 든다.

오래 된 나무, 거칠게 마감된 회벽, 합판으로 대충 만든 듯한 싱크대, 곳곳의 창문(사실 나름의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 있지만) 덕에 웃풍이 들어와 약간의 냉기가 도는 공간.

이제는 일상이 되어 익숙해진 이 어스름한 풍경이 내 취향이고 내 집일까. 나는 그렇다고 답하고 싶다. 마음에 드는 사물의 풍경을 차분히 눈에 담다 보니 집에 대해 이야기해볼 자신이 드디어 아주 조금 생긴다.

집이란 건 사실 별게 없다. 잘 먹고, 잘 쉬고, 편안하면 된다. 대학생이 되고 첫 독립을 해서 지하 고시원에 들어갔을 땐 생애 처음 내가 자란 집이 아닌 다른 내 공간이 생긴다는 것 자체만으로 설렜다. 고시원 방 안에는 2층짜리 벙커형 침대와 그 아래에 책상과 TV가 놓여 있었다. 그렇게 지하 고시원에서 첫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창문 한 칸 없는 그곳에는 낮과 밤이 없었다. 불을 켜면 낮이었고 불을 끄면 끝없는 밤이 찾아왔다. 하루는 17시간을 쭉 자고도 계속 졸음이 가시질 않아 무섭기도 했다. 이렇게 잠만 자면서 한 달을 보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여유가 생기면 다음에는 꼭 해가 드는 방에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그 후 이사를 갔다. 지상 고시원으로.

월 23만원에서 25만원,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으로 이사 가는 데 한 달에 2만원, 1년에 24만원의 추가 비용이 필요했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둠뿐이었던 나의 공간에 낮과 밤이 찾아왔으니. 그건 거의 천지창조의 순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다음, 창문이 있는 방으로 이사 가는 데 또 1만원을 보탰다. 이제는 월 26만원. 월 23만원 지하 고시원에서 월 26만원의 작지만 창문이 있는 지상 고시원으로 가면서 1년 월세 지출비가 36만원 늘었지만 역시나 아깝지 않았다.

그 후로도 유목민처럼 유랑하는 이사는 이어졌다. 이문동 옥탑방, 반 지하, 원서동, 부암동…. 서울의 방과 방으로 손에 꼽기 힘들 만큼 이사를 다니며 나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숨만 쉬고 살아도 돈이 든다는 것, 그리고 집이 살 만해지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

그래서 나는 샀다. 시골 폐가를. 허허벌판, 아니 허허논밭의 폐가를. 큰 사춘기 없이 성장한 어른의 뒤늦은 반항심으로. 일만 하려고 사는 건 이왕 태어난 나에게 무례한 것 같아서.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서. 내 일상의 즐거움이 나에게 영영 작별을 고하기 전에 ‘다들 그렇게 살잖아’라는 무언의 압박을 한 번이라도 이겨보고 싶어서.

평일에는 평소처럼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시골집에 내려가 제대로 쉬어보면 어떨까,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처음에는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방송국 피디라는 직업의 특수성상 물리적인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점도 나름 든든한 배경이었다. 서울에서는 낡고 오래된 상가 주택 전셋집이 최소 1억 9천만원인데 시골에서는 (비록 이 역시 낡고 허름한 폐가지만) 대지 3백 평에 건물 두 동이 4천5백만원이라니, 서울 집값에 비하면 ‘단돈 얼마’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가격에 마음이 절로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만약 서울과 시골을 오가는 이중생활이 피로해져 실패하더라도 3백 평이라는 너르고 너른 대지가 도시살이에 지친 내게 비빌 언덕이 되어줄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4천5백만원은 ‘사기 당했다’라고 생각하고 잊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결코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한번 미친 척하고 저질러볼 일, 저질러보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구나’ 허튼 꿈에서 깨야 할 일, 그렇게 체념 섞인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머리를 잘 쓴 덕인지, 시대를 잘 탄 덕인지, 집을 잘 산 덕인지, 현재 서울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지 않고 시골집에서 재택근무 중이다. 방송국의 평범한 피디였던 나는 어쩌다 보니 구독자 수 25만 명의 유튜버가 되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현대인이 25만 명쯤 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아, 4천5백만원짜리 폐가에 5천1백만원이라는 수리비를 들인 덕에 도중에 서울에 있는 전셋집을 빼고 전라북도 도민이 된 것도 새로 생긴 변화다.

시골집에서는 걱정 없이 푹 쉬게 될 줄 알았는데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일과 쉼의 경계가 되려 모호해져 골치 아플 때도 있다. 왜 직장인과 프리랜서, 시골과 서울,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느냐고 시비가 걸릴 때도 있다. 밭일에, 영상 편집에, 서울 출장에…. 내 삶은 왜 이리 빡빡한지 불만이 가득했던 때보다 다섯 배는 더 바쁜 것도 같다. 내 마음대로 된 일이라고는 처음에 이 시골집을 사게 된 것 그뿐이다. 그런데 즐겁다. 좋다.

그러니까 시골에 집을 사라는 말이 아니다. 도시 집값이 이렇고, 향후 전망이 저렇고, 과감히 투자해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모르겠다. 부동산 시장을 논하기에는 나 역시 도시에 내 한 몸 편히 뉠 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하는 많은 현대인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저 전방 4킬로미터 안에 구멍가게도 없는 이곳에서 온전히 자신과 직면하고 마주하며 나를 발견해내는 재미로 지낸다.

내게도 고시원과 월셋방을 전전하며 어렴풋이 그려 나간 ‘내가 살고 싶은 집’이 있었다. 비록 직장에서 가까운 곳을 구하느라 시끄러운 대로변에 자리했지만, 자취 10년 만에 ‘내가 살고 싶은 집’의 한 조건이던 채광 좋은 집을 전세로 얻어 기쁜 적도 있다. 잠 잘 곳과 짐 둘 곳을 겨우 나눠둔 자그마한 전세방이었지만 그때야 나는 월세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요리책을 꽂아둔 그 집 부엌에서 나는 급히 라면을 끓여먹곤 했다. 그 라면마저 제대로 끓일 정신머리가 없어 짜파게티의 물을 버리지 않은 채 짜장 분말 수프를 넣었던 어느 날은 웃기긴 한데 짜증이 나서 눈물이 차올랐다. 친구들을 불러 음식 해 먹이는 걸 좋아했지만 그건 분기별 이벤트라 불릴 정도로 드문 일이었고, 대부분의 날이 손바닥만 한 고시원에 살던 때와 다를 바 없이 피곤에 절어 까무룩 잠들곤 했다. 10년 동안 집은 이러해야 한다고 쌓아온 나의 생각이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쓸모없어진 느낌이었다.

결국 내게 집이란 나에게 집중하는 공간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집을 사는 게 투자인 요즘 시대에, 나는 내게 집중하여 투자하는 공간을 집으로 정했다. 집이 살 만해지면 삶의 질이 달라지는구나, 월세방을 전전하며 깨달았던 나의 생각을 다시 정리하면 내게 살 만한 집이란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시골 폐가를 사며 덤으로 따라온 다른 라이프스타일, 그로 인한 인생의 전환이 내게 약간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로등 불빛 마저 희미한 이곳에 오고 나서야 나는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글 / 최별(MBC ‘오느른’ 피디)

    피처 에디터
    김은희
    사진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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