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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 예능의 현주소

2021.03.17GQ

<나는 꼼수다>로 시작해 <썰전>으로 만개한 정치 예능이 관찰 예능의 등장으로 또 다른 격변기를 맞았다. 한 단계 발전하는가 싶던 정치 예능은 그렇게 후퇴 중이다.

온스타일에서 방영되는 NBC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를 즐겨 봤다. 2005년 무렵이었다. 채널이 돌아가지 않게 붙잡는 건 진행하는 남자였다. 남자는 늘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독불장군처럼 외쳐댔다. “당신, 해고야(You’re fired)!” 중독성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말은 미국에서 유행어가 됐고, 남자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고, 전국구 셀럽이 됐고, 훗날 미국 대통령도 된다. 짐작하겠지만,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 계열사 인턴십을 차지하기 위해 청춘들이 경쟁을 벌이는 이 시리즈는 도전자보다 트럼프가 누구를 향해 해고를 외치느냐가 더 인기였다. ‘억만장자 플레이보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트럼프였으나, <어프렌티스>에서는 좀 달랐다. 칼 같은 결단을 내리는 그에게선 ‘협상의 달인’ 이미지가 풍겼다. 후광 효과가 컸다. 트럼프는 이를 즐기고 활용했다. 그리고 회고했다. “원래 유명했지만 수천만 명이 시청하는 <어프렌티스>는 차원이 달랐죠.”

예능 홍보의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예는 가까이에도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2009년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신드롬’을 일으킨 뒤, 청춘 세대의 인지도를 발판 삼아 정치에 입문했다. 안철수는 최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성이라고 하면 <무릎팍도사> 나갔을 때가 최고였죠.”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박근혜 당시 후보가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비키니 사진을 공개했고, 특전사 출신 문재인 후보가 기왓장 격파 시범을 선보였다. 두 후보 모두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고 홍보했다.

정치와 예능의 만남은 어떤 면에선 필연적이다. 정치인은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산다. TV는 시청률에 목을 맨다. 정치인에게 예능은 대중과의 거리감을 낮춰주는 접근성 좋은 놀이터다. 신선한 얼굴이 필요한 방송국에 정치인은 차별화된 콘텐츠를 건질 수 있는 블루오션이다. 그렇게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정치인의 예능을 통한 이미지 관리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효과는 수치가 증명한다.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6년 미 대선에서 정치 예능인 심야 토크쇼에서 정보를 얻었다고 응답한 비율이 25퍼센트였다. 물론 국내 정치 예능은 미국에 비하면 역사도 짧고 시행착오도 아직 많다.

국내 정치인 중 예능 출연의 교두보 역할을 한 건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1996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 숨겨둔 입담과 재치를 펼쳐내며 근엄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봤다. 정치인이 예능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정서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점으로 예능은 정치인의 숨겨진 이면을 드라마틱하게 재발견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2013년 차기 당권 주자로 거론되던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JTBC <비무장 정치쇼: 적과의 동침>에서 “귀엽고 섹시한 박지원 앙!”을 선창하자,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큐티 섹시 뷰티 김무성 앙~”을 후창한 건 예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위 조절은 각자의 몫. 굴욕적 ‘짤’이 인터넷에 박제되면 고통도 평생 간다.

이벤트성이 짙었던 국내 정치 콘텐츠가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확장된 데에는 <나는 꼼수다>라는 ‘가카헌정방송’과 <썰전>이라는 ‘독한 혀들의 전쟁’이 있었다. 특히 <썰전>은 진보와 보수를 대변하는 패널이 대립을 이뤄 양면적 시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치 예능의 차별화를 꾀했다. 시사적이었다. 재미도 있었다. 일부 패널의 ‘이미지 세탁’ 논란과 ‘정치 연성화’라는 비판이 따르긴 했으나, 정치는 고리타분하고 정치인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을 적잖이 흔들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SNS를 중심으로 의견이 모이고, 이를 통해 정치 담론이 형성됐다는 점도 긍정적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격동의 시간은 <썰전>에는 황금기였다. 유권자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쟁점과 인간적인 매력을 동시에 선보일 기회를 <썰전>에서 부여받았다. <썰전> 포맷을 벤치마킹한 채널A <외부자들>과 MBN <판도라>가 취항한 게 이 무렵이다. MC들이 분위기를 띄우며 정치인들 입맛에 맞췄던 과거와 비교하면, 정치인들이 각자의 순발력과 실력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정치 예능의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시기라 할 수도 있다.

