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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구 "시를 좋아해요 읽는 것 말고 쓰는 걸요"

2021.01.25GQ

여진구는 기대감으로 넘치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 믿음은 이번에도 틀림없다.

벨벳 재킷, 셔츠, 팬츠, 모두 앤 드뮐미스터 at 아데쿠베. 앵클부츠, 로스트가든. 네크리스, 브레이슬릿, 모두 까르띠에.

프린팅 터틀넥, 폴스미스.

셔츠, 팬츠, 모두 디올 맨.

카디건, 하와이안 셔츠, 모두 셀린느 옴므 by 에디 슬리먼.

쇼트 코트, 블랙 스트랩 재킷, 셔츠, 레더 팬츠, 앵클부츠, 모두 던힐.

큰일이네요.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날이 추워요. 얼마 전 비를 맞는 장면을 찍었는데 진짜 겨울이란 걸 실감했어요.

날카로운 추위 속에 쫄딱 젖으면서도 그런 반응이 전부였어요? 겨울은 당연히 추우니까…. 하하.

노하우는 없나요? 강추위를 견디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핫팩을 팔 뒤에 붙이곤 해요. 그러면 누군가 뒤에서 포근하게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방금 <스타트업>에서 목소리를 연기했던 인공지능 스피커 장영실 같았어요. 영실이는 뻔한 대답은 하지 않잖아요. 맞아요. 특별출연이었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극 중 영실이가 건네는 말이 나중에 복선처럼 돌아오기도 해서, 먼저 인공지능 스피커처럼 딱딱하게 대사를 소화한 뒤 앞으로의 일을 예언하는 듯한 투로 다시 한번 연기했어요.

처음에는 여진구가 맞다, 아니다 추측이 난무했던 걸로 기억해요. 감독님이 먼저 비밀로 하자고 했어요. 제 주위에서도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아챈 사람도 많았고, “그게 너였어?”라고 뒷북을 치는 경우도 있었죠.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드라마를 챙겨 보면서도 제가 잠깐 등장했던 마지막 회를 볼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어요. 성우 목소리라고 생각했대요.

칭찬 같은 말이네요. 영화 <그녀>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걸 보면서 온전히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저는 눈빛에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그래서 대사 없이 눈으로만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자주 하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말투나 목소리 톤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무얼 물어봐도 인공지능 스피커처럼 척척 대답할 수 있는 분야가 있나요? 물론 연기 말고요. 연기를 제외하면 음…, 금방 떠오르는 게 없어요. 끼워 맞춘다면 연애 정도?

연애요? 어릴 시절부터 대본을 보면서 상황별로 남자와 여자의 심리가 어떤지, 이런 행동이나 말은 어떤 뜻인지, 글로 접했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연애 상담을 해오면 교과서적인 대답 정도는 해줄 수 있어요. 문제는 그렇게 배운 것과 실제 연애는 다르다는 거죠. 예를 들어 커플로 연결될 가능성이 낮다고 봤는데 나중에 사귀고 있더라고요. 하하.

확 신뢰도가 떨어지는데요. 그럼 자신 있을 것 같은 연기에 대해 질문 하나 할게요.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어요? 아, 이것도 애매해요. 연기를 오래 했어도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그래도 제가 생각하는 범위에서 설명한다면 연기는 감각이 중요하다고 봐요. 똑같은 장면을 연기해도 사람마다 표현하는 색깔이 다 달라요. 결국 자신의 감에 따라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연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오래 하다 보면 늘게 돼요. 연기 경력이 많은 선배님들만 봐도 본인만의 스타일로 그 감을 예리하게 갈고 닦아 오셨어요. 그러니까 연기를 하는 게 꿈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제가 하겠다는 얘기는 아닌데…. 참고할게요.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하는 것처럼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게 이끌어준 작품은 뭐라고 생각해요? 2019년에 한 드라마 <왕이 된 남자>와 <호텔 델루나>가 저한테는 의미가 커요. 이 두 작품을 거치면서 적극성을 갖게 됐고 좋은 고집도 생겼어요.

어떻게요? <왕이 된 남자>는 1인 2역을 소화하느라 무척 힘들었지만 연기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고, <호텔 델루나>는 스스로 칭찬을 해줄 수 있었던 작품이에요. 많은 사랑과 칭찬을 받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해도 괜찮구나, 깨달았죠. 그때 되게 벅찼어요.

그 전에는 어땠길래요? 슬럼프 아닌 슬럼프라고 해야 할까요? 칭찬도 듣고 작품도 계속했지만 감독님과 선배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때라 스스로 만족을 못 했어요. 그런데 <왕이 된 남자>와 <호텔 델루나>에서는 제가 분석한 것을 현장에 가져가 의견을 내고 준비한 대로 해보기도 했어요. 이런 식으로 연기를 한 건 처음인데 많은 걸 배우고 느꼈어요. 다음 작품을 빨리 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고요.