정치가 소위 ‘먹히는 소재’라는 것이 입증되자, 이를 다루는 프로그램 수도 방식도 형식도 다양해졌다. 2017년 SBS는 <대선주자 국민면접>이라는 예능이 가미된 프로그램을 기획해 후보들을 차례로 검증했다. SBS 모바일 예능 <양세형의 숏터뷰>는 정치인들의 지지율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프로그램으로 영향력을 떨쳤다. 민감한 질문들을 뻔뻔하게 던지는 양세형의 깐죽 캐릭터 앞에 출연자들은 정면 돌파든 회피든 선택의 순간을 맞았다. 홍보가 더 필요한 정치인들은 JTBC <말하는대로>의 버스킹 현장을 대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노잼’ 문재인, ‘안깨비’ 안희정, ‘사이다’ 이재명, ‘아재’ 안철수, ‘국민장인’ 유승민, ‘심블리’ 심상정…. 예능을 통해 캐릭터 쇼는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콘텐츠보다 사건과 인물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분위기는 정치 예능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러한 우려는, 예능 흐름이 ‘관찰 예능’으로 바뀌면서 여지없이 부작용을 드러내는 중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SBS <동상이몽>)를 시작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원희룡 제주지사(KBS2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가 관찰 예능에서 일상을 공개하며 ‘이미지 정치’와 내밀하게 손을 잡았다. 최근엔 나경원, 박영선 서울시장 예비 후보가 TV조선 <아내의 맛>에 출연해 논란과 화제의 중심에 섰다. 선거 시기를 코앞에 둔 노림수 출연이라는 점에서도, 사생활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관찰 예능에는 여러 위험 요소가 숨어 있다. 정책이나 공약보다 정치인 개인의 매력에 치중한다는 것이 그렇고, 그것을 100퍼센트 실제라고 믿는 시청자들이 생긴다는 점이 그렇다. 리얼 버라이어티에도 연출과 대본이라는 건 엄연히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선거 참모는 괜히 있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시나리오를 짜지 않을 리 만무하다. 나경원 편이 박영선 편보다 더 흥미로운 동시에 논란도 많았던 것은 이 시나리오가 너무 빤히 읽혀서다. 딸의 성적 비리 의혹을 의식한 듯 자격증을 강조했고, 아들의 군 입대 소식을 은근히 흘려 원정 출산 의혹에 대응했고, 화장품을 아껴 쓰는 모습으로 1억원 피부과 논란에 맞섰다. 그러니까 나경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의 논란에 하나하나 해명하는 듯한 구성으로 완벽하게 짜였다.

관찰 예능은 편집을 통한 통제가 용이한 세계이기도 하다. 제작진이 어디를 자르고 이어 붙이느냐에 따라 장면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왜곡으로 이어질 가능성? 선거가 인기투표로 흐를 가능성? 모두 있다. “이런 진부하고 노회한 방식으로 서울시장을 하겠다는 이런 건 이제 없었으면 좋겠다.” 나경원, 박영선의 <아내의 맛> 예능 출연을 두고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공감한다. 한 단계 발전하는가 싶던 정치 예능은 그렇게 후퇴 중이다. 예능이 정치인의 킹메이커 노릇을 할 필요가 있을까.

    에디터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
    이미지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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