코트, 디올 맨.

블루종, 팬츠, 슬리브리스, 모두 김서룡 옴므. 네크리스, 까르띠에.

프린팅 터틀넥, 폴 스미스. 레더 재킷, 레더 팬츠, 모두 르메르. 화이트 앵클부츠, 로스트가든.

송치 버건디 코트, 블랙 팬츠, 모두 김서룡 옴므.

그린 코트, 아이보리 셔링 톱, 모두 뮌.

지금 찍고 있는 <괴물>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연기를 하면서 웃는 장면이 거의 없어요. 제가 맡은 역할은 완벽히 이성적인 인물은 아닌데 본인은 이성적이라 믿고 굉장히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봐요. 그러다가 불현듯 감정적인 행동이 튀어나오기도 해요. 이런 캐릭터는 처음이에요. 그래서 연기는 할 때마다 매번 새롭다고 느껴요.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신하균과 재미있는 인연이 있더군요. 2006년 작 <예의없는 것들>에서 신하균의 아역을 연기했어요. 맞아요. 어릴 때부터 선배님의 연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사석에서도 편하게 선배님을 뵙고 싶은데 요즘은 촬영 외에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아쉬워요.

여진구는 나이에서 자유로운 사람 같아요. 이제껏 소화한 캐릭터들이 나이에 국한되지 않기도 하고, 성동일, 김희원과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에서처럼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들과 잘 지내요.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편인가요? 상황에 따라 달라요. 예능은 선배님들이 워낙 편하게 대해줘서 저의 편한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지,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해요. 반면 작품 안에서는 필요에 따라 나이를 잊게 되는 강심장 마인드가 있긴 있어요. 선배님들이 나이는 신경 쓰지 말고 연기하라는 말씀을 해주시는데, 배우 대 배우로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직 어리구나, 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좋아하는 대상을 발견했을 때. 취미 중 하나가 조립인데 갖고 싶은 프라모델을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순수한 리액션이 나와요.

<바퀴 달린 집>에서 유튜브로 보고 배운 실력으로 회를 뜨기도 했는데, 유튜브를 통해 또 어떤 것들을 간접 경험하고 있어요? 요새 ‘포뮬러 1’ 레이스 영상에 빠져 있어요. 운전을 좋아하는데 이건 다른 차원의 세계예요. 보면서 언젠가 카레이싱을 꼭 해보고 싶다, 생각을 해요. 요리 콘텐츠도 챙겨 봐요. 깊게 들어가면 정통 이탤리언, 중식, 일식 요리법이 다 나와 있어요. 저한테는 ‘유튜브 선생님’인 거죠. 그리고 글쓰기 관련 영상. 다른 사람은 어떻게 쓰는지 궁금해서 가끔 찾아봐요.

그건 왜요?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시를 좋아해요. 읽는 것 말고 쓰는 걸요.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과 떠오른 생각을 짧게라도 끄적이는 게 좋더라고요.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어요. 연기를 하고 있으니 나도 한번 써볼까 해서 도전했는데 긴 글을 쓸 수 있는 글재주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짧은 글부터 조금씩 써볼 요량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멋진데요. 주로 언제 시상이 떠올라요? 대중없어요. 심심할 때 툭 쓰거나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좋아서 쓸 때도 있고, 무심코 올려본 밤하늘의 달이 예뻐 보여서 쓴 적도 있어요. 한번은 밤샘 촬영을 앞두고 오늘은 어떤 밤을 보내게 될까, 하는 마음을 시로 적기도 했어요.

여진구가 쓴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나 표현은 뭐예요?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잠시만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감정을 부풀리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 같아요. 그냥 ‘예뻤다’ 보다는 ‘너무 예뻤다’ 그리고 ‘훨씬’, ‘많이’, ‘어제보다 더’….

세심하고 예민하게 감정을 다루고 그걸 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본능적인 욕구가 있지 않을까요?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의 영향을 받기도 해요? 네. 작품을 하고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입각해 시를 쓰게 돼요. 그게 참 재미있어요. 왜냐면 내가 예쁘다고 여기는 것을 이 캐릭터는 어떻게 느낄지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돼요. <호텔 델루나>를 찍고 있을 때는 인과 연에 대해 주로 썼어요. “기다리겠습니다. 얼마가 걸리든 기다리겠습니다”, “날 믿고 떠나셔도 돼요” 같은 표현들. 다시 꺼내 볼 때마다 내가 이런 내용을 어떻게 썼을까 싶어요.

인터뷰하는 동안 밖에는 해가 저물고 눈이 아주 펑펑 내리고 있다고 해요. ‘눈 오는 밤’ 하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음, 눈을 감고 눈을 느껴보고 싶어요. 밤하늘과 똑같이 어두운 상태가 되지만 눈이 닿는 촉각이 더 선명해지면서 이런 궁금증이 들 것 같아요. 너는 어디서 오는 길이고, 나 말고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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